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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27일 주일예배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 15

믿음의 기도를 드리라

(야고보서 512~20)

 

[들어가는 말]

 

흔히 어떤 일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면서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져라.” “이게 틀리면 내가 성을 간다.” 장을 지지는 것이 무엇이고 성을 어떻게 가는 건지 모르겠는데, 자기 말이 틀렸어도 손에 장을 지진 사람도 못 봤고, 성을 간 사람도 못 봤습니다. 말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이 책임 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부터 돌아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많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요즘 말을 바꾸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정치인들의 말을 수시로 바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입장에 따라 하기 때문에, 지금은 이렇게 이야기하다가도 상황이 바뀌면 다르게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는, 무슨 일을 놓고 막 반대를 했는데 입장이 바뀌니까 막 찬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라는 시리즈로 말씀을 나누면서, 특히 실천을 강조하는 책인 야고보서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야고보서 전체의 중심 주제는 말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서의 마지막 부분도 말에 대한 내용을 다루면서 마칩니다.

 

말이라는 것이 참 귀하면서도, 잘못 사용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무서운 것입니다. 말이 잘못되어 죽게 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문학작품 중 <로미오와 줄리엣>도 말이 잘못 전달되어 비극으로 끝납니다.

 

말은 우리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말을 조심하라는 것은, 단순히 속마음을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격 자체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인격 자체를 바꾸면 거기에서 좋은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말에 대해 세 가지 점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말로 하는 맹세에 대하여, 말로 하는 기도에 대하여, 그리고 말로 영혼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야고보는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1.   맹세하지 말라

 

첫째로, 오늘은 말에 있어서 먼저 맹세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12)

 

이 말씀은, 맹세를 절대로 하지 말라는 차원이라기보다는, 말할 때 복잡하게 말하지 말고 정직하게 또 간단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님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는 또한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 할 때에는 ''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5:33-37, )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생활 풍습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는 계약을 맺으려고 할 때 서명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서명 대신 맹세를 했습니다. 맹세가 효력을 가지려면 무엇에 대고 맹세를 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전에 대고 맹세한 것은 괜찮지만, 제단에 대고 맹세한 것은 유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맹세의 대상을 정하는 게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어디에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맹세의 대상이 될 만한 것들을 잘 아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악용해서 잘 모르는 서민들을 착취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맥락 가운데 말씀하신 것이고,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도 그것을 지적합니다. ‘그런 것은 그렇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정직하게 또 단순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비틀고 꼬고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하며 겉과 속이 다르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말은 단순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단순이라고 하면 바로 무지를 생각하는데, 무지가 아니라 단순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simple하게 살지 않으면 sinful하게 됩니다.

 

우리는 정직한 동시에 무례하지 않고, 솔직한 동시에 어리석지 않아야 합니다. 솔직하게 하라니까 있는 그대로 막 퍼봇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다 퍼붓고 나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게 정직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속에 느끼는 대로 다 퍼붓는 것이 정직한 것이 아니라, 한 번 말한 것은 믿을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아니면서 겉으로는 그렇다고 하고, 속으로는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는 것은, 소위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다르게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말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복잡하게 말하거나 돌려서 말하다 보면, 자기 스스로 자기 말이 안 맞게 됩니다. 말을 하기 힘드니까 돌려서 말하고 또 돌려서 하고 그러면, 여기서 한 말이 다르고 저기서 한 말이 다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도 잘 기억을 못하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실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든지 어디서든지, 맞는 것은 맞는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복잡할 이유도 없고, 실수할 경우도 줄어듭니다. 단순하게 정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맹세를 조심하라고 한 말씀처럼, 되도록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개 맹세를 할 경우는 별 생각 없이 함부로 말을 하게 될 때 발생합니다.

 

누군가가 꾸며낸 것이 분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한 명이 중병에 걸려서 간 이식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성도들은 사랑하는 그 성도를 위하여 자신의 간을 빼주겠노라고 서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워낙 많은 성도들이 간을 빼려고 하니까 누구의 간을 빼야 할지 결정이 어려웠습니다. 고민하던 당회는 결국 예배 시간에 기도하는 가운데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방법은 예배당에 선풍기를 많이 틀어놓고 목사님이 강대상에서 깃털을 날려 사뿐히 내려앉는 사람의 간을 빼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결정의 날이 왔습니다. 온 성도가 간절히 큰 소리로 기도하는 가운데 목사님께서 강단에서 깃털을 날렸습니다. “~!” 하고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날렸습니다. 그러자 그 깃털이 날아가다가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수석장로님에게 내려앉으려는 순간, 장로님은 자신이 꼭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기도로 ~~~~~~!!!”라고 하는 바람에 깃털이 다른 데로 갔습니다.

