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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29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32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마가복음 9 14-29)


 

[들어가는 ]


인터넷 교보문고에 들어가 ‘불가능’이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보았더니 여러 책들이 나왔습니다. 이런 제목들입니다.


<불가능은 없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불가능한 꿈은 없다>, <,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불가능한 도전은 없다>, < 안에 불가능은 없다>, <열심히 일하는 당신, 불가능은 없다>, <불가능한 변화는 없다>, <필사즉생 불가능은 없다>... 외에도 비슷한 제목을 가진 책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무려 300개가 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디로,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혼동해서는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용하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과, 우리 신자들이 사용하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능력을 100% 이상 발휘함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최선을 다할 불가능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불가능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불가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 닥쳐오는 일들을 보면, 불가능한 일이 정말 없습니까? 사실은 불가능해 보이는 어려운 일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불가능을 넘어설 있는 비밀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1.   불가능을 넘어서는 번째 비결 -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 (14-19)


오늘 본문 바로 13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가 거기서 엄청난 광채가 나는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영광을 체험하고 내려오는데, 아래에는 가지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4)


다른 아홉 명의 제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채로 서기관들과 변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까 놀라며 달려와 맞이합니다(15).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다투고 있습니까?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못하게 귀신 들린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7-18)


예수님이 계신 동안 사람이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데려왔는데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포함해서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이를 고칠 것을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6(7, 13) 보면 이미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며 복음을 전한 경험이 있었고,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에게 와서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달라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제자들은 아이를 고치지 못했고 사람들은 엄청나게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다 싶어서 서기관들은 제자들을 붙들고 늘어지며 공격하고 있던 것입니다(14).


그렇다면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실패했습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19)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을 향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탄식하십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고 물을 ,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제자들)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17:20).


그러니까 무리에게는 믿음이 없었고, 제자들은 믿음이 적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에게 분명히 믿음이 있기는 있었지만, 그것은 제대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이때 실패한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이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누구에게 데려왔습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귀신을 쫓아달라고 부탁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18).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데려왔는데 거기 예수님이 계시니까 급한 대로 제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급하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을 붙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문제 해결 방법이 어디 있다고 하십니까?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19). “ 다른 데로 눈을 돌리느냐?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내게 데려와라.”라고 하십니다.


사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정말 믿어서 데려온 것이 아니라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데려온 것이 아니라 고침을 받기 위해 데려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예수님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능력만 있으면 되니까 상관없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능력이 제자들에게도 있었으니까 예수님이 없어도 제자들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내게로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주님께 데려와야 합니다. 어떤 문제이든, 주님께 가지고 가야 합니다. 주님께 가지고 가지 않고 비슷해 보이는 다른 데로 가거나,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으며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현상이나 능력만 따르면 ‘믿음이 없는 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있는 것은, 믿는다고 , 믿는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누구를 믿느냐 하는 믿음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단들도 열심히 믿지만 믿는 대상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단들이 얼마나 열심이 있는지 모릅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제가 신학교에 다닐 심지어 신학교에까지 전도하러 왔습니다. 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 신학교 기숙사 이름이 Simon's Law였기 때문에 Law School(법대) 알고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열심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하는 것보다 누구를 믿는가 하는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사탄교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 자신을 믿어라. 이단인 크리스천 사이언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믿어라.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기적이나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귈 , 연인간이든 다른 사람과의 교제이든, 서로 대화하며 서로를 알아갑니다. 결코 킁킁거리며 사람의 냄새만 맡지 않습니다. 옷만 붙들고 만지작거리거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그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추구해야지, 어떤 능력이나 기적만 좇으면 그것이 왜곡된 신앙입니다. 우리가 불가능을 넘어서는 삶을 살려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생각을 했을 자신의 마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생각은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자신의 신앙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 에이든 토저(A. W. Tozer)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산타 클로스가 떠오르기도 하고, 어떤 분은 어릴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가 떠오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혹시 자신의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이런 생각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전능하신 분이지만, 내가 지금 당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능하신 분이 아닌 같다’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절실하게 원하는 것에 대해 정확한 타이밍으로 도움을 주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은근히 불신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지식이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다가오십니까? 광대하고 넓은 분으로 알고 있다면, 우리도 넓은 마음을 품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이 풍성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으로 알고 있다면, 우리도 남을 사랑할 있게 됩니다. 용서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다면, 우리도 남을 용서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모습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구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 1:37)


