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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6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27

박해자 사울을 찾아오신 예수님

(사도행전 91~9)

 

[들어가는 말: 주님을 만나는 두 가지 유형]

 

오래 전 다른 곳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 전도폭발 임상훈련 지도자 과정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될 때 대개 두 가지 유형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디모데 형이고 어떤 사람은 바울 형이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지만, 저처럼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소위 모태신앙이거나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부모님의 신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믿거나 어릴 때부터 믿은 모태신앙인이라도 한참 떠나 있다가 주님을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디모데 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데모데 형입니다.

 

반면, 바울 형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처럼 성인이 되어 어떤 계기가 있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케이스를 말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체험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심이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 중요성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그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번은 오늘 본문에서(9), 두 번은 바울의 말을 통해(22, 26) 나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사도행전 과목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교수님이 마지막 과제로서 아무 것이나 주제를 잡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연구하여 써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뭘 쓸까 한참 고민하다가 바로 이것을 썼습니다. 사울의 회심이 9, 22, 26장에 나오는데 내용이 약간씩 다릅니다. 그것이 왜 그런지에 대해 제가 심혈을 기울여 페이퍼를 써서 내면서 ‘A를 받겠지했는데 교수님이 A를 안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제를 통해 아주 많은 것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의 회심 사건을 보면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사울의 회심 사건을 보여주는 것은, 바울 형이 디모데 형보다 더 낫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런 극적인 케이스는 아주 예외적이니까 괜찮다고 하는 것입니까?

 

저 자신은 디모데 형으로 예수님을 만났지만 가끔 바울 형으로 주님을 믿게 된 분들을 볼 때 부러운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형인 분들은 디모데 형을 보면서 부럽다고 말합니다. 몇 대에 걸쳐 믿는 분들을 보면 부럽다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믿음의 3대이지만, 극적으로 아주 뜨겁게 주님을 만난 바울 형인 분들을 보면 부럽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바울 형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성인이 되어 늦게 믿었을지 몰라도, 자신의 아이들은 다 디모데 형이 되는 게 아닙니까? 하지만 디모데 형은 자기도 디모데, 아들딸도 디모데이니 새로울 게 없습니다. 물론 신앙의 뿌리를 가진 집안이라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 형이 나은가, 아니면 디모데 형이 나은가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그분을 믿고 영접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남편이 교회를 안 나오고 안 믿어서 교회에 나오라고 하거나 믿으시라고 하면 내 와이프가 잘 믿으니까 와이프가 천국 갈 때 그 치맛자락 붙잡고 나도 가면 됩니다.”라고 하는데, 구원은 일대일 관계이지 결코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토록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친히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어떻게 살았든지, 디모데 형이든지 바울 형이든지, 어릴 때 믿었든지 나중에 믿었든지 상관없이, 사실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 그리고 나를 변화시키시고 구원해주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울의 회심 사건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토록 교회를 잔멸하던 사울이 행한 모든 일을 참아주시고, 친히 찾아와주시고, 그를 변화시키시고, 구원해주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1.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이전의 사울의 모습

 

사도 바울은 정말 위대한 사도인데,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9장과 10장에 잠시 나온 후에 그 다음부터는 바울 중심으로 사도행전이 진행됩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1-2)

 

이전에 사울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여기도 나오지만, 성경은 그것을 몇 가지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시울은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주의의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나중에 자신이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그런 것이 나옵니다. 바울이 쓴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다른 사람들이 하도 자기 잘났다고 으스대니까 바울은 내 앞에서 그런 자기자랑 좀 그만 해라. 나야말로 왕년에 이런 사람이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습니다. 또한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고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집안 출신이었다는 겁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다소라는 곳인데, 다소에서 자랐다는 것은 헬라의 문화와 철학에 익숙했고 헬라어를 모국어로 하는 환경에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 전통과 율법에 정통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고 자신을 이야기합니다. , 히브리 문화 안에서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2, 3세들이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는데, 그런 우리 자녀가 한국에 있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 문화를 더 잘 알고 한국말을 더 잘하는 것과 같은 식입니다.