 

결국 깃털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권사님을 향했습니다. ‘나는 이 깃털에 내게 앉아서 내 간을 빼주고 싶어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하시던 권사님에게 깃털이 내려앉으려는 순간 권사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신을 써 주시지 않으면 죽겠다는 괴로운 표정으로 아부~~~~~!”라고 하나님을 찾다가 깃털이 날아갔습니다. 그 이후 그 깃털이 날아가서 지금까지 깃털이 그 교회 예배당을 떠다니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이지만, 함부로 이야기했다가 책임을 못 질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상황을 모면하거나 체면 때문에 마음에 없는 말을 하다가, 그것 때문에 결국 자기에게 해가 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라고 했다고 무조건 다 아니라고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것을 옳다, 틀린 것은 틀리다고 정직하게 또 단순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를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뭔가를 부탁받으면 억지로 맡아 놓고 끙끙 앓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거나,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할 수 없다고 정확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2.   믿음으로 기도하라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말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혀를 잘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기도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3)

 

1)  특히 고난당할 때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삶의 문제나 스트레스를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 것이 올 때 많은 사람들은 불평을 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다른 사람 탓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면서 원망을 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라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면, 고난이 올 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어려움이 생길 때 다 기도할 것 같지만 그렇게 안 하는 분들도 꽤 많습니다. 기도하지를 않고 자꾸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물론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전혀 찾지 않으면서 자기가 해보려고 하는 겁니다. 또 그냥 주저앉아서 자포자기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길 때는 기도할 때입니다. ‘지금이 네가 기도할 때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문제가 생긴 것은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기도할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십니다. 왜 자꾸 문제 해결 능력이 없는 인간을 찾아다닙니까?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먼저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만날지, 가서 뭘 할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지 지혜를 주십니다. 기도하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기도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내 머리 속에 없었던 생각이 탁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 가운데 주시는 지혜인 것입니다. 그렇게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도 주시고 문제 뒤에 숨은 하나님의 손길도 보여주시면서 소망을 주십니다.

 

기도하고 나면 참 신기한 게 있습니다. 마음을 무겁게 하고 짓누르는 일이 일어날 때가 있는데, 그러면 새벽에 나와 무거운 마음으로 무릎 꿇고 주님, 이것을 어떻게 하나요?’ 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떠날 시간쯤 되면 마음이 굉장히 가볍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것이 무슨 문제인가?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해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생기고, ‘분명히 잘될 것이다.’라는 소망이 생깁니다. 참 놀랍습니다.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바꿔주신 것입니다.

 

기도를 하니까 상황이 바뀐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상황은 똑같지만 그것을 보는 내 눈이 바뀌어서, 이전에 문제로 생각해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제는 문제가 아니니까 마음이 무거울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상황까지도 하나님이 바꿔주실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라!’

 

2)  또한 우리는 즐거울 때 찬송해야 합니다(13).

 

즐거움의 원인이 자기가 잘한 것이나 상황이 잘 풀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그분께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기도와도 통합니다.

 

고난 중에 있으면, 그때는 기도가 그래도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닥치면 마음이 간절해져서 새벽기도도 하고 작정기도도 하고 금식기도도 하고, 또 수요예배에 나와서 예배하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도 그렇게 간절히 찾지 않는다면 자신의 영적 상태에 문제가 생기고 영적으로 병에 걸렸다는 사인입니다. 문제가 생겨도 기도가 안 나온다면 자신의 영적 상태를 빨리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굉장히 병든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다가 문제가 해결되고 일이 잘 풀리면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문제가 생겼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잘 될 때에도 하는 겁니다. 평소에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인데, 기도를 멈추면 약해집니다. 하나님께 찬송하는 기도, 감사하는 기도를 멈추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3)  병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4-15)

 

여기 나오는 장로는 지금의 장로 직책보다 오히려 지금의 목사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내용에서 좀 이상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를 하면 병이 고쳐진다는 것을 너무 당연한 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가 아프면 당연히 함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도한다고 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도 누가 기도를 부탁했을 때 기도해도 안 나으면 어떡하지? 그럼 목사가 영적 능력이 없다고 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치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치유해주십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해도 치유가 잘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문에 의하면 그 원인은 하나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반드시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응답을 주십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36인치 바지를 입어야 하는데 나는 30인치 바지를 입을 수 있다.’라고 강력히 확신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기대를 갖고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언제, 어떤 방식으로 기도의 응답이 오는가 하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분명히 들으십니다. 또 우리가 기도하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When we work, we work; but when we pray, God works.”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 교회에서도 함께 기도했을 때 낫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 켄터베리 대주교가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니까 우연이 계속 일어난다.”