사람으로는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있느니라” ( 10:27)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능치 못함이 없는 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능력을 아는 사람에겐 정말로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2.   불가능을 넘어서는 번째 비결 - 믿음이 있어야 한다 (20-27)


둘째로, 불가능을 넘어설 있는 비결이 바로 믿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로 믿을 우리는 모든 것이 가능한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리를 향해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믿음이 적은 것입니까? 분명히 이전에는 그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성공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파송하시면서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부어주셨습니다(6:7). 그러자 제자들도 나가서 전도하고 귀신도 쫓아내며 병자들도 고쳤던 것입니다(6:12-13).


그런 엄청난 일을 자기가 직접 하게 되니까 제자들은 얼마나 신기하면서도 신이 났겠습니까? 제자들이 얼마나 엄청난 능력을 행했는지 그들의 선생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서, 심지어 헤롯은 자기가 죽인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전도여행에서 너무 기뻐하며 돌아와 보고합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번에 아이의 아비가 자기들에게 귀신을 쫓아달라고 했을 때에도 있을 알았습니다.


이들의 심리 상태를 생각해 보면, 귀신 들린 아이와 씨름하던 제자들은 아홉 명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제자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제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지금 없는 상태입니다. 그때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아버지가 왔습니다. 장면을 상상해보면, 아홉 명의 제자들은 상황에서 아주 신이 났을 것입니다.


전체가 있을 때에는 항상 베드로가 대표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계시고 명도 없는 지금, ‘드디어 우리가 뭔가 보여줄 기회를 잡았다. 베드로만 수제자냐? 우리도 있다. 우리도 병을 고칠 있다.’라고 생각하고, 아마 폼을 잡으면서 문제없다고 의기양양하여 고쳐주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애를 써도 귀신이 나갑니다. 요즘 말로 ‘생쇼’를 해도 아이가 낫지 않습니다. 실패입니다. 얼마나 당황스럽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도대체 겁니까? 그들의 문제가 뭡니까? 그것은 그들이 초심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권세를 주시면서 나가라고 하실 ,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내가 있을까? 정말 될까? 하지만 주님이 하라고 하시니, 해보자. , 주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면서 기도하니까 놀랍게도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 가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순간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기 과시, 자기가 뭔가 있다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간절하게 주님을 의지하며 것이 아니라, 이전에도 했으니까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능력을 믿고 나가다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믿음은 역설입니다. 자신이 약하다고 인정하고 고백하며 주님을 의지할 강하신 주님 때문에 강해집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실패할 때입니다. 실패하는 원인을 보면 분명히 주님이 아니라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능력, 재주, , 성공, 학벌, 이런 것을 의지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내게로 데려오라.”라고 하신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 ‘내가 있지.’가 아니라, 겸손하고 간절히 주님을 의지하면서 주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올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있다는 것과는 반대로, 아무것도 없다고 벌벌 떠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있는 일에도 못한다고 하며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게으름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주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특히 어려움이 닥칠 어떤 생각을 합니까? 사업하는 분들은 불경기라 힘드십니까? 그런데 신문을 보면 10 전에도 불경기였고 20 전에도 불경기였습니다. 항상 불경기가 아닌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계속 불경기라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이것이 벌써 번째 실패인데, 이제는 시작조차 없어.’라고 합니까? ‘죽겠다. 싹이 노랗다. 같은 것이 ? 이젠 틀렸어.’라고 합니까? 특히 자녀들에게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너 까짓 하겠니?’라는 식의 말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심리학자가 벼룩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벼룩이 평소에 20센티미터는 충분히 뛰어오르고, 어떤 벼룩은 무려 30센티미터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리컵으로 덮으니까 뛰어오르다가 위에 부딪칩니다. 계속 그렇게 하다가, 한두 시간 유리컵을 치웠는데도 벼룩들은 컵의 높이인 7-8센티가 자기 한계라고 생각하고 정도 밖에 뛰지 못했다고 합니다. 벼룩 같은 자세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우리는 벼룩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이제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아이를 데리고 나오자, 귀신은 아이를 즉시 발작하게 만듭니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0)