 

또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로마의 모든 정치와 법체계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당대 유대교의 석학으로 존경받았고 유대교 학파의 쌍벽을 이루던 힐렐 학파의 우두머리인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지성인의 자격을 완벽히 갖춘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다수의 엘리트 지성인들에게는 행동이 약한 게 사실입니다. 머리는 뛰어나고 판단력도 빠르며 비판 능력도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 있게 행동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지성인이 가진 약점입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목숨을 걸 줄 아는 행동력이 있는 지성인이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자기를 불러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라고 하여 간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사업하는 분들이 사울 같은 사람을 직원으로 있으면 정말 좋습니다. 사업하는 분들이 누구를 쓰면 돈을 지불하는 것의 반 정도 밖에 일을 안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돈을 더 주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울은 바리새파이고, 바리새파와 앙숙을 이루던 사두개파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앙숙인 사두개파 대제사장에게 가서 바리새파인 사울이 자기에게 체포영장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떼어다가 잡으러 갑니다. 왜냐하면 박해 때문에 여러 곳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다메섹(다마스쿠스)까지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까지 200마일이 넘는 먼 길을 단숨에 달려갑니다


얼마나 열심이 있습니까? 행동하는 지성인, 손해를 볼 줄 아는 사람,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굶는 한이 있어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자기의 삶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는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습니다. ‘새가족반을 할 때 보면 우리가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내가 왜 죄인인가?’ 하고 거부감을 갖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저는 정말 죄인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분들은 마음이 많이 열렸기 때문에 인도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삶이 굉장히 잘못되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은 전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 소크라테스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니까 자기 자신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인데 요즘 말로는 아재개그라고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하고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것을 보고서,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에게 국어 선생이라면 주제를 알라했을 것입니다. 정말 주제 파악이 중요합니다. 수학 선생이면 분수를 알라했을 겁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지리 선생 같으면 위치를 알라했을 것입니다. 삶의 위치와 자리를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에 착각 속에서 아주 자신만만하게 살고 있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요즘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바르게 살고 있다.” 그런데 그 가족들에게 물어보면 별로 바르지가 않습니다. 자기는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울(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핍박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8장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8:1)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은 것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83절을 보아도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잔멸했다고 할 정도로 요즘의 테러리스트와 같이 막 때리고 폭력을 사용하면서 잡아다 감옥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삶으로 전환되는 사건이 세 번 나옵니다(9, 22, 26). 그것을 함께 보면 이 사건의 내용을 조금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2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의 회심 경험을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26:9)

 

그러니까 예수를 대적하여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하나님을 믿어야지 왜 예수를 믿는가? 내가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라고 합니다. 사울도 똑같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래서 사울은 신앙의 이름으로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26:11)

 

외국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정도로 그는 종교적으로 아주 열심분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정의감이나 하나님을 향한다고 하는 열정이 사실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100% 옳다!’라고 하며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이 가지고 있었던 커다란 착각을 바꿔주시기 위해서는 보통 사건으로는 안 됩니다. 엄청난 충격이 필요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다메섹 사건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3-4)

 

