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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8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출애굽기 1317~22)

 

[들어가는 말]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사도행전이 끝나고 무엇을 할까 기도하며 생각하다가,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도 그렇고 세상에 소망이 너무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주는 소망은 오래 가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해 몇 주 동안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전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 여러 훌륭한 강사님들이 오셔서 집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 중 한 분이 강영우 박사님이라는 분이었는데, 아마 많은 분들이 아실 것 같습니다. 그분은 20122월에 68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분은 강영우 박사님은 시각장애인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장애의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고 나아갔던 분입니다.

 

강영우 박사는 중학교 시절 뜻하지 않은 사고로 실명했는데, 그래서 더 상심이 컸습니다. 바로 이어서 모친과 누나를 잃고 맹인으로서 고아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입니까?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의 길에 올라 한국 최초의 시각 장애인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 놀랍게도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로 일했고, UN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 겸 루스벨트 재단 고문으로 일하면서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힘쓰며 살았던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강영우 박사님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분입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어둠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었던 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절망 앞에서 남긴 그분의 생애와 글과 마음은 고난과 시련과 암흑을 헤쳐 나온 소망의 힘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와 삶을 통해서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사림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희망이 있는 곳에는 절망이 자리 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토록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은 절망이 크고 무겁기 때문이 아니라, 희망을 찾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신음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불평도 할 수 있습니다. 원망도 좌절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희망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꿈을 꾸는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준 사람입니다. 또 꿈을 꾸는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모습은 그가 팔려온 노예에서 또한 죄수에서 위대한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것보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창세기 50:26)

 

창세기는 요셉이 죽었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하지만 요셉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백성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의 희망이 어떻게 실현되며 이스라엘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도록 돕는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지금 자기가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원하던 일이 잘 되지 않아서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위해 가장 절망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희망을 품을 수 있고, 포기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도전의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삶이 된다면 얼마나 의미 있는 인생이 되겠습니까?

 

그냥 남들이 다 하는 것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절망 밖에 못하고 낙심할 만한 상황에서는 낙심 밖에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인생에 어떤 다른 점을 만들겠습니까? 다르지 않고 똑같습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 소망을 보게 되고 포기의 아픔 앞에서 오히려 도전의 용기를 갖게 되는 삶으로 나아간다면,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도 놀라운 인생이 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놀라운 도전을 주는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요셉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자신의 절망과 고난을 헤치며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았던 것인가?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도 꿈과 소망을 전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특히 요즘 한국은 청년 실업 문제가 큰데, 절망과 미래에 대한 어두운 소식 밖에 없는 가운데, 진정한 삶의 현장과 미래에 소망을 줄 수 있는 삶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오늘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삶 속에 소망이 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지금까지의 전형적인 강해설교와는 달리, 18-19절을 중심으로 하여 요셉의 삶을 돌아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우리가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아야겠는데, 그 배경이 18절과 19절입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7-18)

 

이때가 열 가지 재앙 이후에 이집트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떠나라고 내보낸 때입니다. 그들이 떠났는데, 지금은 버스를 타면 몇 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이고 걸어서 가도 몇 주면 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신 것은 전쟁을 하게 될 때 마음을 돌이킬까 하고 하나님이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홍해 길로 돌아가게 하셨는데, 이때 이스라엘 백성이 요셉의 유언을 기억하여 행합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19)

 

왜 이 말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셉이 죽기 전에 자기 친족들에게 이런 내용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자기 친족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일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 (50:24-25, 새번역)

 

이것이 요셉의 유언이었습니다. 자기 뼈를 이곳에서 옮겨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출애굽기 본문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유언한 내용입니다.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이 가족들과 같이 요셉을 통해 가나안 땅에서 이집트 땅으로 소위 이민을 온 다음에 그 백성이 430년 있었다고 했으니까, 400년 후에 그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의 말 속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언급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정말로 믿는 그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정말로 말씀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이고 야곱의 아버지는 이삭이며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인데, 그 아브라함에게 무슨 말씀을 주셨습니까?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15:16)

 

