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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OFRFI-CtKLY?t=3598 

 

 

2020628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6

세상도 인정한 믿음의 사람

(창세기 2122~34)

 

[들어가는 말]

 

제가 미국으로 이민을 올 때 즈음에 굉장히 인기를 끌었던 영화가 있는데 그 제목이 <Aliens>(외계인들)였습니다. 무시무시한 공포 공상과학영화였습니다. 제가 제목은 봤지만 그 영화를 안 봤습니다. 그런 종류를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민을 와서 몇 주 후 집으로 영주권 카드가 날아 왔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거기에는 “Resident Alien Card”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영주권을 흔히 그린카드(Green Card)’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별명이고 공식 이름은 “Resident Alien Card”입니다. 그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때 저는 내 진짜 정체가 이거였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서 외계인이었던 것입니다. 이왕이면 다른 말도 있을 텐데 왜 하필 그 단어를 썼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갑니다. 그래도 그 카드를 보면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 미국 땅에서 어떤 국적으로 살고 있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다 나그네이고 이방인이고 외국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곳이 우리의 진짜 고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20세 때 이민을 왔는데, 이민 온 직후에는 당연히 한국이 제 고향이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한국을 그리워하고 친구들과 편지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한국 방문이 자유롭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러다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가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이민 온지 6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한국으로 가서 1년이나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자주 하던 말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20세로 한참 재미있을 때 이민을 왔으니까 내 청춘을 돌리도(?)”라고 했는데 , 드디어 하나님이 내 청춘을 돌려주시는구나!’ 하며 가서 1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보고 나서 절실히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도 하고 왔지만, 가서 느낀 것은 한국이 내 고향이 아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자마자 9월에 명절인 추석이 되었는데 갈 데가 없었습니다. 학교 식당도 닫았는데 저는 갈 데가 없어서 그냥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고향이 없다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1231일에 모든 교회가 송구영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예배가 끝나면 새벽 1시 반이나 2시가 되는데, 그때 예배가 끝나고 학교 기숙사로 돌아올 방법이 없어서 그냥 학교 기숙사에 머물렀습니다. 그냥 티브이를 틀었더니 <10대 가수상>을 하는데,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와서 난 알아요라고 랩으로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너희는 그래도 뭘 안다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납니다.

 

미국에 이민 온 후에도 여러 장소에서 살아 보았습니다. 처음에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주의 작은 도시인 썸터(Sumter)라는 데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 시골 도시에서 시작하여 신학교가 있는 조지아(Georgia) 주 애틀랜타(Atlanta), 또 그 후에 뉴저지(New Jersey) 주 프린스턴(Princeton), 워싱턴(Washington) 주 시애틀(Seattle), 플로리다(Florida) 주 마이애미(Miami), 미시건(Michigan) 주 디트로이트(Detroit) 지역, 또 지금 오하이오(Ohio) 주 콜럼버스(Columbus) , 많은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한 곳도 저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한국도 미국도 고향이 아니라면 저의 진정한 고향은 도대체 어디라는 말입니까? 성경은 그곳이 하늘나라라고 이야기해줍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그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만이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땅에서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즉 여기 있든 한국에 있든 중국에 있든 다른 나라에 있든, 미국 내에서도 어느 주 어느 도시에 있든지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고향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어디를 가도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하늘나라가 이미우리에게 임했는데 아직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 형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함께 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물론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이자 외국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그네가 타국에서 살면서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만 나그네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다 이 땅에서 자기들이 나그네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이 땅이 진정한 고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죽 나와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비록 이 땅의 관점으로는 나그네였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 자리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고 있는 우리도 부르셔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1.   아브라함을 인정하는 아비멜렉 (22-23)

 

20장에서 아브라함이 그랄로 이주했을 때,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하여 그랄 왕인 아비멜렉을 속인 사건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집트에서와 똑같은 수법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각도로 보면 아브라함이 그만큼 순진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의 상처 때문에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똑같은 방법을 썼다는 것은 다른 방법을 몰랐다는 말도 됩니다.

 

아브라함은 또 다시 위기 상황을 만났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화를 면하고 오히려 많은 짐승과 종들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땅에 거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영주권을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서 받아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계속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오히려 그가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그를 계속 훈련시키시면서 정말로 믿음의 조상이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삭을 낳고 이스마엘을 내보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2)

 

