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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19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0

가르치러 왔다 배우고 간 아볼로

(사도행전 1824~28)

 

[들어가는 말]

 

오래 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한 미국 가정에서, 아내가 보기에 남편이 좀 수상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시험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여보, 내가 죽으면 당신 재혼할 거예요?” 남편이 대답합니다. “내가 아직 젊으니까 할 수 없이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어요?”

 

아내가 이해한다고 말한 뒤 한 가지 질문을 또 합니다. “혹시 내가 죽는다면 내가 타던 자동차도 당신의 새 아내에게 타게 할 거예요?” “차가 아직 괜찮은데 어쩔 수 있겠어요? 타게 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대답합니다.

 

아내는 이해한다면서 또 한 가지 질문을 더 합니다. “그럼 내가 죽은 다음에 내가 사용하던 골프 클럽(club)도 새 여자에게 쓰게 할 거예요?” 그러자 남편이 정색하며 말합니다. “,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왼손잡이거든요.” 아니,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이런 이야기가 오래 전에는 우스갯소리였는데, 언젠가부터 더 이상 농담이 아닙니다. 오래 전인 1990년대부터 한국 가정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해 왔습니다. 부부 중 한 명 또는 두 명 모두의 외도 때문에 깨어져 나간 가정들이 너무 많습니다. 1990년경에 한국의 기혼 남자 회사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배우자 외에 혼외 관계를 가진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무려 7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약 30년 전에 나온 거니까, 지금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정치 문제나 경제 문제보다도, 이러한 도덕적 타락이 사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이처럼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심각하게 불신하고 외도나 여러 갈등 때문에 수많은 가정들이 깨어지는 이러한 시대에, 고난의 파도를 헤치며 꿋꿋하게 함께 나란히 주님을 섬긴 한 부부가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에 나오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이들은 정말 귀한 사람들입니다.

 

이 부부는 적어도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 세 번 또는 네 번을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결혼했다는 전제 아래 아굴라의 고향인 본도에서 로마로 이사했습니다. 그때 아굴라가 싱글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본도에서 로마로 갔다가 로마 여자인 브리스길라를 만나 결혼했다고 볼 수 있지만, 어쨌든 아굴라 입장에서는 이미 한 번을 멀리 이사했습니다. 지금의 터키 중북부 지역에서 저 멀리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이사를 했으니 얼마나 먼 길입니까.

 

결혼 후에 이들은 로마에서 고린도로 갔고, 거기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저번 본문에서 그들은 고린도에서 또 에베소로 갔고, 나중에 에베소에서 다시 한 번 로마로 갑니다. 우리가 같은 도시에서 옆 동네로 이사를 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1세기 당시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그 먼 거리를 이사 다니면서 그들이 얼마나 많이 힘들었겠습니까? 한 번 이사하려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떠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 부부는 더 가까워지고 더 아름답게 동역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항상 둘이 함께 등장합니다. 한 사람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의 한 문서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우리 중에 가장 으뜸 되는 부부의 이상형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신약성경에 이 부부에 대한 언급이 여섯 번 나오는데, 그 중 네 번은 오늘 본문을 포함해서 아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남편 아굴라보다 앞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보통은 남편의 이름을 먼저 기록합니다. 요즘도 보통 남편의 이름을 먼저 쓰고 아내의 이름을 쓰는데, 여기서 부인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는 것은 아마도 브리스길라가 다른 사람들 눈에 띌 정도로 굉장히 활동적이고 활발하고 아주 헌신적인 여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영적으로도 남편 아굴라보다 더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활동적인 아내 브리스길라의 헌신을 보면서, 남편 아굴라는 어디 여자가 그러면 되나하고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함께 돕고 더 하라고 뒤에서 뒷받침해주며 함께 섬겼습니다.

 

복음의 아름다운 사역이 이루어지는 곳에 나란히 등장하고 있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그들은 서로 뜨겁게 사랑했을 뿐 아니라 함께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큰 동역자가 되었고, 바로 오늘 본문에서도 아주 귀한 일을 감당하는 것을 봅니다.

 

 

1.   에베소에 온 아볼로

 

오늘 본문인 18장 마지막 부분은 앞의 이야기와 19장 앞부분 사이에 어떻게 보면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본문입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뜬금없이 아볼로라는 사람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 했던 이야기와 앞으로 할 이야기 사이에서 보충 설명을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볼로라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도착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4)

 

사도 바울의 행로를 쭉 설명하다가 갑자기 그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물 아볼로가 등장합니다. 이때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지 약 1년 정도 됐을 때라고 생각됩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그곳은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습니다. 이집트가 로마제국에 편입이 되면서 제국의 수도 로마 다음으로 제 2의 수도라고 할 정도의 엄청난 도시였습니다.