430년 정도 다른 땅에 있다가 올 것이라고 이미 오래 전 요셉의 증조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놀랍게도 자기 증조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나갈 때 자기 뼈를 가지고 나가라고 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그는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그저 자기가 편안하게 살다 죽는 것만 생각한 게 아니라, 자기 민족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죽고 나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 백성들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정말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는 날 자기 유골을 가지고 가달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요셉의 이런 확신과 믿음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것이 자기의 지혜입니까? 자기의 인생 경험입니까? 자기의 현실 속에서의 똑똑함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요셉은 자기의 현실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지혜와 경험과 지식과 현실적인 환경과 같은 것보다도,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많이 주셔서 불로 지나가도 타지 않을 것이다. 물로 지나가도 잠기지 않을 것이다. 전혀 다치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약속들을 많이 주셨는데,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다른가 보다.’라는 식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름대로 지혜와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서 삶을 헤쳐 나가고자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위기 상황에서 의지할 것은 나의 감정이나 생각이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너무 미련한 것 같고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정말 믿으며 그 믿음 때문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고, 그런 믿음의 사람들을 죽 이야기하는 히브리서 11(소위 믿음 장)에서 요셉에 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죽을 때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나갈 일을 언급하고, 자기 뼈를 어떻게 할지를 지시하였습니다.” (11:22, )

 

그러니까 요셉이 그렇게 한 것은 자기의 경험과 지식과 지혜가 아니라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유골을 갖고 나가 달라고 부탁하면서 단단히 맹세하게 했다는 내용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자기 유골을 꼭 갖고 나가라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단순히 내 뼈는 여기 이집트 이방 땅에 두면 안 되고 내 고향에 묻어다오.’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 민족을 향해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질 것이다.’라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가끔 보면 내가 죽으면 고향에 묻어다오.’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은 화장을 많이 하니까 그 재를 함에 담아서 묻기도 하고 재를 뿌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고향에 대한 애착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요셉이 자기 고향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내 뼈를 가지고 가서 거기 묻어라.’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전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하는 약속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 후 모세가 인도하여 나아갔고, 모세 후에 이스라엘을 인도하게 된 여호수아가 드디어 요단강을 건넌 후에 가나안 땅에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때 베이스캠프로 삼고 갔다 왔다 한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그가 길갈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강바닥에서 가지고 온 12개의 돌을 쌓고 그 앞에 섰습니다.

 

그때 그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여호수아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까지 온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모세도 가졌고, 그를 이어 리더가 된 여호수아도 그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모세와 함께 했던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이어서 여호수아가 인도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늘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자신은 너무 연약하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라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헤쳐 나갈 힘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더 험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려고 하면 전혀 불가능한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약속을 붙들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내일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날입니다.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고, 미국도 어제 목회편지를 쓰고 있는데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업데이트가 되는 것을 봤습니다. 불과 몇 시간 후도 보장이 없습니다. 내일은 보장이 없는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그 약속을 믿고, 불안하고 보장되지 않은 내일이지만 그 말씀을 붙들고 나아간 것입니다. 특히 그 말씀을 붙들고 전쟁터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에서 승리하고 복을 받은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환경은 힘듭니다. 옛날에도 힘들었고 지금도 힘듭니다. 또 나 자신을 볼 때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만만할 때도 있지만, 사실 깊이 자기 스스로 돌아보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게 많습니까? ‘앞으로 내가 어떻게 인생을 헤쳐 나가야 하나? 어떻게 아이들을 돌봐야 하나?’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 약속 때문에 우리는 갈 수 없는 길을 가게 됩니다. 또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낼 수 없는 용기를 다시 내서 또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고 살아도 결국 이 땅에서는 우리가 언젠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죽음 이후에도 소망을 선포하고 그 소망을 우리 자녀들에게 또 후손들에게 선물로 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인생입니까? 여러분, 내 인생이 세상에서 끝나고 세상을 떠났을 때 그냥 끝나더라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떠난 후에도 내가 가지고 있던 소망을 내 자녀에게 또 후손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지혜를 의지하고 살게 되면 내 인생이 끝날 때 그냥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살 때 죽음 이후에까지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정말 믿고 붙들고 사는 사람만이 이런 소망의 미래를 노래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 속에 소망이 있다

 

요셉은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고 드러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세상의 어떤 다른 것 때문에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로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삶을 살았기에 소망이 있었고, 두 번째로는 그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기에 소망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19)

 

19절 중반에 보면 요셉은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암흑 같은 절망과 어둠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해주시고,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이삭과 야곱 등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요셉은 고통스럽고 이해되지 않은 자기 생애에 일어난 모든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부인하거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며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고, 그 상황 속에서 감사하며, 여기에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늘 찾았습니다.

