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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BkfCF8T9EjE?t=2968

 

202053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8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한복음 1138~44)

 

[들어가는 말]

 

오늘 아침 기준으로 전 세계의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 수가 거의 350만 명이 다 되었고, 사망자 수는 244천 명이 넘었습니다. 세계에서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가 가장 많은 이 미국에서는, 감염자가 113만 명을 넘었고 사망자는 66천 명을 넘었습니다. 감염자는 대략 전 세계의 1/3 정도가 되고, 사망자는 1/4 정도 됩니다.

 

이번에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 중에 자기가 갑자기 죽을 줄 알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미리 알았겠습니까? 자기가 병이 있어서 나중에 죽게 되더라도, 나중에 죽을 줄 알았지 지금 갑자기 죽을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아무리 평소에 지병이 있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은 가족들이 몰랐을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십니까?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이유를 댈 수도 있지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렵지 않다.’ 하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정말 죽음의 위기기 다가오면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아니면 자기는 죽음과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세상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바이러스로 죽어가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평소에 죽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러나 참된 지혜는 죽음을 직면하는 데서 얻을 수 있습니다. 잠언에 읽어보아도 잔치를 벌이는 데보다 장례가 난 곳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거기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뛰어난 영성학자였던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죽음은 가장 큰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우웬의 말처럼, 죽음은 우리 생애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 품에 안기는 참 안식의 순간이며,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축복의 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평소에 살면서 우리는 쓸 데 없는 데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중요한 일에 집중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어떤 교육보다도 죽음 교육이 필요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어떻게 사랑을 하는가 하는 사랑 교육도 필요하고, 직업을 얻게 될 때 직업 교육도 필요하고, 또 올바른 성 교육도 필요합니다. 요즘 한국에서 코로나 사태 때문에 묻혔지만, n번방 사건 같이 비뚤어진 성 의식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교육 것보다도 우선적으로 우리에게는 죽음 교육이 필요합니다. 죽음은 반드시 우리에게 일어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건들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에 대해 묵상해보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38~44절이지만, 11장 전체를 살펴보며 나누기 원합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원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함께 찾아보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도 찾아오는 고난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10:10, )

 

예수님은 우리(“양들”)에게 영원한 생명, 즉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즉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풍성한 삶을 살게 해주려고 오셨다는 것이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이 들었을 때 즉시 와서 고쳐주지 않으시고 머물던 곳에 이틀을 더 계심으로 그가 죽도록 놓아두셨습니다(6).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죽음을 통해 더욱 풍성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5-26)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직면할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를 생각하면 삶의 질이 향상됩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가장 값진 삶을 살기 위해 가장 값진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다시 살아남을 통해 확실하게 배우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도 고난은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에 대해 강조되는 표현이 있는데,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3)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5-6)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으면 즉시 가서 병을 고쳐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것 같은데 예수님은 천천히 가신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때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물며 일부러 지체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크게 세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1) 하나님의 지체는 거절이 아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께서 당장 나사로에게 가셔서 그를 고쳐주시면 좋겠다, 고쳐주셔야 한다는 마음이 듭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저도 당연히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니,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으니 즉시 가서 고쳐주셔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예수님은 이틀을 더 지체하시고,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도록 지체하십니다. 이럴 때 마르다의 마음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1)

 

후회와 한과 원망과 불평의 마음이 섞여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어떤 불행한 일이 벌어질 때 이 마르다의 말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역사해주셨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예수님이 이틀을 지체하신 것은 결코 마르다와 마리아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누이들로부터 부탁을 받으시고도(3) 이틀을 더 유하신 것은(6), 결코 그들의 부탁을 무시하고 거절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때에 주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그럴 때가 많습니다. 사실 그런 경우를 우리는 많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정말 꼭 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꼭 기억할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곧 주님께서 내 간구를 거절하셨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으십니까? 원하는 것을 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왜 안 주십니까? 오히려 왜 우리의 마음을 꺾어놓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겨우 요 정도인데 하나님은 저렇게 엄청난 것을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겨우 요 정도를 구하니까 그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 당장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주님, 당장 주십시오. 지금 주십시오. 저는 이게 지금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안 주시고 한참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더 적절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대한 믿음의 사람인 사도 바울이 육체의 가시(사탄의 가시)를 제해달라고 생명을 건 기도를 세 번 했습니다. 아마도 40일 금식기도 같은 것을 세 번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에게 그 후 더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이 때로는 ‘Yes’ 하고 주십니다. 사실은 yes가 더 많습니다. 엄청난 기도제목만 생각해서 그렇지, 자잘한 것까지 다 구해보십시오. 다 주십니다. 그런데 때로 ‘No’ 또는 ‘Wait’으로 응답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매몰차게 거절하시는 게 아니라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지체하시는 것 같을 때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것 같이 보여도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모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모르고 원하는 것만 구하는데,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정확히 주십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 당장 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때보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때를 하시고 그때 주십니다.

