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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25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45

사두개인들의 치명적인 오해

(마가복음 12 18~27)



[들어가는 ]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의 하나가 부활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는가? 믿거나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부활이 믿어진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우리가 매주 사도신경을 외우는데, 입으로만 줄줄 말하는 아니라 신앙의 고백입니다. 고백이 정말 나의 고백인가? 어떤 분들은 중간에 ‘이건 솔직히 믿어진다’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이 특히 그렇습니다.


부활하면 생각나는 일이 가지 있습니다. 오래 전에 신학교를 다닐 설교학 교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평소보다 열정적으로 유머 있게 강의를 하셨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광고할 있다고 하시면서지금 아내가 암에 걸렸으니 기도해 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부인이 암에 걸렸다면 휴강을 하고 빠지거나 병원에 있거나 침울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열정적으로 유머를 가지고 강의를 하신 다음, 공적인 일이 끝나고 나서 사적인 일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결국 1 반쯤 있다가 결국 부인이 돌아가셨습니다. 학교장으로 치를 가서 보니까, 사랑하는 아내를 이상 땅에서 보지 못한다는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소가 있었고 웃음이 있었고 심지어 유머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부활의 소망 가운데 나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이분들은 부활을 정말 믿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그것이 굉장히 마음에 닿았습니다. 말로는, 머리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울고 무너지고 그러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아니라 정말 부활을 믿기 때문에, 슬프지만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저력이 있다는 것을 실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대에 교회를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부활 신앙이 죽어 있는 비극적인 모습들을 보곤 합니다. 교회는 왔다 갔다 하며 예배에는 참석하지만, 부활 신앙은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종종 이런 분들도 있습니다. “내가 믿겠다. 그러니 부활 이야기만 하지 말라. 그건 해결이 된다. 부활 이야기만 빼고 달라. 나머지는 믿겠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지만, 우리 자신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 부활을 믿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런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   부활 신앙이 없는 자들의 교활한 공격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 그룹은 대표적으로 개가 있었습니다. 크게 바리새파가 있었고 그들과 양대산맥을 이루던 사두개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과격했던 에세네파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유명했습니다. 사두개파가 수적으로는 가장 소수였습니다. 사두개라는 단어가 영어로는 Sadducees인데 어원이 분명치 않습니다.


제사장 계급 출신이었던 이들은 유대 사회의 상류층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종교의식이나 제사도 하고, 토라,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로마의 권력에 붙어서 상당한 사회적 특권과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이면서, 그랬기 때문에 부활 신앙을 포기했던 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부활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파였는데, 부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을 하고 있으니까, 당시 영적 타락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그것만 봐도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8)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부활 신앙을 포기한 그들은 자신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괴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들은 바리새파와 앙숙이었지만, 예수를 책잡아 죽이려 하는 데에는 이들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본문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와서 예수의 꼬리를 잡는 데에 실패한 것을 알고, 이번에는 자기들이 나선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동생이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그들이 살아날 때에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19-23)


이것은 그냥 생각만 해봐도 이럴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당시 아무리 아이가 많아도 집에 7형제가 있다는 것도 그리 흔치 않습니다. 일곱 명이 차례로 명씩 죽을 확률도 거의 없습니다. 둘째나 셋째가 먼저 죽을 수도 있는 건데 어떻게 나이 순서대로 명씩 죽습니까? 게다가 일곱 명이 죽었다는 것도 확률적으로 있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들고 와서 예수님을 책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절에 “모세가 우리에게 주기를”이라고 것은 신명기 25 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장남이 죽은 후에는 동생이 형수를 데리고 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번째는 장자권을 계승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장자권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번째는,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의 여자들이 과부가 되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여자 성도 분들이 많은데, 죄송한 말씀이지만 옛날에는 여자가 숫자에도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에도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며 여자는 세지도 않았습니다. 그때가 예수님 때인데, 고대사회인 BC 1500년경의 모세 시대 때에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회에서 여자의 남편이 죽었다는 것은 사회에 아무 지위도 없고 길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들이 없으면 더더욱 길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동생들이 형의 아내를 돌보게 하는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였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일곱 명의 형제가 죽고 여자가 일곱 명과 결혼했다면, 부활 후에 누구의 부인이 되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정말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부활 문제를 가지고 와서 질문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진짜로 궁금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잡겠다는 마음으로 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질문을 통해 부활 신앙을 부정하는 그들에게 부활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시고, 우리가 부활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도 설명해주십니다.