 

그는 형들의 시기에 의해서 이집트로 팔려갔을 때, 거기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보디발이라는 바로 왕의 시위대장의 노예로 팔려 갑니다. 거기서 아주 성실하게 일을 감당하니까 안 믿는 보디발이 보기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높여주어서 집안일을 다 돌보는 위치까지 올라갔는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때도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어쩌면 자기 생애에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였는데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유혹을 거절하고 벗어나게 됩니다. 그때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이 집안에서는, 나의 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의 주인께서 나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마님입니다. 마님은 주인 어른의 부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런 나쁜 일을 저질러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39:9, )

 

그냥 눈 딱 한 번 감고 저질러버리면 아주 좋은 위치에 올라갈 수 있고 좋아질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보시는데 어떻게 이런 악을 행할 수 있느냐고 거절합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서 애굽 왕의 술 맡은 시종장과 빵을 구워 올리는 시종장을 만나는데, 그 둘이 다 꿈을 꿉니다. 그때 그들이 불안하고 두려워할 때 요셉이 꿈을 해석해주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해몽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나에게 말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40:8, ).

 

그 후 술 맡은 시종장이 풀려나서 복직되어 일하다가, 요셉이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했지만 그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 그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요셉이 바로 앞에 왔을 때 바로 앞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존재와 행하신 일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바로 왕(파라오)이 요셉에게 네가 꿈을 잘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하니까 요셉은 바로에게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기뻐하실 대답은, 하나님이 해주실 것입니다.”(41:16, )라고 하며 최고 권력자인 바로 앞에서도 떨지 않고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임금님께서 두 번 꾸신 꿈의 내용은 다 같은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장차 하셔야 할 일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41:25, ). 그냥 슬쩍 제가 보기에 이렇습니다.’라고 해도 되는데 하나님이 알려주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나중에 자기를 팔았던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을 만나는데, 그때는 그가 이집트의 총리였을 때입니다. 그런데 형들을 용서합니다. 그것도 그의 인생관 속에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요셉의 정체를 알게 된 형들이 두려워서 벌벌 떱니다. 원래 죽이려 하다가 돈을 받고 팔았고, 이제는 이 아이와의 관계는 끝났다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자기들 앞에 위대한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나타난 겁니다.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그때 요셉은 복수하고 싶은 대상을 만났는데도 오히려 그들을 환대하며 평안하게 대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해석의 틀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떠는 형들에게 요셉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45:7-8, )

 

얼마나 놀라운 시각입니까? 나중에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나서 형들은 또 걱정이 됩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요셉이 보복을 안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혹시 우리에게 복수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요셉을 찾아와 절하며 빕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셔서 우리에게 잘 대해달라고 합니다. 그때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 (50:19-21, )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요셉을 구약의 예수님이라고 할 정도로 놀라운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심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자신은 심판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절대 주권이라는 겁니다. 복수의 권리도 자기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으며, 형들은 그것을 위해 쓰임을 받았다고 하는 놀라운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아니면 이런 해석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이런 해석을 하지 않았다면 용서를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놀라운 믿음을 가진 요셉은 마지막에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신뢰하며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언약하신 그대로 행하실 것이며, 자기는 죽지만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과 기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유골을 갖고 가 달라고 지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꼭 고향에 묻히고 싶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가끔 보면 과거의 일을 잊지 못해서 지금도 괴로워하며 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이나 <경건의 삶>을 통해서 그런 것을 치유해보자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과거를 과거로 보내는 아주 좋은 방법이 바로 용서입니다. 과거를 끊어내서 더 이상 내 삶에 그런 일들이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어떤 사람들은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옛날에 내 아버지가, 어머니가 이렇게 한 것이 아직도 사무친다.’라고 하며 몇 십 년 동안 잊지 못하고 계속 되뇝니다. 과거에 꽉 묶여서, 그 과거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자기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과거에 매여 있게 되면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고 미래를 열어 갈 수도 없습니다. 그 관심과 대화의 초점과 생각의 구조가 항상 과거에 일어났던 자기의 아픔과 상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서 거기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을 정말로 인정하고 신뢰하게 될 때,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해석하는 눈이 바뀝니다. 관점이 달라집니다. 나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지만, 이 아픔도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기 위해 내게 허락하신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놀랍게도 내가 당했던 그 아픔이, 이제 보니까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고 또 치유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어떤 아픔이 있는 사람에게 누가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똑같은 아픔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이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고백할 때 과거는 과거로 끝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하심을 인정하는 사람은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미래는 원래 죄로 인해서 죽음과 절망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어서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진정한 소망을 받아, 이젠 정말 놀라운 미래, 위대한 미래, 은혜로운 미래를 말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는 삶 속에 소망이 있다