사실 모든 사람이 다메섹 사건처럼 불이 번쩍거리고 어느 날 갑자기 삶이 확 바뀌는 극적인 체험이 있어야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디모데 형으로 자연스럽게 되어도 괜찮습니다.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점차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며 신뢰하는 믿음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무슨 충격적인 사건이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깨닫고 주님을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크게 착각하고 있는 사람, 자신은 100% 옳고 저 사람들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큰 충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위해 다메섹 사건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 사건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지금 박해하고 반대하고 있는 예수가 사실은 자기의 생명의 주님이시며,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린 메시야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 그리고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삶으로 돌아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극적 경험을 가진 분들이 혹시 우리 가운데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믿지 않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서 주님을 믿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볼 때는 어릴 때부터 몇 십 년을 교회에 다닌 분들이 너무 천천히 가니까 왜 이런 경험이 없느냐?’라고 물으면서 그런 경험을 해야만 진짜 믿는 것이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감사한 일이지, 남에게 요구할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해야 되는 건 아닙니다. 경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 목적이 중요합니다. ,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며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극적인 경험을 허락하시는 것이고, 그런 극적인 것이 필요없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믿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는 이 커다란 충격이 없이는 예수가 구주이시라는 사실을 알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자신만만한 자기과시의 병에 걸려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자아도취에 빠져 있어서 사울과 같은 이런 극적인 전환점이 없이는 주님 앞에 돌아오기가 참 어려운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성경 여러 군데에서 말씀하지만 특히 잠언 14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예수님도 넓은 문이 있는데 그리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넓은 문은 넓고 좋아 보이지만 결국은 사망으로 가는 길이고, 좁은 문은 좁고 힘들어 보이지만 생명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에 자기는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잘못된 길이고, 자기 파멸의 길이고, 영원한 멸망의 길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신뢰하겠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신뢰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많은 분들의 경우를 보면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에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옮기기를 두려워합니다. 그 동안 자기를 신뢰하며 살았기 떄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자신을 신뢰할 만큼 완벽한 사람입니까? 완벽한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굉장히 완벽해 보이는 것 같은데, 매스컴이나 주변에 보면 아주 정확하고 똑똑하고 완벽한 것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배우자에게 물어보면 너무 많은 실수를 하는 사람입니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한 사람, 아주 부족한 사람을 신뢰하며 살아가겠다고 하니 그 삶이 얼마나 흔들리겠습니까? 완벽하신 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인 수를 더하려고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고 살다가는 정말 멸망의 길로 가기 때문에 정말 완벽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의 길로 가자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옳지 못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자기가 바꿔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주 잘못 가고 있다. 이단들이다. 그래서 내가 저들을 바꿔주겠다.” 하며 박해의 자리까지 가는, 아주 격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확신과는 완전히 반대로, 정말 잘못된 길을 가고 있던 사람입니다.

 

 

2.   다메섹로 가던 길에서의 극적인 만남

 

그러한 삶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사울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사실은 그가 만난 게 아니라, 예수님이 그를 찾아와주신 것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와 만나는 이 장면은 사실 사울 자신이 그 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일과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예수 믿는 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확신입니다. 자아가 강할수록 자신의 고집을 꺾고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가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예수님께 내 마음을 다 드렸다. 나는 주님을 확실히 믿고 있고, 나는 크리스천이고,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며 주님의 제자이다.’라는 확신이 아직 없으시다면, 그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뭔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혹시 그렇게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적은 주변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대로 행동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외부 원인이 아닙니다. 사실은 자기 자신입니다. 내부 원인입니다. 그것이 사울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비춰주는 거울 앞에 서기 전까지는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인간은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속일 수도 있습니다. 남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한 사람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기 온 마음과 온 존재로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마다 내가 죄인이구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나는 정말 바르게 정의롭게 착하게 산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춰보니까 너무 썩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어디 가서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썩어 있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울은 자신이 박해했던 그 예수님을 만나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대로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훗날 바울은 이 날 발견했던 자신의 모습을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딤전 1:13-15, )

 

이 부분은 개역성경이 더 낫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울은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나는 율법에 비추어서 흠이 없다. 이만하면 나는 예수 믿는 너희들보다 훨씬 낫다.” 그렇게 자부하며 살던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앞에 서는 순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좋은 모습만을 보았으니까 그렇지, 거룩한 하나님의 빛 앞에 자신의 전체 모습이 노출되고 보니까 , 나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솔직히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당당했던 자신의 정의감이 만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신의 정의로운 행동이 자기를 세워 주고 유익하게 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를 파멸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기는 인간적인 그 모든 좋은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렸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좋았던 것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신뢰했던 그의 삶이 그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이 날 그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사울에게 하신 재미있는 말씀이 추가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이 오늘 본문(9)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26:14)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는 말이 여기 9장에는 없는데, 26장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으로는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주 큰 가시들이 돋친 막대기가 있는데 그것을 맨발로 차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저 가시를 꺾고야 말 거야.’ 하고 발로 차면 가시가 꺾이는 게 아니고 자기 발이 완전히 망가집니다. 그것은 자기를 해치는 것입니다. 자기를 다치게 만드는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말씀에 무슨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까? “사울아, 너는 정의감에 입각해서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너는 이 일이 옳다고 생각하여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왔지만, 사실은 네 그런 생각이 너를 파괴했고, 너의 주장이 너를 망쳤고, 너의 고집과 철학이 너를 다치게 만들고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날 주님께서 하신 지적이었고 도전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비로소 내가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것이 허상이었구나. 내가 타고 있었던 배가 난파선에 불과했었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는 내 신념으로, 내 철학으로, 내 종교의 이름으로 인생을 살았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오히려 잘못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순간 땅에 엎드러지며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5)