이것은 능력의 주님 앞에서의 최후의 발악입니다. 그때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1)


지금 아이는 경련을 일으키며 땅에 넘어져 입에는 허연 거품을 품고 눈은 뒤집힌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은 너무나 태연하게 아무런 동요 없이 아이의 아비에게 언제부터 이랬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어릴 때부터라고 하면서, 아버지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2)


무엇을 하실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까? 제자들의 무능력 때문에 그들의 리더인 주님까지 능력이 의심받게 것입니다. 엄청난 능력의 주님이 제자들의 잘못으로 능력이 없는 분처럼 보이게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남들에게 시비를 여건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까지 우습게 여김을 당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본이 되는 삶을 살며 선을 행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에는 우리가 믿는 주님이 멸시 당하게 되는 일이 생길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교회에 나올 마음이 없어지게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내가 믿는 하나님을 자기도 믿고 싶다고 정도입니까, 아니면 반대입니까? 혹시 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 때문에 교회 없다.’라고 한다면 정말로 불행한 일입니다. 모처럼 아직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 교회에 나왔을 교회에서 하는 나의 말과 행동을 보고 실족하지는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 없습니다. 유행어였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나 하세요! 그대로입니다. 정말 저나 잘해야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3)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 있거든이란 말은만일 있다면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에게만일이라는 말을 쓰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아무런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있거든 믿음이란, 되면 좋고 되어도 없다는 자세입니다. 진심으로 간절히 구하고 받은 줄로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되는 것이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믿음에 아이의 아버지도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생각을 바꾸어 외칩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4)


믿는데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위대한 기도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못하고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아이가 죽은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5-27)


주님을 믿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을 바란다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으로는 아무리 구해봐야 받지를 못합니다. 나의 믿음 때문에 나의 문제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가 해결될 있습니다.


주위의 사람의 생명이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간절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 낫는 것이 기도에 달려 있다면, 미전도 종족처럼 예수님에 대해 듣지 못해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사람을 어떻게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있겠습니까?

 


3.   불가능을 넘어서는 비결 번째 비결 - 기도해야 한다 (28-29)


이때 제자들은 너무 창피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 봤지만 고치지 못하자, 서기관들이 달려들어 논쟁을 벌였고,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가서 고자질까지 했습니다. 완전히 자존심이 상한 아홉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따로 있을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여쭤봅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없느니라 하시니라” (28-29)


그러니까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조금 전에 아이의 아버지의 기도를 보십시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24). 이런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에게 믿음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며, 주님의 능력을 의지한다는 것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역사가 일어납니다.


캘리포니아 LA 근교의 리버사이드(Riverside) 가면 하베스트 크리스천 펠로우십(Harvest Christian Fellowship) 그렉 로리(Greg Laurie) 목사님이 계십니다.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이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들은 회의보다도 기도를 많이 했다. 만약 초대교회가 시간 회의를 했다면 시간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어떤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시간 회의를 했다면 시간, 아니 10분도 기도하지 못하진 않을까?”


정말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회의를 때는 많이 모이지만, 기도회를 하면 많이 모이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에는 점점 함께 모여 기도하는 분위기가 생겨서 감사한 일입니다.