 

 

2)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오히려 더디게 응답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의 영역이며, 우리 인간의 무슨 공식에 끼워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공식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은 우리의 어떤 공식으로 끼워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일수록 어떤 일을 더디게 진행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 기다리게 하십니다. 어떨 때는 정말 피가 마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를 나의 친구다.’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들을 약속하시고 나서 아주 오래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 그를 통해 엄청난 자손을 주겠다.’ 하시고는 무려 25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 정말로 귀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다면, 더딜수록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물은 모두 똑같이 최고로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뭐가 더 좋고 뭐가 덜 좋다고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응답이 더디면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꼭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똑같이 최고의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받는 우리 입장에서 최고의 것을 그냥 주시면 그 값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게 얼마나 귀한 줄 모르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할 텐데, 오래 기다리게 하신 다음에 주시면 이것이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 깨닫고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면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하나님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속히 행하시지 않고 오래 기다렸다 이루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모든 과정을 거치게 하시면서 기다림을 통해 우리를 더 성숙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 인격의 그릇을 빚어나가시는 겁니다. 준비시키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편안함이나 안락함이 아닙니다. 편안하게 살다가 망하면 그게 뭡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편안함이나 안락함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급하고 마음이 조급해질수록 조금 더 침착하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여유를 가지며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사람들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고난을 받은 사람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욥도 오래 참아 기다림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또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사랑하셔서 17세의 나이에 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17살부터 시작하여 1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갖은 시련과 역경을 겪었습니다. 그 기간을 통해 혹독한 연단을 거치게 하시고, 그 후에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요셉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전체가 아주 혹독한 훈련의 기간이었습니다. 이때는 인생의 황금기가 아닙니까? 17세에서 30세까지 인생의 황금기에 혹독한 훈련만 받았습니다. 억울한 일을 너무 많이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성경에 아무 흠이 기록되지 않은 유일한 사람, 놀라운 믿음의 사람, 심지어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사람이 되었고, 자기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자기가 섬기던 나라 이집트와 주변의 수많은 민족들을 살리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도 사랑하셨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그로 하여금 애굽의 왕궁에서 40년 동안 왕자로 자라게 하시고, 또 광야에서 40년 동안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계시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정확한 때에 가장 정확하게 일하십니다.

 