 

이 알렉산드리아는 BC 332년 헬라제국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기가 정복한 지역에 자기 이름을 붙인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30개 이상 건설했습니다. 그 중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가장 크고 유명했습니다. 본문 사건이 벌어지던 1세기 당시에도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와 에베소와 수리아의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의 4대 도시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파피루스의 생산지답게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장서를 50만 권이나 소장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당시에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상업이나 금융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로마제국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도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BC 3세기 중엽에 시작해서 BC 2세기까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서 최초로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원래는 히브리어) ‘70인역(Septuagint)’이 발간된 곳도 바로 이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높은 학문에 대해서 높은 긍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인 필로(Philo)는 히브리 종교와 헬라 철학을 조화시키기 위해 구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려 시도했던 곳도 바로 이곳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게다가 이집트는 피라미드로도 유명한데, 그 오래 전 고대시대 때 어떻게 그렇게 높게 또 정교하게 오차도 없이 쌓아올렸고 지금까지도 멀쩡할 수 있는지 참으로 놀랍습니다. 세계적인 불가사의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학의 힘이고 기하학의 힘입니다. 그렇게 수학과 기하학이 발달했고, 특별히 헬레니즘의 중심지가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라고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알아줬습니다.

 

오늘 성경이 아볼로를 소개하면서, 그냥 아볼로 혹은 유대인 아볼로라고 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라고 출신을 굳이 밝히는 이유는, 이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고 성경에 능통한 유대인이었습니다. 24절의 성경은 당연히 구약성경인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구약성경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있지 않고 수십 개의 양피지 두루마리나 엄청난 양의 파피루스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그 많은 양을 섭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볼로는 그렇게 방대한 구약성경에 아주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으니까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저자를 알 수 없는 책이 히브리서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여러 개 써서 바울의 편지는 받는 쪽 이름을 붙였고, 다른 사람들은 보낸 사람의 이름을 썼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히브리가 쓰지 않았음에 분명합니다. 히브리서도 히브리 사람들, 즉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구인지 나와 있지 않은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를 비롯하여 어떤 학자들은 아볼로가 히브리서의 저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아볼로는 구약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5)

 

아볼로는 또한 일찍이 주의 도(the way of the Lord)’를 배운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사용했던 아주 독특한 용어입니다. 이사야서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사야에서의 일관된 관심과 초점이 메시아의 오실 길인데,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의 도입니다.

 

메시아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그 메시야이심을 믿지만, 유대인들은 믿지 않고 지금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뉴욕에 있는 랍비가 메시야라고 생각했는데, 그 랍비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장례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니까 살아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안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전혀 메시야가 아닙니다.

 

지금은 유대인들이 개인보다는 이스라엘 나라가 메시야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메시야가 설명이 안 됩니다. 그 메시아가 오는 것에 대해 담대하게 예언하고 일관되게 설명한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또한 지금은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앞으로 그분이 오셔서 우리를 회복시켜주고 해방시켜주고 자유를 준다.’라고 소망을 품도록 해준 선지자도 이사야입니다.

 

그가 선포한 메시아의 오심의 뜻을 가리키는 용어가 바로 주의 도’, 주의 길입니다. 세례요한은 바로 그 주의 길을 예비하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바로 그 주의 도에 대해 아볼로는 어릴 때부터 다 배웠다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구약성경에만 능통한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예수님에 대해서도 배워서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볼로에게는 자신이 배운 것을 남들에게 가르쳐주려는 열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까지만 알고 그 이상은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당시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에게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습니다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돌아설 것을 요구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성취된 복음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제자들 가운데 사방으로 흩어져 회개를 선포하고 또 예수님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예수님에 대한 것도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대한 내용뿐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복음은 복음의 일부일 뿐, 온전한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아볼로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복음의 일부를 배웠고, 그것이 마치 복음의 전부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열성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들어가게 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2.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지도를 받는 아볼로

 