 

사울이 땅에 엎드러지고 나서 가장 먼저 주여라고 합니다. 이 존재가 뭔가 엄청난 존재라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느낀 것입니다. “주여!”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그 순간, 나를 인도하고 다스리고 새롭게 해주실 새로운 삶의 주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짧은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인 동시에 자신이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자아가 깨어진다’, ‘예수님께 항복하고 나온다는 말은 자기 포기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오해해서 믿기를 주저합니다. ‘생명의 삶공부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교회에 대해 배우고, 배울 것을 다 배우고 나서 이제 다 배우셨으니까 예수님을 믿기만 하시면 됩니다.”라고 해도 아직 나는 준비가 안 됐습니다.”라고 주저합니다. 이제 내가 알기는 알고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며 선을 넘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조롱하고 비난하던 그 예수쟁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내가 뭔가 완전한 모습이 되어서 그 다음에 믿어야지, 지금 이 모습에서 믿으면 내가 안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예수 믿으면 매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 자유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옭아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착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전에 모르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그것은 자기가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구시냐고 하는 바울의 질문에 대해 답으로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하십니다. 사실 사울은 예수님을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이미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어떻게 박해를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십니다. 이미 주님은 사울을 사울아 사울아하고 두 번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친근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교회를 박해했는데, 예수님은 나를 박해한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교회를 핍박하고 욕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핍박하고 욕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죄가 됩니다. 사울이 이것을 깨닫고 나중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예수 믿는 사람을 조롱하고 비난한 것이 곧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난한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혹시 예수를 안 믿었을 때 그렇게 하셨다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것을 통해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른 믿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주님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님을 욕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다른 지체들을 미워하거나 욕을 하거나 험담을 하십니까? 교회를 욕하고 비난하십니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을 욕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르게 가야 합니다. 바르게 가지 않을 때는 당연히 함께 사랑으로 지적하고 함께 사랑으로 고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 뒤에서 험담이나 하며 욕을 한다면 그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른 예수 믿는 지체들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욕하고 비난하는 엄청난 죄가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서로를 향해 감사하고 칭찬하고 격려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께 하는 것이 됩니다.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3.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사명을 받은 사울

 

이제 예수님은 사울에게 새로운 사명에 대해 암시를 해주십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6-7)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진정한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진정한 삶의 궤도를 발견하게 되는 엄청난 순간, 그 순간에 바울 사도에게는 한 가지의 경험이 더 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라는 경험입니다. 그 동안 남들을 너무 고통스럽게 해서 벌을 받은 게 아니라, 그 정도로 잘못 가고 있었기 때문에 생생한 경험을 통해서 바뀔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쉽게 믿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주 어렵게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믿은 사람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중간에 돌이킨 분들은 그 동안의 삶의 경험 때문에 큰 충격이 요구될 때도 있고 때때로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사울은 정말 자아가 깨어지고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부르고 만나는 그 순간 눈이 안 보이게 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8-9)

 

영원히 눈이 안 보인 게 아니고 며칠 간 그랬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합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선물로 주실 때는 언제나 두 가지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첫째는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평범한 일상적 삶 속에서 우리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적당히 살아갑니다. 그러다 고통이 오면 비로소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고통의 둘째 목적은 사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고 싶은데 그가 고집을 피우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종종 그에게 고통이라는 선물을 주셔서 변화를 시켜주십니다.