 

요셉은 항상 꿈을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dreamer’라고 불렸습니다. 그 꿈이 그의 삶을 인도해 갔습니다. 요셉은 꿈 때문에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고, 또 어둠의 현실 속에서도 빛과 소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 그것은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입니까? 단지 17세 정도의 소년이 노예로 팔려갔다면 그 인생은 끝난 게 아닙니까? 그러나 그때도 그는 꿈을 기억했습니다. 해와 달과 열한 개의 별이 자기를 향해 절하고 자신이 존귀하게 되는 꿈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은 허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꿈은 소망이었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는 그 꿈을 따라 살았고, 그의 꿈이 실제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의 삶은 환경이 좋아서 잘된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을 통해 이끌어준 것도 아닙니다. 요셉 자신의 신념이나 지식이나 경험이 그의 인생을 이끌어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면서 가만히 있었으면 몽상가였을 텐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달려갔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유혹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총리가 되었으니까 꿈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까? 형들이 와서 절했으니까 꿈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또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이전 꿈은 중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는 또 다른 꿈, 자기 민족을 위한 꿈을 꾼 겁니다. 요셉은 큰 것을 이루고 나서도 머물거나 정체되어 부패해버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더 아름답게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을 이끌어 온 꿈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약속대로, 약속의 땅을 향해서 나아가는 꿈이었습니다. 저 약속의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꿈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요셉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은 꿈을 꾼 사람들인데, 바로 그들의 꿈을 분석한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11:13-16, )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면서 열심히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평가입니다. 요셉의 꿈이 고난이 다 지나가고 그저 편안하게 사는 것이었다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다면, 그는 총리가 되어 사회적인 성공을 이룬 그 순간 사실은 그것이 저주의 시작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은 실패하고 잘못된 사람들보다, 성공하고 잘못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총리가 되는 것이 요셉의 꿈이었다면, 그의 믿음의 생명력은 거기서 그냥 끝났을 것입니다. 그냥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정도로 끝났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것만 되면 내가 소원이 없겠다.’라는 게 있습니까? 학생들은 저 대학교에만 가면 정말 좋겠다.’라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면 그건 더 이상 꿈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음은 내가 돈 많이 버는 직장에 들어가야겠다.’라고 하는데, 실제로 들어가면 시시해집니다. 그러면 더 올라가보겠다고 하고, 그러다가 정말 최고까지 올라가도 만족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자기 인생이 망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요셉은 비록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갔지만, 그의 꿈은 관 속에 갇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꿈은 계속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꿈이 없이 절망 속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전달해주는 통로로 계속해서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죽고 나서도 계속 쓰임을 받았다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긴 여정과 험난한 과정을 통해서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완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여호수아서인데, 그 마지막 부분은 요셉이 그토록 사모했던 마지막 꿈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24:32)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자신의 꿈이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자신의 후손들에게 기업이 되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인생이겠습니까? 내 인생이 이 세상에서 죽어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에게, 또 자녀의 자녀에게 기업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인생입니까? 그런 삶을 산다면 천국에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날 때 당당하게 또 기쁨으로 자랑스럽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목회자가 대형교회 목사가 되는 것이 자신의 최고의 꿈이 될 때 비극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에는 좀 힘들더니 이제는 잘 먹고 잘 살고, 아주 잘됐구나.’ 하며 부러움의 대상이라는 축복을 받는다는 말을 듣는 것이 목표가 된다면, 바로 그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짜 꿈이 아니기 때문이고,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꿈은 이 땅의 것이 끝날 때 같이 끝납니다. 이 땅의 것이 썩을 때 같이 썩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평신도로서 만약 교회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장로가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고점이라면, 목사는 교단의 총회장이 되거나 무슨 무슨 장이 되는 것이 큰 축복이라고 하게 되면, 거기서부터 저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을병에 걸렸다 살아나는 것, 망한 사업이 다시 성공하는 것, 직장에서 아주 높이 올라가는 것이 우리 인생을 향한 꿈의 최고점과 절정이 된다면, 이것 또한 우리 인생의 망가짐과 무너짐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꿈을 꾸는 사람은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 결코 그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죽어서 시신이 관에 들어가도, 사실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의 자리에서부터 소망의 노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이 사순절이고 곧 고난주간과 성금요일이 오는데, 그때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신 예수님에 대한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골고다 언덕을 절망이라고 생각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와 절망의 자리가 어떤 끝이 아니라, 천국의 진정한 소망을 예수님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입에서 믿음에서 나오는 참된 소망의 꿈이 사라질 때, 우리는 이 땅의 것에 매이게 됩니다.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어떤 높은 자리에 자꾸 연연하게 되고, 어느 장소가 좋으냐에 연연하게 됩니다. 소유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누구나 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텐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인생이 끝난 후에도 계속적으로 절망의 흔적만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소망과 미래를 노래하고, 또 고난 중에 절망할 수밖에 없던 자기 동족에게 참 소망을 주었던 요셉의 유골처럼, 오늘 우리의 삶은 어둠 속에서도 미래를 열어주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면서 요셉의 말을 기억하며 요셉의 뼈를 메고 나갈 때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 이것은 정말 헛된 꿈이 아니었구나!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확신하며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의 꿈을 마음에 품고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보호의 손길로 함께 해주십니다.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20-22)