에베소에 도착하자마자 아볼로는 회당을 찾아가 자신의 지식과 학문으로 이러저런 것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놀랍게도 바울이 에베소에 남겨두고 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습니다. 이들은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과 만나서 업이 같았기에 천막 만드는 일을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따라서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까지 왔다가, 그가 떠난 후에도 계속 그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이 의도적으로 그들을 그곳에 남게 하여 거기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게 한 것입니다. 3차 전도여행 때 살펴보겠지만, 다시 이곳에 올 것을 생각하고 이 부부를 남겨둔 것입니다. 이 부부가 유대인 회당에 왔다가 아볼로가 전하는 설교를 듣게 됩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은혜도 넘치고 내용도 좋고 언변도 뛰어나고 잘하는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베뢰아의 유대인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이 바울의 전하는 말을 들으면서 이것이 정말인가 알아보았던 태도처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말씀에 대해 정확한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것을 이들은 탁 캐치한 것입니다. 분명히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닌데 뭔가 부족하며 아직 온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은 틀렸소!’ 하며 대놓고 창피를 주며 자기가 아는 것을 이야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부족하다고 해서 대놓고 직접 말하지 않고 아주 겸손하고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그를 데려다가 복음을 설명해준 것입니다.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26).

 

여기서 더 정확하게라고 비교급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볼로가 전한 내용이 분명히 틀린 말이 아니고 정확한 말인데 더 정확하게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대놓고 비판하지 않고, 아볼로를 따로 자기들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 더 정확하게 풀어알려줍니다.

 

우리말 성경에 풀어 이르더라하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했다또는 설득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볼로가 이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볼로는 아주 귀한 사람입니다. 사실 학문으로 따지면 아볼로가 아주 높은 사람입니다. 지성인의 대표격인 사람입니다. 어떤 출판사에서 성경공부 책을 낼 때 지성인을 대상으로 한다고 제목을 아볼로 성경공부라고 냈을 정도로 아볼로는 굉장한 지성인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뭘 하는 사람들입니까? 천막 만드는 기술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너무나 겸손하게 아볼로는 천막 만드는 기술자의 말을 듣습니다. 엄청난 지성인이자 지식인이 기술자의 말을 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으로는 자기보다 이들이 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얼마나 귀한 자세입니까? 이런 자세가 바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teachable’하다는 단어입니다. ‘잘 배운다는 뜻입니다.

 

이 시대에 저도 그렇고 사람들이 별로 teachable하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고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경 전문가인데 무슨 기술자가 와서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가르쳐주면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뭘 이야기하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아볼로는 자기보다 훨씬 배운 것이 부족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말을 경청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고칩니다. 정말로 놀라운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며 고칠 줄 아는 사람이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완벽해서 훌륭한 게 아니라, 실수하고 틀렸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고칠 줄 알 때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사실 지난주에 아무도 저에게 이야기하지 않으셨는데, 제가 한 설교를 다시 들어보니까 틀린 내용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아니고 미켈란젤로에 대한 내용 중에 있었습니다.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에 들어가 보면 천정에 엄청난 천지창조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프레스코(Fresco) 기법으로 미켈란젤로가 그린 것인데 엄청난 대작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진도 못 찍게 합니다.

 

그런데 제가 피에타설명을 하면서 미켈란젤로가 원래 그림을 주로 그리다가 조각을 몇 개 안 한 것 중 하나가 피에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제가 기억력이 흐려서 잘못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미켈란젤로는 주로 조각을 하던 사람이었고 그림을 몇 개 안 그렸습니다. 그런데 조각 중에 최고의 작품이 피에타였습니다. , 이렇게 실수를 인정하고 고쳤습니다. 아볼로처럼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음식을 대접하면서, 그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 고난 및 부활에 대해서 잘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지녔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기 때문에 아볼로에게 단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때가 될 때마다 불러서 복음을 가르쳐주고 설명해주지 않았겠습니까? 또 그렇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줄 아는 아볼로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저를 좀 가르쳐주십시오. 더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덕분에 아볼로는 비로소 올바른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3.   아가야로 가서 사역하는 아볼로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자기의 잘못을 고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원래 복음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온전한 복음을 알게 되니까 에베소에 그냥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합니까?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7)

 