그런데 시대에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 중에도 ‘사두개인들’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드나들면서도 부활 신앙은 없는, 그러면서도 사두개인들처럼 여러 가지 지적인 질문들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부활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주 정확히 수는 없어도 어떤 특징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에 오면 깊이 잠들어 버립니다. 교회에 와서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은 사람에게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부활 이야기를 해도 감동이 없습니다. 계속 죽어 있을 뿐입니다.

 


2.   사두개인들이 치명적인 오해를 가지 원인


그렇다면 사람들이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두개인들이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지금도 똑같은데, 예수님이 이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4)


예수님은 여기서 가지 원인 때문에 부활 신앙을 가졌다고 하십니다. 첫째는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혹시 ‘나는 부활이 믿어진다. 부활을 믿겠다.’라고 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유는 성경을 거의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고, 공부하지도 않고, 공부도 전혀 들으면서 ‘나는 부활을 믿겠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불공평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못하겠다고 하면, 그것을 알아보고, 진짜인지 아닌지 정말 연구를 해보고, 그런 후에 아무리 연구해 봐도 아니라고 해야지, 전혀 해보지도 않고 읽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적으로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부활 신앙을 가지는 겁니다. 그런데 당시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다섯 권은 믿으며 읽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모세오경만 인정하고 구약성경의 다른 책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오경에 보면 직접적으로 부활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부활’이라는 단어가 거기에 어디 있습니까?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모세오경(율법)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름대로 논리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26-27)


예수님이 24절에서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여 오해했다”라고 하신 말씀은 “왜 이렇게 무식하냐? 너희가 무식하니까 모르는 것이지.”라고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여기 “모세의 중”이라고 했는데 모세오경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이라는 것은 당시 장절이 없어서 그런 식으로 표시를 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장을 말합니다. 거기 보면 가시떨기에 불이 붙었는데 사그러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모세가 다가가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곳은 거룩한 곳이니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3:6).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26)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읽었습니다. 하지만 “읽었는데 이렇게 무식하냐?”라고 꾸짖으시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오래 전에 살다 죽은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략 BC 2000 경에 활동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2 전에 살았던 사람이 아브라함인데, 그러니까 오래 전에 이미 죽었습니다. 이삭과 야곱도 그때 살았던 고대의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죽었는데 어떻게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의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그들이 죽은 자가 아니라 ,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아닙니까?


출애굽기의 말씀을 하실 당시는 아브라함보다 5백여 뒤의 이야기인데, 5 전에 이미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500년이 지나도 살아 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전제로 그들은 살아 있고, 그래서 그들의 하나님은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는데, 그들이 지금은 없지.’라고 하시는 아니고, ‘그들은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75세에 부르셔서 100세에 아들을 주셨는데, 25 동안 아들을 주겠다고 하셨지만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의 후손을 바닷가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없을 정도로 많이 주겠다고 하셨지만 아직 아들이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 4:17)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 자녀가 없는데 주시는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 4:18-22)


말씀이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실 89세인 사라가 어떻게 아기를 낳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아기를 낳았고, 아브라함도 10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부활 사건과도 같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예수 우리주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4:24)