 


[나가는 ]


오늘 제자들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았고, 아비는 믿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지했습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고백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믿나이다”라고 외칠 있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이야말로 주님의 이런 말씀을 훨씬 많이, 가까이서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문제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려고 하는 상황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없는 무능한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내놓고 고백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가 그런 고백을 했을 제자들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고백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믿음이 점점 가식적으로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자기 의나 믿음이나 능력을 자랑하는 분위기가 교회 안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숫자를 자랑하고 돈을 자랑하고 건물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외국 신학자가 한국 교회를 보고 진단을 내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돈에게 먹혔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기독교가 ‘개독교’나 ‘기득교’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만의 문제입니까?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해야겠습니다. 자기 신앙경력을 자랑하거나, 나는 안다고 생각하거나, 배울 없다고 생각하거나, 안다고 하거나, 나보다 못한 같으면 남을(특히 새로운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자기 자랑과 교만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면으로 , 오늘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가 드렸던 짧은 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일종의 영적인 ‘헝그리 정신’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 힘으로 뭔가를 있다고 믿는 교만한 사람들이 많으면 공동체는 소모적인 경쟁과 시기심으로 허덕이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은 능력이 없으며 가난하고 목마른 상태라는 것을 고백할 있다면 간절한 마음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구하며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능력이 없다는 말만 한다고 반드시 간절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 “함께 사역을 합시다. 이것을 맡아서 해보시면 좋겠습니다.”라고 권하면 “저는 능력이 없어서 못합니다. 믿음이 약해서 못합니다. 자격이 되어서 못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가 능력이 없으니까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이나 믿음이나 자격으로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I cannot”이라는 말이 사실은 I will not”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는 못합니다’가 아니라 사실은 ‘나는 하기 싫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고백은, 하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 힘으로는 없으니까 도와달라고 것입니다. 오직 주님이 도와주실 때에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고백할 있는 이러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의 기도는 바로 이런 목마름과 신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럴 예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의 무한한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드리며 나아갈 , 나는 능력이 없지만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기적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에게 능력이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자랑과 교만,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며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마음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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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방문" (행 25:13-27)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2 (12/08/2019) kpccoh 2019.12.08 3616
239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행 25:1-12)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1 (12/01/2019) kpccoh 2019.12.01 1148
238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한 사람" (눅 17:11-19) - 추수감사절 메시지 (11/24/2019) kpccoh 2019.11.24 3298
237 "회복과 교회" (행 1:8, 21-26) - 조문길 목사 (11/17/2019) kpccoh 2019.11.17 869
236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 (행 24:22-27)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0 (11/10/2019) kpccoh 2019.11.10 2543
235 "부활의 소망에 대한 변호" (행 24:10-21)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9 (11/03/2019) kpccoh 2019.11.03 1445
234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짓 고소" (행 24:1-9)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8 (10/27/2019) kpccoh 2019.10.27 2102
233 "예루살렘에서 다시 가이사랴로" (행 23:25-35)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7 (10/20/2019) kpccoh 2019.10.20 1496
232 "바울에 대한 암살 음모가 발각되다" (행 23:12-24)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6 (10/13/2019) kpccoh 2019.10.13 1018
231 "공회 앞에 선 바울" (행 23:1-11)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5 (10/06/2019) kpccoh 2019.10.06 2840
230 "이는 로마 시민이라" (행 22:22-30)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4 (09/29/2019) kpccoh 2019.09.29 2184
229 가정교회 간증집회 - 곽인순 목자 (09/22/2019) kpccoh 2019.09.22 319
228 "바울의 회심 및 사명 간증" (행 22:1-21)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3 (09/15/2019) kpccoh 2019.09.15 2842
227 "예언대로 일어난 결박과 환난" (행 21:27-40)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2 (09/08/2019) kpccoh 2019.09.08 1569
226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다" (행 21:15-26)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1 (09/01/2019) kpccoh 2019.09.01 2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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