아볼로는 아가야로 가려고 합니다. 아볼로가 지금 머물던 에베소는 아시아 대륙에 속해 있는데, 그가 가려고 하는 아가야는 에게 해 건너편 그리스 남부 아가야, 그 중에서도 고린도였습니다.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살다 온 그 고린도입니다. 아볼로가 이때 왜 하필이면 멀리 바다 건너 고린도로 가려 했는가, 본문에는 그 이유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5세기경 사본으로 추정되는 <베자 사본(Codex Bezae)>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에 아볼로가 머물고 있었는데, 아볼로가 전하는 말씀을 들은 고린도에서 온 신자들이 너무 좋아서 우리와 함께 가서 고린도에서도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하고 강권했다는 것입니다. 아볼로가 허락하니까, 27절에 나온 것처럼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 격려하는 편지를 써서 아볼로를 잘 영접해주십시오.’ 하고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아볼로가 거기 가서 잘 사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5세기경에 나온 사본이지만, 학자들에 의해 충분히 타당한 내용이라고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를 방문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아볼로에게 고린도로 함께 건너가서 그곳의 형제자매들을 가르치고 돌보아줄 것을 간청한 제안을 아볼로가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추천서를 써준 겁니다. 그리고 고린도로 건너간 아볼로는 그곳에 정착하여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으로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그가 고린도 성도들에게 어떤 영적 도움을 주었습니까?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28)

 

고린도에는 여전히 예수님을 부정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24절의 내용처럼, 유대인들이 신봉하던 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에 아주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볼로는 얼마 전에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로부터 온전한 복음을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정확하게 연결이 되는 겁니다.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알고 있던 것들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 것이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인용해가면서 여기서 예언된 이 메시아가 바로 예수다. 예수가 바로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다.’라는 것을 아주 논리 정연하게 구약성경을 하나하나 인용해가면서 설명함으로써, 예수님을 부정하던 고린도의 유대인들에게 공개적으로 토론회에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그 아볼로로 인하여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2천 년 전 아주 타락하고 음란한 도시 고린도에 최초로 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2차 전도여행 중에 홀로 아테네에서 고린도를 찾아간 바울은, 그곳에서 16개월이나 머물며 복음을 전했고, 그때 바울과 교제하고 바울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된 사람들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이제 고린도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했다고 판단한 바울은 자신의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파송지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바울을 따라서 길을 떠났으며 바울은 그들을 에베소에 남겨 놓고 떠났습니다.

 

그 후 바울은 수년이 지나서 고린도를 재방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떠나 버린 고린도 교회는 당장 자신들을 인도해줄 말씀 사역자가 사라진 상황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고린도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볼로였습니다.

 

물론 아볼로가 이때 고린도로 감으로 인하여 나중에 고린도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이 일어납니다. 아볼로의 말을 들으면서 아볼로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래도 바울이 최고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나중에 베드로가 와서 말씀을 전하니까 특히 유대인들이 열광합니다. 유대인의 사도 중의 사도인 베드로가 오니까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헬라 사람, 로마 사람, 유대인들이 섞여 있는 고린도 교회였기 때문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베드로)파로 나뉘고, 심지어 저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니까 우리는 저들과 함께 하지 못하겠다. 우리는 그리스도파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파가 갈라졌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바울의 편지에는 설득력이 있고 힘이 있는데, 그가 직접 와서 이야기를 하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고전 3:5, )

 

이것이 바울의 관점입니다. 바울파가 생겨나고 아볼로파가 생겨나는 것에 대해 인간적으로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놀라운 태도를 보여줍니다. ‘나와 아볼로는 하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나와 아볼로에게 적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는 격언의 뜻을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배워서, 어느 한 편을 편들어 다른 편을 얕보면서 뽐내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고전 4:6, )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 아볼파 등으로 사람들이 나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바울과 아볼로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나중에 아볼로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합니다.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내가 그에게 다른 형제들과 함께 여러분에게 가라고 여러 번 권하였지만, 그는 지금, 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때가 오면 갈 것입니다.” (고전 16:12)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3년을 머물면서 그 기간 중에 써서 보낸 편지입니다. 그때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은 때인데도 아볼로는 이미 고린도 교회를 떠나 있었고, 바울은 다시 아볼로에게 고린도 교회에 가서 성도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볼로가 극구 사양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교인들이 너무 미성숙해서 당파를 만들었고, 자기가 감으로써 오히려 파가 갈라짐으로 바울의 사역이 힘들어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볼로는 그런 상황에서 자기가 고린도로 다시 가는 게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거절했습니다.

