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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3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0

최악의 상황에서 일어난 최고의 역사

(사도행전 1625~34)

 

[들어가는 말]

 

비행기 여행을 다들 해보셨을 겁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갈 때 종종 굉장한 구름이 몰려오고 폭풍이 불어서 기체가 심하게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또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거나 폭설이 내려서 비행기로 가야 하는데 여행에 지장이 올 때도 많고, 특히 이륙하기 전에 일기가 그렇게 나쁘면 두려움까지 느낍니다.

 

2년 전 제 아들의 중학교 졸업 기념으로 뉴욕 여행을 둘이서 갈 때 비행기를 타려 하는데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온통 새까만 구름으로 뒤덮이고 엄청난 비바람이 불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뜨지 못하고 연기되고 연기되고 또 연기되다가 결국은 취소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출발하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새까만 구름이 있고 암흑 같은 일기일 때는 세상에서 태양이 사라진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태양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태양이 자리를 옮긴 것도 아닙니다. 해는 창조 때부터 지켜 온 자리에서 변함없이 빛을 내고 열을 내고 있습니다. 태양이 사라지거나 자리를 이동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늘을 뒤덮고 있는 구름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는 해를 잠시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땅 위에 폭풍우가 불고 폭설이 내린다고 해서 해가 영영 사라져 버렸다고 속단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우리의 계획이나 의도와는 달리, 폭풍우가 불거나 폭설이 내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느냐?’라고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외치게 됩니다. 그러나 태양이 사라지거나 이동하지 않는 것처럼,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도 사라지시거나 그 거처를 옮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디에 있든 언제나 변함없이 나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 마음이 죄와 불신의 구름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못 보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의 구름, 불신의 구름을 걷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눈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느끼고, 또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 삶에 불어 닥친 폭풍우나 천둥번개나 폭설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1.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역사

 

1)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5)

 

시간이 어느 새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바울과 실라가 가만히 있다가 한밤중에 다른 죄수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고 자니까 시끄럽게 해서 깨우려고 기도하며 찬송을 부른 것이었겠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한밤중이라는 말은, 바울과 실라가 너무 혹독하게 매를 맞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 있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간신히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바울과 실라가 심한 폭행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와 함께 마게도냐의 첫 성(가장 중요한 성)인 빌립보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강가에 갔다가 루디아라는 여성을 만나고, 루디아와 가족들이 모두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에서 만난 귀신 들려 점을 치며 주인들에게 돈을 벌어주던 여종 하나를 만나는데, 괴롭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여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줍니다그런데 그 여종을 소유하고 있던 주인들은 여종의 회복과 치유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돈벌이가 중단된 것에 분개해서 바울과 실라를 고발합니다. 사실 한 영혼이 이렇게 회복된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복음서에 비슷한 사건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거라사라는 갈릴리 호수 건너 동쪽의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고쳐주시니까 사람들이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아니고, 너무 두려워서 빨리 떠나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이 한 영혼이 고침을 받은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 이 영혼의 치유에는 관심이 없고, ‘내 돈벌이가 끊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며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한 영혼의 온전한 회복과 치유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에게 이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만 가지고 다 판단을 합니다. 자기들의 이익이 끊어지니까 분개해서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여 잡히게 합니다. 그렇게 이들은 체포되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던져집니다(19).

 

19절에서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먼저 끌고 간 곳이 장터라고 되어 있는데, 요즘도 그리스 등에 가면 아고라(agora)’라는 곳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market place인데, 시장을 끼고 있는 광장 같은 곳입니다. 이탈리아 같은 곳에 가면 도시 가운데 항상 광장 같은 데가 있고 주변에 상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운집할 수 있는 광장, 시장과 함께 있는 광장이 장터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저잣거리입니다.

 

그리스어인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시민들이 모여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집회장으로 쓰인 공간이고, 역사 기록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이 광장은 많은 철학자가 군중 앞에서 철학을 강연하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들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도 바로 이런 장터(아고라)에서 청중 앞에 자신들의 사상을 강연을 했던 그런 곳입니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를 이리로 끌고 와 관원들에게 넘겼습니다. 19절에는 관리들이라고 나오는데, 헬라어로 릭토르(lictor)’라는 사람들입니다. 릭토르는 방망이를 여러 개 들고 다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방망이가 있는데 하나가 아니라 다발로 차거나 등에 매고 다녔습니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이나 치안을 유지하는 보안관 같은 사람입니다. 조금 계급이 높은 사람은 여러 개 찬 방망이 속에 도끼를 같이 매달고 다녔습니다.

 

로마 정부가 세계를 제국화하고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사회질서의 유지입니다. 어느 곳을 정복했는데 반란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굉장히 애를 썼습니다. 특히 다른 범죄보다 사람들을 선동하고 폭동을 일으키며 사회질서를 혼란하게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엄벌에 처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주 반란을 많이 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반역자들을 십자가에 많이 처형했습니다.