놀랍게도 그랄 왕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너는 뭘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요즘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오히려 사회에서 지탄을 받고 욕을 먹을 때가 훨씬 많은 것을 봅니다. 지난 며칠 사이에도 한국에서 몇몇 교회로부터 지역감염이 일어나는 바람에 또 비난을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조선 사람들로부터 즉시 , 당신들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신이 보낸 사람입니다.’라고 인정을 받았던 것이 절대 아닙니다.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선교사가 있는데, 아내는 로제타 홀(Rosetta Hall)이고 아들은 셔우드 홀(Sherwood Hall)이었습니다. 셔우드는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평양의 문이 열렸다고 하여 이사를 가서 집을 얻어 사는데, 사람들이 구경을 와서 그 집 앞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신기한 동물들이 왔다고 하여 와서 구경하는데, 정말로 코가 뾰족하고 눈이 파랗고 아기도 신기하게 생겨서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움직이면서 서로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조선 사람들이 사람인가 봐. 말도 해.”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서양 선교사들을 놀리면서 코가 크다고 코쟁이라고 불렀고, 또 눈이 파랗다고 서양 도깨비라고 불렀습니다. 수많은 조롱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정말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제가 홀 선교사 가정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두 사람이 한국에 와서 결혼했는데 남편은 3년 만에 죽었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평양에 다친 군인들을 돕겠다고 갔다가 전염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첫째 셔우드가 3살 정도였고 둘째는 딸인데 엄마 뱃속에 있었습니다. 유복자가 된 겁니다.

 

여러 상황 때문에 미국에 와서 아이를 낳고, 다시 남편을 묻는 그 땅 조선으로 로제타 홀 선교사가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옵니다. 그래서 이화여대부속병원과 고려대학병원의 전신이 되는 병원들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여자아이가 에디스 홀(Edith Hall)인데 온지 얼마 안 되어 전염병으로 그 아기가 죽었습니다.

 

남편도 묻고 딸도 묻고, 그 얼마나 지겨운 땅입니까? 그런데 거기 꿋꿋이 남아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베풀고 병원을 세우고 여성들을 교육하고, 심지어 최초의 여성 의사를 배출해내고 유학도 시켜주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수많은 조롱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남편이 다 하지 못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얼마나 눈물 나는 스토리인지 모릅니다.

 

저 같으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 가족이 죽은 땅에 뭐 하러 다시 가겠습니까? 저주의 땅인데. 이런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선 것이지 절대 우리가 잘나서 된 게 아닙니다. 나중에는 조선의 임금도 그들의 사역을 기뻐하면서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인정해주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조선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잘 되도록 도왔습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을 정말로 위하지 않았다면 존경과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 22절에서 그랄 왕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이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고 아브라함에게 말할 정도였다면,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그랄 땅으로 왔을 때는 그곳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불안해하며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던 것입니까?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는 않지만 아비멜렉과 비골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는 모든 일에 함께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뭘 하든지 다 형통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이 보기에도 아브라함은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그들 눈에도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얼마 전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에게 목을 눌려 죽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후 미국 여러 도시들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쳐서 폭동과 약탈로도 이어졌습니다.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한인 상점들도 피해를 봤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인 상점만 노리고 약탈을 한 것은 아니고, 경찰서 근처 상점들을 약탈하다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많은 한인들 특히 LA 한인들은 굉장히 긴장했습니다. 왜냐하면 19924월에 이미 폭동을 한 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28년이나 된 일인데도 트라우마가 되어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때도 백인 경찰관들이 로드니 킹(Rodney King)이라는 흑인이 도망간다고 잡아서 몽둥이로 엄청나게 때린 사건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백인 경찰관들이 재판을 받고도 무죄로 풀려난 것이 알려지면서, 그에 분노한 LA 지역 흑인들이 들고 일어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백인 경찰관들의 폭력으로 시작된 사건이 엉뚱하게 한인 상가로 불똥이 튀었습니다.

 

제가 당시 교환학생으로 가기 직전 마지막 학기였는데, 기독교윤리 시간에 교수님이 아무 주제라도 좋으니까 페이퍼를 쓰기만 하면 무조건 A를 주겠다고 해서, 다른 친구들은 적당히 하고 갔는데 저는 끝까지 붙들고 있다가 이 사건을 놓고 페이퍼를 써서 간신히(?) A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사건을 잘 기억합니다.

 

그때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한인 타운의 가게들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하고 물건을 훔쳐갔습니다. 그들이 왜 그랬습니까? 한인들이 자기들 지역에서 장사를 하는데, 돈을 많이 벌면서도 자기들이 사는 지역사회에 아무 것도 베풀어준 게 없고 돈만 악랄하게 뜯어간다는 의식이 팽배했기 때문입니다.