위대한 왕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십대 소년으로서 집안의 목동 일을 하고 있을 때 사무엘을 보내셔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실제로 왕좌에 오른 것은 30세였습니다. 그도 요셉과 비슷하게 십대 후반에서 20대를 통째로 훈련의 기간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것도 자기 장인인 사울에게 20대 내내 엄청난 핍박과 환난을 받은 후에 그렇게 되게 해주셨습니다. 왕좌에 오른 다음에도 첫 76개월 동안은 자기의 지파인 유다 지파의 왕이 되어 헤브론에서 다스리게 하셨고, 그 후에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다스렸습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이 더디 응답하실 때가 있는데,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아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잘 빚으셔서 그 다음에 아주 귀하게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아주 소중하고 값어치가 대단한 예술 작품이 그냥 뚝딱 하고 나오는 것을 보셨습니까? 장인의 손을 거쳐 또는 예술가의 손을 거쳐 아주 오랜 시간 다듬고 또 다듬은 후에 나온 것들이 명품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다림의 기간 동안 잘 빚어지도록 준비하면서, 그 시간 동안 허송세월하며 인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인물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그러한 기다림과 인내의 세월을 보냈고, 그들은 그 시간을 결코 낭비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 기간 동안 미래를 위해 철저히 자신을 준비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내 기도에 응답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다른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인고의 기간을 준비 기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3)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배우게 된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고쳐주신 것보다 죽어서 썩어 냄새가 날 때 살려주신 것, 그냥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건을 통해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 나사로가 죽은 것을 보았는데 살아난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연약한 우리를 더 연약하게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이미 부족한데 더 부족하게 하시고, 이미 가난한데 더 가난하게 하십니다. 이미 실패했는데 더 실패하게 하셔서 아무 소망이 없다고 할 때까지 이르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만 해도 인간적인 희망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희망이 다 사라지게 그냥 놓아두십니다.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아니, 아예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시체가 썩은 냄새가 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모든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때부터 역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인간적인 희망이 다 끝나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희망이 안 보일 때 우리가 할 일은 그냥 좌절하고 낙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붙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신뢰하는 겁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볼 때 하나님의 관점을 배우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은 인간의 관점과 주님의 관점이 계속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 동안에는 당연히 세상의 관점과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상식과 경험을 동원해서 살아갑니다. 그 자체는 나쁜 게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것만 가지고 살 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의 관점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지금은 모여서 드리지 못하지만, 예배는 주일에 한 번 1시간여 드리는 게 예배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도 있고 같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일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또 함께 모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같이 모여 예배드릴 수도 없고 교제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한 공간에 모이지 못하는 것뿐이지, 우리는 지금 장소만 달리 해서 같은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리 토요일에 녹화해서 주일 아침에 올릴 수도 있지만 일부러 라이브로 하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도, 공간은 같이 하지 못하나 시간은 같이 하여, 어디서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라이브 영상 예배를 할 때 놓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함께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함께해야 합니다. 주일도, 수요일도, 새벽에도 같이 해야 합니다. 요즘은 목장도 비디오 컨퍼런스로 하고 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공간에 모여 있지 못할 뿐이지, 같은 시간에 함께 교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도구를 통해 매주 함께 감사제목을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쩌다 한 번씩 해서는 별 효과가 없습니다. 공부를 해도 어쩌다 한 번씩 해서는 안 되고, 뭘 하나 배워도 어쩌다 한 번씩 해 가지고는 안 되고 집중해서 해야 되듯, 운동도 꾸준히 정기적으로 해야 되듯, 그래서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이나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매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또 매주 목장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쉴 때 사탄도 쉬고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재택근무를 한다고 사탄도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대단한 오해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쉬고 있을 때, 사탄은 바로 그 틈을 파고듭니다. 조금씩 균열을 만듭니다. 금이 가게 만듭니다. 그러다 결국 우리가 무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사탄에게 틈을 내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일,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와 함께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일을 쉴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제일 중요한 계명인데 이것을 쉴 때, 사탄의 바이러스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바이러스가 막 창궐하여 퍼지는 곳에 아무 마스크도 없이, 손 세정제나 소독제도 없이 그냥 맨 몸으로 나는 건강하다. 괜찮다.’ 하고 막 돌아다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주 위험합니다. 그대로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맙니다.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릴 때 아무 방비 없이 그렇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보면서 우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무 어리석다. 너무 무책임하다. 저 사람은 잘못됐다.’ 하며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만남이 없고 형제자매와 교제가 없이 그래도 나는 크리스천이다.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라고 한다면, 내가 비난하는 그 방비 없이 다니는 사람보다 나 자신이 훨씬 더 어리석고 무지하고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관점을 배웁니다. 다른 데 시간을 보내면 그것의 관점을 배우게 됩니다. 게임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게임의 관점을 배웁니다. 영화에 미친 사람은 그 관점을 배웁니다. 하나님을 늘 만나면 하나님의 관점을 배웁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 병이 죽을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관점이 다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4)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때 삶의 비밀이 풀립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 삶을 바라보며 오직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2. 믿을 때 보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자에게도 고난이 오지만, 믿을 때 보게 되는 영광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주 끝났다고 생각되는 죽음의 순간에도, 이제는 다 틀렸다고 생각되는 절망의 순간에도, 믿고 또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에는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믿고 또 믿고, 안 믿어지는 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죽었는데 또 뭘 믿으라는 말입니까? 지금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까지 나는 상황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38-39)

 

무슨 말입니까?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시니까 싫어요하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다의 이 말은 정말 이해가 가는 말 아닙니까? 아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말인 것 맞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서 믿음의 말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0)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때 하신 것이 아니라 이전에 이미 이 말씀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마르다에게 상기시켜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주십니다.