 

현장에서 조금만 소요가 일어날 조짐만 보여도 릭토르가 방망이 여러 개를 휘두르면서 사람들을 때리고 제압하도록 권리를 부여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런 관리들에게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넘겼고, 그들은 또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갔습니다(20). 여기서 상관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스트라테고스(strategos)’인데, 빌립보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에 대한 호칭입니다. 대개는 두 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 집정관들도 유대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정당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바울과 실라의 국적을 알아보지도 않고 당연히 유대인인 줄 생각하여 옷을 찢어 벗긴 후 매로 치게 했습니다. 무자비하게도,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맨 몸을 몽둥이로 치게 한 것입니다.

 

죄수의 옷 위로 매질을 하면 아무리 옷이 얇아도 옷이 일종의 방어막 역할을 해줍니다. 그런데 옷을 벗긴 맨몸에 매질을 가하면 얼마나 아픕니까? 등의 맨 살에 매질을 하거나 채찍질을 하면 금방 살이 터질 뿐만 아니라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철철 흐르며 뼈까지 으스러질 정도가 됩니다. 그래서 집정관들의 명령에 따라 관리(릭토르)들은 바울과 실라의 맨몸을 때렸는데 그것도 많이때렸습니다(23).

 

구약성경 신명기 25(3)에 보면 사람을 때릴 때 40대를 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모세오경의 다섯 번째 책인 신명기에 40대까지만 때리라고 되어 있는데, 사람이 감정이 일어나고 악에 받치면 자기도 모르게 제한 없이 때리게 됩니다.

 

우리가 종종 오해하는 것으로, 율법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갚으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눈 하나에 눈 하나, 이 하나에 이 하나를 갚으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감정이 폭발하면, 자기는 한 대 맞았는데 두 대, 세 대, 열 대, 100대를 때리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한 대를 맞았으면 한 대만 갚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보호하는 법입니다


여기(신명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악에 받치면 40대가 아니라 100, 천 대까지, 아니 죽을 때까지도 때릴 수 있기 때문에 40대까지만 때리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이 잘못 셀 수 있기 때문에 39대까지만 때렸습니다. 혹시 40대가 넘어가면 자기가 율법을 범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유대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로마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곳 빌립보는 로마 직할시이고 마게도냐에 위치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많이때렸다는 것은 바울과 실라가 40대를 넘는 엄청난 매질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냥 무자비하게 무제한적으로 때렸습니다. 그렇게 심하게 때린 다음에 집정관들이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가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간수에게 두 사람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24절에 보면 깊은 옥에 가두었다고 나오는데, 로마 정부는 세 종류의 감옥을 운영했습니다. 첫째, 잡범 및 일반 범법자들이 들어가는 감옥을 코모리어라고 불렀습니다. 둘째, 그것보다 조금 더 중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들어가는 감옥인 인테리어입니다. 셋째, 지하에 굴을 파서 만든 플리아놈이라는 감옥입니다. 이것을 하옥 또는 깊은 옥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는 강력범이나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자를 가두는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 지하 감옥(24: “깊은 옥”)에 바울과 실라를 가둔 것입니다. 아주 중범죄,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자로 취급을 당한 것입니다. 단지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것 밖에는 없는데 무슨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처벌을 당하고 엄청난 매질을 당한 후 여기 갇혔으니까, 이것이 얼마나 불의한 재판이었고 얼마나 불법적인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간수는 바울과 실라의 발에 차꼬까지 채웠습니다(24). 이 차꼬는 무슨 장식처럼 팔찌나 발찌 차듯 하는 게 아닙니다. 죄수의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두 다리를 쫙 벌려서 고정시키는 형틀입니다. 그것도 쇠사슬이 벽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무자비한 것이 이 차꼬입니다. 그렇게 벽에 달려 있으니까, 차꼬를 찬 사람은 등을 벽에 대고 편하게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주 보기에도 좋지 않은 모습으로 다리를 죽 벌리고 매달려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때 바울과 실라는 어떤 상태입니까? 엄청난 매질을 당해서 등이 완전히 찢어지고 피가 철철 흐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두 다리를 벌려서 누워 있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 등이 다 찢어졌는데 어떻게 눕습니까? 엎드려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운 상황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2)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바울과 실라

 

생각해보십시오. 하루 종일 매를 엄청나게 맞아서 피가 막 흐르고 살이 찢어진 상태입니다. 바울은 이전에도 여러 번 맞았기 때문에 상처가 조금 아물다 또 터지고 염증이 나는 상황이니, 얼마나 고통이 컸겠습니까? 게다가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고, 다리를 찢어서 차꼬까지 채워놓았습니다. 누울 수도 없습니다. 엎드려야 합니다. 너무 비참한 상황, 아무 희망이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우리가 보통 때도 기도하지만, 특히 이런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길이 다 막히면 간절히 부르짖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바로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물론 안 믿는 사람도 기도합니다. 자녀가 병에 걸리면 ‘(누군진 몰라도) 살려주세요.’ 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찬송이라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찬송은 일반적으로 형통할 때, 평안할 때, 마음이 괜찮을 때 나옵니다