 

여러분,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셨는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몇 시에 바톤 터치를 했을까요? 해가 딱 지는 순간에 불기둥이 착 나와 터치하고, 아침에 동이 틀 때 구름기둥이 착 나와서 터치를 한 겁니까? 그게 아닙니다. 같은 구름기둥입니다. 그런데 밤에는 거기서 불이 나왔고, 낮에는 구름으로 시원하게 따가운 햇볕을 막아준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에 따라서 지켜주시는 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나가는 말]

 

처음 시작할 때 언급했던 강영우 박사께서 마지막으로 쓴 책이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두린노, 2012)라는 책입니다. 거기서 그분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한 평생 주님만 보고 걸었습니다. 나를 보면 어둠인데, 주님을 보니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만 바라봤습니다. 사람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살면 기분이 어떠하냐고 묻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입니다. 난 어둠 속에 있지 않습니다. 늘 빛으로 가득했고 그 빛이 너무 눈부셔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을 뿐입니다. 선글라스를 쓰니 빛 속에 계신 이가 더욱 선명합니다. 손에 잡힐 듯하고, 보고 있으니 언제나 가슴이 뜁니다. 지난 한 평생 그분과 함께 걸어온 지난날들에 감사합니다. 또 그 길에서 만난 소중한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여러분도 빛의 길로 들어서길 소망합니다.”

 

여러분, 세상이 절망을 이야기할 때, 진정한 소망이 천국에 있는 우리는 또 다시 소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야기하셨습니다. ‘너희의 몸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 영을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여러분, 이 세상에 지금 바이러스가 돌아서 , 내가 이것에 걸려서 잘못되면 어떡하지?’ 물론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 세상에서 사명을 주셔서 살면 그것도 감사하고, 혹시라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것은 더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참된 소망을 노래하기 원한다면, 오늘 우리가 부를 노래는 바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내 삶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참된 소망이 있음을 고백하면서, 어떤 성공과 성취 앞에서도, 어떤 절망과 두려움 앞에서도, 우리는 입을 열어 노래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 노래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피난처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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