 

신앙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봤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보입니다. 봐서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보입니다. 참 이것이 놀라운 믿음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삶> 때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성경을 읽다가 그래도 60~70% 확실한 것 같다고 느껴지면 믿기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그 나머지 30~40% 비는 부분이 신앙생활을 통해 채워집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에게는 몇 가지 믿음의 표시가 있습니다.

 

1) 믿음의 사람은 기도한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누이들(마르다와 마리아)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사실은 기도입니다.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알린 것은 와서 고쳐달라는 기도입니다(3).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능력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믿음이 더욱 강해집니다. 기도할 때 특히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 강력한 믿음을 얻게 됩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마르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2) 믿음의 사람은 순종한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1)

 

보통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드리신 것에 초점을 맞추는데, 맨 앞을 보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니.” 이것을 보면 마르다의 믿음은 분명히 위대한 믿음입니다. 왜 위대합니까?

 

예수님 말씀을 듣고서 마르다는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셨을 때(40), 마르다가 에이, 싫어요. 말이 됩니까? 지금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 돌을 옮겨놓으면 그 냄새가 그대로 오는데 큰일 나죠. 안 되죠. 누구 죽일 일 있으세요?’라고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시체 썩는 냄새가 돌을 막아놓아도 나는 상황인데 돌을 옮겼습니다. 자기가 직접 한 것은 아니고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돌을 옮겨 놓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위대한 믿음입니다. 사실 이게 뭐가 위대합니까? 하나도 위대해 보이지 않는데,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자기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가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니까 순종하여 행동한 것이 위대한 믿음이라는 겁니다. 작지만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사실 마르다도 우리와 똑같습니다. 별 믿음 없습니다. 그런데 순종한 것이 위대한 믿음입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 곧 순종입니다. 비록 내 생각으로는 이것이 이해가 안 되고 말이 안 되지만,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42-44)

 

순종하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순종하면 사랑을 받습니다.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책임져주십니다. 아주 작은 순종이고 작은 믿음이지만, 돌을 안 옮겼으면 기적을 못 봤을 것입니다. 돌을 옮겼더니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이처럼 복을 내려주십니다. 순종하는 사람을 높이 세우시고 하나님의 기적을 못보게 해주십니다. 내 지식과 생각과 경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순종입니다.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점점 더욱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지만, 순종하지 않게 되면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구실만 찾게 됩니다. 사람이 구차해집니다.

 

순종은 기적의 그릇을 준비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누가 하겠습니까? 주님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할 일은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돌을 옮겨서 주님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준비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을 옮기는 일까지는 해주지 않으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 움직여라.’ 하셨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능력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들이 돌을 옮겨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을 때 나사로가 살아 나오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해주셔야 할 엄청난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은 아주 작은 일이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무슨 엄청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엄청난 주님을 믿기 때문에 내가 작은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옮겨야 할 돌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지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인지 맞춰보십시오.

 

7세 때 가족 파산, 9세 때 어머니의 죽음, 22세 때 사업 실패, 23세 때 주의회 의원 낙선, 24세 때 사업 또 실패, 25세 때 약혼녀의 죽음, 27세 때 신경쇠약으로 병원 입원, 34세와 39세 때 하원의원 두 차례 낙선, 45세와 49세 때 상원의원 두 차례 낙선. 이렇게 실패할 때마다 그에게는 절망의 유혹이 다가왔고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어록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더는 갈 곳이 없다는 엄청난 거짓 확신이 수없이 밀려왔다. 그때마다 내 지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는 실패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51세 때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바로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아브라함 링컨(1809-1865)입니다. 가장 존경받는 미국 역대 대통령 아닙니까? 그런데 그만큼 실패를 많이 경험했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무수한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남북전쟁의 승리를 이끌고 노예 해방을 이루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엄청난 어려움이 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때로는 빨라 안 해주시고 지체하시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더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주 정확한 때에 아주 정확한 방법으로 분명히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지체하실수록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크게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하며 나아가,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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