도저히 아기를 낳을 없는 그런 육체적 상태에서 아기를 낳는다고 믿었던 신앙은 부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신 것을 믿는 것과 같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기적의 아들인 이삭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얼마나 예쁘겠습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혹시 이스마엘을 바칠까봐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잡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정확히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바닷가의 모래알이나 하늘의 같이 많이 주겠다고 하시고, 후손들은 이삭을 통하여 그렇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럼 이삭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라고 하신 곳을 향해 떠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 11:18-19)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음의 제단에 바칠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이삭을 통해서 자손을 이어가겠다고 하셨는데 지금 이삭을 죽여서 바치라고 하시는 것은 뭔가? 그럼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다시 살리실 , 부활시키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이 구약에, 그것도 자기들이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서 분명히 발견되는데 어떻게 구약에 부활이 없다고 사두개인들이 말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긴 읽으면서도, 믿으면서도 성경에 나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너희가 성경을 모른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펼치고 읽고 집에서도 읽습니다. 특히 요즘 <말씀의 > 공부하시는 분들은 하루에 읽어야 때도 있고 아주 힘듭니다. 읽어야 수료증을 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것은, 읽으실 알았는데 다들 읽고 계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드라마 보고 하고 그러면 충분히 성경을 읽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먼저 읽으면 되는데, 다른 것을 하고 나중에 읽겠다고 하니까 읽지 못한 겁니다.


눈이 좋으면 듣는 것도 있습니다. 유튜브(YouTube) 가보시면 새번역도 있고 개역개정도 있고 있습니다. 읽는 사람은 들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요즘은 핑계를 없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우선권을 둬서 그렇지, 얼마든지 읽고 들을 있습니다. 읽지 않으니까 제대로 모르고, 그러면서도 ‘나는 그런 것을 믿는다.’라고 하면 말이 된다는 것을 오늘 예수님이 지적하십니다.

 


2)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에


번째로 이들이 부활 신앙을 가졌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겁니다. 부활을 믿는가 하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당연히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부활의 능력을 믿겠습니까?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창세기 1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과 사도신경의 구절을 믿을 있다면, 믿을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하시겠습니까? 논리적으로 따져 보아도, 천지 창조를 믿으신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을 없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우찌무라 간조라는 분이 있습니다. 무교회주의자이기는 했지만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에게 신앙의 회의를 품은 대학생 하나가 찾아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성경을 믿고 싶은데 성경 안에 너무 말이 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시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 먹고... 이건 말이 됩니다. 그런 것들을 믿으면 성경을 믿을 없는 겁니까? 신앙을 가질 없는 겁니까?”


질문에 대해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자네 성경에서 기적들을 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겉표지와 마지막 표지만 남네. 무슨 말인가 하면, 기적을 믿지 않으면 성경을 믿을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창세기 1 1절을 믿을 없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믿을 없고, 부활도 믿을 없습니다.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시고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역사가 창조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이시면 흙에 생명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드는 것을 못하시겠습니까? 죽은 사람을 일으키시겠습니까? 우주만물을 만드신 분이신데.


여러분, 내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나를 부활하게 하실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부활 후의 모습


그렇다면 부활의 몸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어떤 몸을 가지고 부활을 하게 되는 겁니까?


사람이 죽은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5)


땅에서 죽어 천국에 갔다는 것을 부활했다고 수도 있고, 실제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우리의 몸이 완전히 부활하는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나 고린도전서에 보면 그런 모습들이 나옵니다. 쉽게 간단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새로운 몸으로 들어간다고 있습니다.


부활할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하십니다.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 같이 된다는 겁니다. ‘귀신론’을 들어보셨습니까? 이단사상인데, 믿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럼 믿는 자가 죽으면 천사가 되는가? 그게 아닙니다. 천사처럼 된다고 했지 천사가 된다고 아닙니다. 천사는 천사이고 인간은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성경 전체를 요약한 뭔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를 단어로 요약하면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사는가, 이웃과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사는가를 설명해놓은 책이 성경입니다.