 

이 얼마나 성숙하고 아름다운 태도입니까? 바울도 너무 훌륭하지만 아볼로도 얼마나 훌륭합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 추종자들이 막 생기는데 그래, 바울은 말도 못하고 별 것 아니며 내가 최고다.’라고 하면서 막 나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그 당시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이름을 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복음을 위하여 하나 되기를 원하는 아볼로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바울도 그러한 아볼로를 계속해서 세워주며 그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아볼로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이유는 복음의 역사를 진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볼로뿐 아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역시 얼마나 귀한 분들입니까? 세상 기준으로는 천막제조업을 했으니 그리 큰일을 한 것 같지 않고 적은 일을 한 것 같지만, 교회 역사뿐 아니라 세계 역사를 바꾸는 데 사용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전파에 디딤돌을 놓아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까? 다른 데 이사를 가서 교회를 찾을 때 좋은 교회를 찾아야 하는데, 그럼 도대체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교인 수가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배당이 큰 교회? 헌금이 많이 나오고 재정이 많은 교회? 이웃 사랑을 위해 헌금의 50%를 사용하고, 모든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교회? 그렇게만 하면 좋은 교회입니까?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훌륭한 일이고 어느 정도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좋은 교회는 그런 기준을 초월합니다. 성경적으로 좋은 교회란 바로 이런 분들, 즉 아볼로 같은 사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사람이 많은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손과 발을 움직여 복음을 위해 내어놓고 헌신하는 사역자가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구원에 감사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자신의 손과 발을 내어드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2013428, 영국 동북부에 위치한 선덜랜드(Sunderland)라는 곳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Marathon on the North)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1등으로 들어온 단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5천 명 정도 되는 참가자들이 전부 실격된 마라톤이었습니다. 경기 도중에 뛰다가 한 명만 들어오고 나머지는 다 기권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완주를 했는데도 실격 처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 하면, 1등과 상당한 격차를 두고 달리던 2등이 실수로 잘못 보고 다른 길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코스를 이탈한 것입니다. 3등도 바로 뒤에 좇아가다가 그리로 가고, 나머지 5천명도 다 그리로 갔습니다. 앞사람만 따라가다가 다 경로를 이탈해버린 것입니다.

 

2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그래도 다행히 다시 돌아와서 골인 지점을 제대로 찾아 들어가긴 들어갔습니다. 그 뒤를 따르던 3등과 나머지 5천 명의 선수들도 다 제대로 다시 돌아와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탈해서 달린 거리가 마라톤 정규 코스 42.195킬로미터에서 불과 264미터가 모자라서, 모두가 실격 처리된 것이었습니다. 그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리고서도 앞사람을 잘못 따라간 것 때문에 불과 264미터가 모자라 실격당한 5천 명의 선수들은 얼마나 황당하고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 모든 마라토너들 중에서 1등으로 들어온 단 한 사람만 정규 코스를 달렸는데, 그가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규 코스의 깃발과 앞서가는 선도 차량을 올바르게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모두 앞에 가는 사람들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권력을 얻고 싶은 사람은 권력자를 따라가고,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부자를 따라가고, 학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학자를 따라가고, 스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앞서가는 스타를 따라갑니다. 각 분야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뒤따라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앞선 사람을 따라가더라도, 앞서서 달려가고 있는 그 사람이나 뒤따라가는 사람이나 최종 골인 지점이 다 낭떠러지라면, 잘못된 길이라면, 그 무슨 허망한 일입니까? 한평생 수고하며 열심을 다해서 살았는데, 영원한 생명의 정규코스에서 벗어나 실격이라고 판정이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정확히 제대로 가야 합니다. 비슷한 길이 정확한 길이 아닙니다. 비슷해 보이는 길이 지금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길은 한 길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시며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분이심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냥 앞서만 가시는 분이 아니라, 앞서 가시면서 우리가 길을 예비해주는 분이십니다. 앞서 가시면서 다 예비해놓으시고 그리로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따라갈 때에만, 우리의 짧은 인생이 영원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따라갈 때에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달려야 할 정규코스에서 이탈하지 않고 완주하여 마침내 승리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따라갈 때에만, 이 땅에서 우리의 호흡이 멎는 순간 실격!’이라고 처리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내 삶은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누구를 막 정신없이 따라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정신없이 따라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앞서 가시며 내 길을 이미 예비해놓고 계시는 하나님을 잘 따라가고 있습니까? 앞서 가시며 길을 예비해놓으시는 하나님을 잘 따라갈 때, 우리 모두가 각자 바로 이 아볼로 같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이, 사도 바울 같이,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서 복음을 위해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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