 

흑인들이 한국 사람들이 아주 비싼 고급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을 했겠습니까? ‘, 저분 좀 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사업에 성공했어. 저분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사람이야.’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저 흡혈귀 같은 사람들을 봐라. 우리 피를 빨아먹은 나쁜 자들이다. 우리를 속이고 착취해서 저렇게 부자가 된 거다. 하나도 베풀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며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폭동 가운데서도 전혀 공격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흑인들이 지켜준 가게들도 있었습니다. 평소에 이웃들과 좋은 관계에 있었고, 항상 사랑으로 베풀었고, 거기서 벌어들인 이익 중 일부를 지역사회에 정기적으로 기증하던 가게들이었습니다. 그런 가게들은 흑인들이 와서 안 된다. 우리 친구다.”라며 자발적으로 지켜주었습니다. 이번에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도 그런 식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LA 폭동 이후에 LA뿐 아니라 미국 전역의 한인들이 평소에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의 아비멜렉과 비골에게 인정을 받은 것은, 단순히 그가 좋은 사람이거나 부자이거나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평소에 그랄 사람들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을 진실한 마음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브라함은 분명히 사람의 마음으로 그곳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이 잘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힘을 보탰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비멜렉과 비골이 와서 이런 존경심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인정해줄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조약을 맺자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12장에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복을 흘려보내주고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아비멜렉이 계속해서 뭐라고 합니까?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23)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이렇게 세상 사람들로부터 당신을 보니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라고 인정받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사회에서 높이 올라가고 떵떵거리며 안락한 삶을 살면 된다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나누고 베푸는 복의 근원으로 사는 사람, 더 나아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 특히 땅 끝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완전히 반대이거나, 상당히 거리가 있는 때가 대부분입니다. 대개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것이 기다리고 있고, 그것을 처리하면 또 다른 게 옵니다.

 

고등학생에게는 대학교를 가는 것이 가장 큰 일일 것입니다. ‘내가 저 대학만 가면...'이라고 하며 가면 다 될 것 같았는데, 막상 대학에 가고 보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점수를 잘 받아야 되고, 또 졸업을 해야 되고, 졸업을 한 다음 무엇을 할지가 또 문제입니다. 간신히 좋은 직장을 잡고 나서 다 된 줄 알았는데, 그 후에 승진문제도 있고 진로 문제도 계속 있습니다.

 

그 후에는 또 결혼문제가 있고, 결혼하고 나면 자녀를 낳는 문제가 있고, 또 아이를 낳으면 자녀 교육 문제도 있습니다. 집도 있어야 합니다. 자녀가 다 크면 또 자녀의 결혼문제도 있습니다. 점점 세월이 흐를수록 노후 대책 문제도 있고 건강문제도 심각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보험을 사야 합니다. 은행에 저축도 해야 합니다. 정말 삶의 문제는 끝이 없고, 하나가 지나가면 또 하나가 오고, 그게 지나가면 또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왜 이렇게 세상에서 불안한 삶이 계속됩니까?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를 그냥 불안함 없이 편안하고 안정되게 살도록 해주시지 왜 그렇게 안 하십니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고 사람마다 약간씩 다릅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줄기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삶의 문제들을 통해 우리가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훈련 받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복을 받고 우리에게서 끝나면 통로가 되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훈련 없이 어떻게 그냥 막 나누어주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삶에 문제들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그것들을 통해 단련되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제대로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를 높여주기 시작하십니다.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이 세상에서 다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이 높은 자리에도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기를 바랍니다. 모든 청년들과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이 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다 유명해지고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끝나면 완전히 인생이 망가지는 겁니다. 성공하고 망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왜냐하면 훈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공은 해야 하는데, 그 전에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형통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도울 수 있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 없이 형통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절대 남을 돌아볼 줄 모르게 됩니다. 악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됩니다. 남을 돌아볼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교만해집니다. 이기적이 되어서 자기만을 위해 그 형통함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울과 다윗의 차이였습니다. 사울은 아무 훈련 없이 그냥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도망자의 세월, 험한 세월, 죽을 뻔한 세월을 보낸 후에야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차이가 났습니다.

 

여러 어려움들을 통해서 단련 받으며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때,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사용해주십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훈련받고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세상도 인정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때,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게 됩니다. 오직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이 세상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조약 체결 (24-31)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4-25)

 

여기서 아비멜렉과 대면하는 아브라함의 자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맹세해달라고 요청을 하니까 아브라함은 맹세를 해줍니다. 그런데 일단 맹세를 해주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지적할 것을 확실하게 지적합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자기 우물을 강제로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말하며 그를 책망합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6)

 

아비멜렉은 자기가 몰랐다고 발뺌합니다. 4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성향이 비슷합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했습니까?”라고 하면 알지 못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얼마나 똑같습니까? “이제야 알았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정말 몰랐겠습니까? 왕인데 그 보고를 안 들었겠습니까? 안 들은 게 더 이상합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알았는데 그냥 모른다고 부인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분이 나쁩니까? 사실 왕이 허락하니까 그런 게 가능한 겁니다. 나중에 알았더라도 그냥 묵인했으니까 그렇게 넘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난 몰랐다. 처음 듣는다. 너도 말을 안 해줬다.’라고 하니까 아브라함은 굉장히 기분이 나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7)