 

우리는 결과가 잘 나타나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간에, 아픈 분들을 위해 기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정말로 낫습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할 때 죄 사함도 얻습니다(15). 물론 모든 병의 원인이 죄 때문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에 대해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에 저러냐고 물었습니다. 자기의 죄인지, 그 부모의 죄인지 물었는데, 예수님은 이것이 그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병이 죄로 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큰 병에 걸리거나 암에 걸리거나 하면, ‘내가 죄를 지어서 벌 받는 것이다.’라고 반드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이 벌 받았다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병이 죄로 인해 생길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부터 치유받기 원한다면,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죄를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 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힘들어질 때 몸에 병이 나는 수가 많습니다. 밤에 잠도 잘 자지 못하고 밥맛도 없어지기 때문에 병이 걸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에게 병이 날 때에는 스스로 죄가 없는지 돌아보고 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프게 되었다고 해서 뭔가 죄가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정죄하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6)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말씀합니다(powerful and effective). 여기서 의인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떤 특정한 신앙의 인물들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다 의인입니다.

 

여기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며 모시고 있는 분들은 다 의인입니다. 의인이라고 해주셨습니다. 원래는 아니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의로워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시면 그대로 죄인이라고 보시는데,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을 보시고 너는 의인이다.’라고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특권이며 책임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야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17-18)

 

엘리야는 엄청난 일을 행한 선지자였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등, 엄청난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안 주기도, 또 주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어떤 특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대로 순종하여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 그것을 들으시고, 특히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세게 기도해서라거나 우리의 인격이나 믿음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순종하여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병이 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하는 자의 믿음을 통해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이 같이 합쳐질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목장에서 어떤 아이가 아프다면 다 같이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겁니다. 나을 수 있습니다. 혹시 자기 자신이 아프면,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그곳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음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3.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누릴 축복

 

이제 야고보는 편지를 마치면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누릴 축복에 대해 말합니다. 3:1에서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것은 파괴력이 있는데, 선생(가르치는 자)이 말을 잘못해서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극히 조심하라는 말이지, 정말로 절대 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선생 된 사람의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19-20)

 

미혹을 당해서 진리를 떠난 사람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진리 안으로 다시 데려올 수 있는 것이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사람의 특권입니다. 여기에서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라고 했는데, 문맥상으로 볼 때 이것은 죄에서 돌아선 사람의 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는데, 그 사람을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서 권면하여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안 믿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1세기 당시 교회생활을 같이 하다가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사람에게 찾아가서 회복되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용서를 경험한다고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6:1-2, )

 

이렇게 진리를 떠난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사람에게는 보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죄를 덮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잘 사용함으로 한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향한 도전]

 

여러분, 우리는 매일 어떤 말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 아름답고 귀한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로써 사람을 살려낼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수많은 말을 하며 살고 있는데, 그것이 살리는 말이든 죽이는 말이든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을 향해 돌아온다고 합니다. 내가 살리는 말을 하면 그것이 내게 다시 돌아와 나를 살립니다. 내가 죽이는 말을 하면 그것이 내게 다시 돌아와 나를 죽입니다.

 

그렇다면 매일 나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한 번 자신이 주로 어떤 말을 하며 사는지 체크해보십시오. 내가 하는 말은 주로 감사의 언어입니까? 아니면 불평, 불만, 원망, 비난의 언어입니까? 어쩌다 한두 번 실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 반복해서 사용하는 말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삶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주로 부정적인 언어습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망했다", "이젠 끝장이야", "짜증나", "아유, 죽겠네", "못 살겠어." 그런데 성공한 사람들의 언어습관을 보면 주로 아름다운 표현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괜찮아, 잘 될 거야", "아주 좋습니다."