결국 우리가 땅을 떠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 천국의 특징은 결국 사랑입니다. 천국에서 다투고 싸우고 미워하는 어디 있겠습니까? 눈물도 고통도 미움도 없는 곳입니다. 소위 ‘사랑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방언과 예언도 끝나지만 사랑은 영원하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영원하다고 , 남녀간의 사랑이나 모든 사랑을 뛰어넘는 사랑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가 완벽한 사랑을 나누는 곳이 됩니다. 땅에서도 그런 사랑을 나누며 천국의 삶을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면 정말 완벽한 사랑을 나누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한다는 것은 사람이 추구하는 인간의 존재의 완전한 상태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몸을 얻게 된다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해줍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느 날인가 몸이 완벽해져서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다음에 문이 잠겨 있었는데 그냥 들어오셨습니다. 어떻게 들어오셨는지 설명이 됩니다. 몸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목소리도 같고, 손에 못으로 찔린 자국도 있고 옆구리에 창으로 찔린 자국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분명한데, 동시에 세상의 법칙을 초월하는 새로운 몸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부활할 , 분명히 나는 나인데 지금의 몸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믿을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다른 사람이 자꾸 괴롭히고 이상한 말을 해도, 불만스럽고 원망스럽고 화가 날만한 상황이 와도, ‘나는 부활할 사람이니까 여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초월할 있는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공격을 많이 당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뛰어넘으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 신앙이 없으면 누가 조금만 뭐라고 해도 반응하게 됩니다. 순간적으로 부활 신앙을 잊어버릴 수가 있는데, 누가 나를 괴롭히면 ‘나는 부활할 사람이다.’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이길 있습니다.


지난 목회자 컨퍼런스에 갔을 , 제가 저번에 받았던 릴리(Lilly) 재단의 목회자 안식년 지원금을 위해 제가 도와드려서 뽑히신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나 “축하합니다”.라고 했더니 제가 도와줘서 되었다고 너무 고마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저번 컨퍼런스 뵈었을 때보다 완전히 바뀌셨습니다. 표정이 세상을 달관한 사람처럼 너무 여유로운 겁니다. “목사님, 누가 뭐라고 해도 전혀 신경을 쓰시겠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요즘은 누가 뭐라고 하고 이상한 일이 생겨도 ‘나는 이제 안식년 떠난다.’라는 생각만 하면 용서가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사모님이 이것으로 아주 교훈을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안식년을 잠시 가는 것만 생각해도 이렇게 여유가 생기고 누가 뭐라고 해도 넘기는데, 나는 천국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여기서 싸우고 그럴 일이 뭐가 있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주 감동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면, 땅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리는 ‘그럴 있지’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있습니다.

 


[나가는 ]


책에서 읽은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미국 교회의 어린이 주일학교에 필립이라는 정서 장애아가 있었습니다. 같이 주일학교를 다니는데, 부활주일이 되었습니다. 필립이 다른 여러 면에서는 떨어졌지만 성경 말씀만 들려주면 눈동자가 반짝였습니다.

 

부활절 아침이 되어 주일학교 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플라스틱으로 된 둥근 계란껍질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것은 열고 닫을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그것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면서 “15분의 시간을 줄 테니까, 밖에 나가서 살아 있는 생명, 부활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을 하나씩 담아서 가지고 와라. 그 후에 발표하겠다.” 그렇게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아이들이 나갔다가 15분 후에 돌아왔고, 선생님은 한 명씩 발표를 시켰습니다. 첫 번째 아이가 계란껍질을 여니까 거기에 꽃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 생명의 꽃이 담겨 있구나.” 하고 다들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두 번째 아이의 것을 여니까 나비 한 마리가 나오며 날아갔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인 나비를 담아 왔구나.” 하고 또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세 번째 아이의 것에는 파릇파릇한 잎사귀가 들어 있었습니다. 다들 또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필립이 나왔는데, 필립의 계란껍질을 여니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필립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하고 못 가져왔다고 하며 놀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필립은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잖아요.” 그 말을 듣고 모두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 빈 무덤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더 잘 설명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살아 계신 주님, 부활의 주님, 바로 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나에게 벌어지든지 상관없이, 이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 자신의 부활을 소망하며 매일매일 힘차게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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