 

놀랍습니다. 아브라함이 당신이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하는 게 정상일 텐데, 또 증거를 갖다 대는 게 정상일 텐데, 오히려 자기 것을 갖다 주면서 언약을 세웁니다. 조약이라는 것은 보통 두 사람 간에 또는 두 집단 간에 뭔가를 서로 교환함으로 성사됩니다. 둘 다 서로 줘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아브라함만 아비멜렉에게 양과 소를 줍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28-31)

 

아브라함은 양과 소를 많이 주고 또 따로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아비멜렉에게 주면서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짓습니다(31).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또는 일곱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왜 아브라함만 아비멜렉에게 짐승들을 줍니까? 그 당시에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물건이나 짐승을 주며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양과 소를 주고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주었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그랄 땅의 이방인이고 아비멜렉은 그곳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지금 아비멜렉이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도 강한 군사적 힘이 있었고, 물질적 부유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랄 왕 아비멜렉 앞에서 낮추는 자세를 보입니다. 너무나 훌륭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신앙인들은 바로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세상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신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모범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저 사람은 참 쓸 데 없는 사람이야. 사라져 주면 더 좋겠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요즘 일은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월급만 축내는 사람을 도둑이라고 해서 월급 루팡이라고 부릅니다. 한국 사람들은 희한한 말들을 잘 만들어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저 사람은 월급 루팡이야.’라고 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는 직장에서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동네에서 꼭 필요한 사업체가 되어야 하고, 또 학생으로서 선생님이 또는 교수가 인정하는 신실한 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자세가 정말 훌륭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충분히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라고 받아치며 계속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당한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춥니다. 사실 이것이 희생입니다. 이렇게 해야 관계가 풀립니다.

 

예수님이 강대강으로 나가셨으면 아마 온 세상은 그때 다 멸망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희생하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희생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려면 한쪽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희생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이 다 파악하고 자기가 희생하며 자기가 낮춘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갈 때 오히려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 대신 아브라함이 그냥 당하기만 한 게 아닙니다. 잘못은 확실히 지적하되, 겸손한 자세로 자신이 희생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영향력을 갖게 되고, 우리의 영향력 때문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를 어렵게 만들고 때로는 우리를 억울하게 누명을 씌우는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되 동시에 겸손한 자세로 희생하는 넓은 마음과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줄 때, 세상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브라함 (32-34)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3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랄 땅에서 안정된 생활을 허락하십니다. 그곳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되고, 자기가 팠던 우물도 도로 찾게 됩니다. 이때처럼 평화로운 때가 또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평화와 성공의 때에 아브라함은 무엇을 합니까?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33-34)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모든 복이 하나님께서 나왔음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부릅니까? 영원하신 여호와(Eternal God)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과 또 이 하나님 안에서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이 땅에서 아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원한 평화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때까지의 모든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어려움이 올 때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먼저 본문은 우리 가운데 불안정하고 긴장되고 초조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형통한 미래에 대한 소망을 제시해줍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혹은 그것과 관계없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결코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건강의 문제가 있습니까? 신분의 문제, 진로의 문제, 직장의 문제, 사업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관계의 문제가 있습니까? 특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해결해주실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은 훈련의 기간입니다. 이 훈련을 우리가 잘 통과하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본문은 우리 중에 지금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도전을 줍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있지만 편안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리는 모든 귀한 것들은 나와 내 가족만 즐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많은 것들을 갖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주신 것입니다. 안 나누면 거두어 가실지도 모릅니다.

 

옛날에는 못 먹어서 문제였는데 지금은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이어트니, 콜레스테롤이니, 몸매 관리니 하면서 운동도 하고 살빼기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직까지도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한쪽에서는 먹는 문제로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당장의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운 이들의 전쟁입니다. 참 모순 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까 태평양의 하와이 근처에 섬이 하나 새로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섬은 쓰레기 섬입니다. 엄청난 쓰레기가 쌓여서 섬 같이 된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고자 몇몇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그 섬을 나라로 등록하고 그 나라 시민이 되었는데,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쓰레기가 다 어디서 왔겠습니까? 다 사람들이 먹고 버린 것들입니다. 그런데 버린 쓰레기에서도 찾아서 먹겠다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 모순 된 세상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상과 함께 나누라고 우리에게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나누면 몇 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현재의 삶이 고달프고 어렵고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해서 좌절하지는 마십시오. 때가 되면 분명히 채워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반대로 지금의 삶이 편안하고 안락하다면, 거기에 머물지 마시고 주변을 돌아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나누는 삶이야말로 풍성한 삶의 기쁨을 누리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모두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 하나님께 참 기쁨을 드리고, 또 주님이 주신 복을 세상에 나눠주는 복의 근원 된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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