 

이러한 감사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능력이나 재능이나 배경보다 성공에 있어서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고 연구결과가 다 나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고 격려해주며 살려주는 말을 많이 하면, 우리가 상대방도 살리지만 사실 나 자신을 살립니다. 내가 놀라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한 심리연구소의 두 연구원이 사람의 말과 행동이 씨앗의 발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두 개의 화분에 똑같은 흙과 비료를 섞어 넣은 다음, 23개씩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런 다음 두 화분을 같은 온실 속에 두어서 씨앗들이 발아되는 동안 똑같은 태양열을 받게 하고 실내온도도 똑같이 유지시켜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실험에서 한 가지 방법만은 다르게 적용했습니다. 즉 이들은 하루에 세 번씩 첫 번째 화분 주변을 돌면서 그 화분에 심겨져 있는 씨앗들을 향해 너는 아무리 싹을 틔우려 해도 열매를 못 맺을 거다. 너는 절대로 흙을 뚫고 나와서 싹을 틔울 수 없어. 혹시 싹이 난다해도 곧 말라 죽을 거야.”라는 말로 학대하고 저주를 했습니다. 동시에 다른 화분에게는 정반대로 했습니다. “그래, 내가 정성껏 심은 씨앗들은 다 잘 자란단다.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분명히 아름다운 식물로 자라나서 예쁜 꽃을 피우게 될 거야. 그 날이 기다려지는구나.”

 

드디어 3주간의 시간이 지나 이 두 화분의 사진이 나란히 유명한 주간 잡지인 타임(Time) 지에 실렸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말로 학대를 받았던 화분에는 몇 개의 작은 싹만 나왔을 뿐, 그 이상은 더 크게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격려의 말을 듣고 자란 화분에는 길게 자란 여러 개의 줄기들이 활짝 핀 꽃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의 말과 행동이 식물의 씨앗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들 식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말과 행동의 결과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그와 똑같은 실험을 2009년에 한국의 MBC 방송국에서도 한 적이 있습니다(목회편지 #383, 11/18/12). 2009년 한글날 특집으로 MBC에서 방영한 <말의 힘>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아나운서들의 도움을 받아서 실험을 했는데, 각각 두 개의 유리병을 준비해서 그 안에 갓 지은 흰 쌀밥을 넣고 한 쪽에는 "고맙습니다"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좋은 말만 해주었습니다. 다른 쪽에는 "짜증나!!!"라는 스티커를 붙였습니다.

 

그런 뒤 아나운서들에게 전달하여 그 스티커 내용과 같이, 한 쪽 병에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해, 너무 좋아, 너무 예쁘다"와 같은 긍정적인 말을 하라고 하고, 다른 병에는 "짜증나, 너무 미워, 너 싫어" 등과 같은 부정적인 말을 지속적으로 들려주도록 했습니다.

 

한 달 뒤에 그 유리병들을 확인해보았는데, 그 결과는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다섯 군데에 병들을 나누어주어 실험을 했는데, 다섯 군데 모두 똑같은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좋은 말을 들려준 유리병 안의 밥은 하얗고 구수한 냄새가 나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나쁜 말을 들려준 병 안에는 보기에도 흉측하고 시꺼멓게 썩어서 냄새가 아주 지독하게 나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는 말의 내용에 따라 각각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진행한 아나운서의 마지막 말이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이게 만일 밥풀이 아니고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혹은 직장 동료였다면 어땠을까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내 자녀에게 내가 화가 난다고 너는 왜 그 모양이니?” “너는 아주 싹이 노래.” 등 저주의 말만 한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면, 좀 부족해도 사랑한다.” “잘 될 거야.” “하나님이 지켜주셔.” “감사하자.”라고 좋은 말만 해준다면 또 아이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향해 저주와 불평과 원망의 말만 하는 사람과, 감사와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을 믿는 크리스천으로서 바른 삶이겠습니까?

 

이 야고보서를 통해 배우는 것은, 배우고 깨달은 말씀의 내용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듣고 나가서 원망하고 저주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특히 말을 조심하고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에서 성공하면 삶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체 기관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말씀을 듣는 귀입니까? 성경을 보는 눈입니까? 봉사하는 손입니까? 사람은 보통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귀나 눈을 통해서 합니다. 귀를 통해 듣거나 눈을 통해 읽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초기 랍비들은 성경을 읽는 것을 나타내는 데 몸의 다른 부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최고의 신체 부위는 귀나 눈이나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발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귀나 눈이 아닌 발을 통해 하나님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귀와 눈으로 배운 말씀을 발을 통해 실천하는 것이 말씀을 받아들인 삶이란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많이 깨닫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정작 내가 알고 있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이 머릿속에만 머물러선 안 되겠습니다. 지식적으로 알기만 하고 행동은 전혀 없는, 아니면 알긴 알지만 반대로 나아가는 삶이 되어선 곤란합니다. 우리는 정말 손과 발을 사용해서 주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진정한 복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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