여러분, 마음이 너무 괴롭고 분통이 터지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찬양이 나오는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참 힘듭니다그런데 본문에는 바울과 실라가 그런 상태에서 갇혀 있는데, 겨우 한밤중에 정신을 차리고 한 것이 기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기도는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찬송까지 나옵니까? 기도와 찬송이 같이 나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한글 성경에는 시제가 정확히 구분이 안 되도록 번역이 되어 있는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기도했다찬송했다에 시간차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한참 한 다음에 찬송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요예배 때처럼 찬양도 하다가 기도도 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 한참을 기도한 다음에 조금 후 찬양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절히 기도를 하고 나서 그 결과로 찬송이 나온 것입니다.

 

좋은 예가 구약의 한나라는 여인입니다. 사무엘상에 한나라는 여인이 나오는데, 아이가 없어서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영어 이름이나 한국어 이름으로 인기가 좋은 여자아이 이름이 한나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출산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저주로 태가 막힌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에 한나는 아주 괴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나가 자기의 괴로움을 안고 성막으로 들어가 기도하는데, 얼마나 심하게 기도했는지 통곡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없어서 괴로운 심정으로 기도하던 한나의 기도가 바뀝니다.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한나가 처음에 성소로 가서 기도하게 된 계기는, 자기가 아들이 없고 너무 비참한 상황이었으며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곡하며 울부짖었는데, 그런 기도를 하다가 영적으로 뻥 뚫리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심정이 통했다는 표현을 쓰는데, 하나님과 마음이 통한 것입니다. 자신과 같이 비천하고 가련한 여인이 자식 하나만 없어도 이렇게 괴로운데, ‘지금 이 상황에 하나님의 마음을 백성들에게 대신 전해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정말 심각하고 기가 막힐 상황이구나!’ 하는 것을 기도 중에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는 사사 시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나타나지 않던 시대입니다. 그때 제사장이 엘리였고 그가 사사 역할도 했는데, 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영적 지도자라였더라도 하나님과 전혀 교제가 없고 통하지 않는 때였습니다. 그럴 때 한나가 자신의 괴로움 때문에 성막에 와서 기도를 했는데,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한나가 단순히 하나님, 내게 아들을 주시면 바칠 게요.’라고 자기가 원하는 아들을 주시니까 바치겠다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대언할(대신 전해줄) 사람이 없다는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그 마음을 깨닫고 내게 아들을 주시면 내 아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기도가 바뀝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찬양과 감사로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종종 있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때가 많습니다. 살다가 어떤 힘든 문제가 닥쳤을 때,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새벽에 나와 무릎 꿇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기도를 한참 하다 보면 나를 걱정하게 만들고 무겁게 만들고 불안하게 했던 그 문제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그러면 제가 금방 깨닫습니다. ‘, 해결됐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며 끝내고 내려옵니다. 그러면 정말 얼마 안 되어 그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되는 때가 대부분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닌데, 기도를 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고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다면 아직 해결이 안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평안이 임할 때는 문제가 해결됩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그래서 끝은 항상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고 나서 내려와보면 정말로 다 해결됐습니다.

 

감옥에 던져진 바울은 복음을 전하겠다고 열심을 낸 것밖에는 없는데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니까 처음에는 하나님,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며 항변하는 식의 기도도 분명히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놓고 하나님,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관심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이런 상황에서 기도하다 깨달은 것이 이것입니다. 지금 이들이 아시아(터키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는데, 1차 때 갔던 곳을 지금 2차 때 또 가려고 하다가 못 하게 막으셔서 이 빌립보에까지 온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마게도냐의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곳으로 부르셨고, 마침내 복음이 로마까지 가도록 하시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 자신들의 매 맞고 갇힌 것이 복음 전파의 불씨가 되고, 박해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울과 실라는 이때 기도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다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니까, ‘하나님, 저희가 계속 복음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때리고 가둔 사람들도 주님의 복음을 듣고 믿게 해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환난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가 끝난 다음 찬송이 나온 것입니다.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6)

 