 

우리가 사울에게 배워야 할 놀라운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의 의미를 빨리 알아차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에 대해 왜 그런지 불평하기보다는, 그것이 주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 저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제가 이제 순종하겠습니다.’

 

사실 이 순간이 사울에게 얼마나 엄청난 충격이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온 것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자기가 믿던 것이 가짜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적인 민감성, 고통의 의미를 빨리 알아차리는 이 신앙적인 민감성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6장에서 이 다메섹 경험을 말한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6:19)

 

환상을 통해서, 소리를 통해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자신에게 전달되었을 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것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명을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아무리 이런 엄청난 사건을 당해도 그 순간 자기가 결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다 자기가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렇게 엄청난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나는 안 한다.’라고 하면 끝인 겁니다. ‘내가 눈을 뜨기만 해봐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더 잡아 죽이겠다.’라고 결정을 할 수도 있는데, 하늘에서 보여주신 뜻을 보며 하늘의 뜻이 그게 아니었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가 이런 결정을 내렸겠습니까? 그가 스데반을 통해 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죽어가면서까지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 사울 자신을 포함하여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습니까? 그게 분해서 더욱 죽이는 데 가담을 한 것입니다.

 

그 사건이 항상 자기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이때 예수님이 정말 나타나시니까 , 이게 진짜였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분이시구나!’ 하고 확실히 깨닫고 결단한 것입니다. ‘이제는 거스르지 않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결단했습니다.

 

사도행전 9, 22, 26장을 비교해 보면 다메섹의 체험이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는 사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가고 있었습니다. 빛이 보이고 소리가 들렸을 때, 어떤 사람은 빛만 보았고 어떤 사람은 소리만 들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현장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각자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반응도 달랐을 것입니다.

 

이때 사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 체험과 이 고통을 이제는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방향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를 위한 계시로, 자기를 위한 고통으로 생각했고, 자기를 위해서 주시는 메시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결단하며 나아갔습니다.

 

 

[나가는 말]

 

오래 전 미국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우울증으로 말미암아 아주 심각한 고통을 당했고, 어느 날 이 젊은이가 드디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면도칼을 꺼내어 그것으로 자기의 동맥을 끊겠다는 결심으로 세면대 앞에 섰는데, 갑자기 그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는 갑자기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하나님, 한 번만 삶의 기회를 주시면 제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 가운데 잔잔한 평화가 임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드와이트 무디(D. L. Moody)의 제자로서 시카고를 비롯해서 전 세계에 복음의 위대한 영향력과 충격을 주었던 토레이(R. A. Torrey)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토레이 목사가 앓고 있었던 정신적인 우울증은 그로 하여금 한 세기의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도록 바꾸어준 아름다운 통로가 되었습니다.

 

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한 젊은이가 여행 도중에 어떤 모텔을 찾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보니 옆방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상황을 물어 보니까 옆방에 있던 젊은이 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는 옆방에서 죽은 사람이 바로 자기 대학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인생의 전부란 말인가?’

 

그 날부터 깊이 고민을 하다가 나는 이제 허무한 일을 위해 살지 않고,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살겠다.’ 하고 오히려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그 당시 버마를 향해 떠나갑니다. 이것이 버마에 선교의 문을 열었던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의 간증입니다. 친구의 죽음이 일깨워 준 인생의 허무를 통해서 그는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믿음의 길로 밀어 넣으시거나 새로운 사명의 길로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우리가 고통을 당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통이 되겠습니까? 고통이 나를 새롭고 복된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고통을 감사함으로 받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교회를 그토록 박해하던 사울을 찾아오시고, 그에게 새롭고 올바른 인생의 길을 보여주시며 그리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리로 가겠다고 결단을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반역을 하고 주님 뜻대로 살지 않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시며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을 하며 살도록 끊임없이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때로는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은 매순간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며 지금도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 주님 앞에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이제 어떻게 매일매일 살아가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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