갑자기 큰 지진이 감옥을 강타합니다. 그와 동시에 감방과 감옥의 문들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의 매인 것과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감옥을 뒤흔든 이 지진은 우리가 흔히 아는 지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지진이 나면 어떻게 됩니까? 바닥이 갈라지고 벽이 무너져 내리며 위에서 돌과 바위들이 떨어져 내립니다. 특히 차꼬가 잡고 있기 때문에 도망갈 수도 없고 거기서 즉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터가 요동쳤지만 바닥이 갈라지거나 벽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던 감방과 감옥의 문, 그리고 바울과 실라를 속박하고 있던 차꼬가 열리고 벗겨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적 지진이었다면 거기 있던 사람들은 다 죽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로 사람들의 차꼬가 다 풀어진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지금 빌립보 사람들은 모두 한밤중의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심지어 바울과 실라를 철통같이 지키라는 엄명을 받은 간수도 잠에 곯아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믿었던 하나님은 시편 121편의 고백처럼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그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를 위해 정확히 일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삶도 똑같습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좋은 일, 괴로운 일, 아주 괴로운 일)이 있는데, 우리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이 모두 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지금 한밤중의 감옥에 엄청난 매질을 당하고 살이 찢긴 채 갇혀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우리도 바울과 실라처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에게서 찬양이 나오고 하나님께서 놀랍게 인도해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빌립보 간수와 가족들의 구원

 

1)  간수와의 만남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옥의 터가 움직이면서 모든 옥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다 벗겨졌지만 바울과 실라와 죄수들이 도망을 가지 않은 것입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7-28)

 

이 말이 무엇입니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한 것이 단순히 자기들이 풀려나기 위해서 기도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것을 위해 기도했다면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사슬이 풀렸을 때 바로 뛰쳐나가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다른 죄수들도 전율이 일어나는 가운데 거기에 같이 있었습니다. 지금 바울과 실라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죄수들도 다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기도하고 찬송한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에서 자기들은 뭘 했겠습니까? 욕하고 저주를 했습니다. 아주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저질스러운 욕과 저주를 퍼붓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기도했습니다. 축복까지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때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 사람들 덕분이라는 것을 죄수들이 다 느꼈습니다. 그때 잠결에 옥문이 열린 것을 발견한 간수는 당연히 죄수들이 다 도망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징계가 두려워서 차라리 자결하려 시도할 때 바울이 그를 제지시킵니다.

 

일반적으로 평소에 하는 기도 내용이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면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잡고, 좋은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고 편안하게 돈 많이 벌며 살고, 지금 100세 시대와 앞으로 120세 시대를 맞이하여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기도를 합니다. 그런 기도가 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프면 병 낫기를 같이 기도해야 하고, 좋은 길이 열리도록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하나입니다. 자기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갇혔는데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이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의 목표입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가 그것을 깨닫기 원합니다.’라는 것이 바울의 기도였습니다. 지금의 고난과 어려움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는 확신했고, 그래서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형통하기를 원합니다. 예수 믿으면 형통한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이 형통입니다. 단순히 나에게 잘되고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형통입니다


그러니까 형통은 내가 원하는 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그것이 고난의 모습이고, 불편하고 찌들고 모자라고 부족한 것으로 와도, 그러한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가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역사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진짜 성경이 말하는 형통입니다.

 

아무리 좋은 게 있어도, 또 그리로 제일 빨리 달려가도, 그 끝이 천길낭떠러지라면 그것이 형통입니까?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세계 최고의 가장 비싸고 빠른 자동차를 타고 맹렬하게 달리는데 낭떠러지로 가는 길이라면 절대 형통이 아닙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이 형통입니다.

 

 

2)  간수의 결정적인 질문

 

감방 밖에서 지키던 간수가 자결하려는 것을 본 바울은 우리가 감방 안에 그대로 있으니 자살하지 말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29)

 

감옥 안에서 들려오는 예상치 못한 바울의 목소리에 간수가 깜짝 놀랐습니다. 다 도망간 줄 알았는데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부하에게 등불을 달라고 하여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방금 자신이 헛것을 들었는지 아니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들어가서 불을 비추었습니다. 그랬더니 차꼬에서 풀려나서 의연하게 앉아 있는 바울과 실라가 보이는 겁니다.

 

이것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얼마든지 감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인데 그대로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 알 수 없는 바울과 실라에게서 나오는 의연함과 권위에 간수는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서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에게 엎드려 예를 갖춥니다.

 

사실 이 감옥에 갇힌 죄수들은 다 흉악범들이고 반역자들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탈옥하려고 하는 사람들임을 간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간수를 할 정도면 간수장이라고 볼 수 있고, 로마 군인 출신이며 장교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인데, 얼마든지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거기 앉아 있는 바울과 실라의 모습과 권위에 압도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어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난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서 데리고 나갑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0)

 

나중에 보면 간수는 그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선생들(sirs)”이라고 불렀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퀴리오스주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를 때 사용되는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붙일 수 있는 가장 높은 호칭이었고, 황제를 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는 질문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우리가 이 상황이라면 바울과 실라에게 무슨 말을 먼저 하겠습니까? 저라면 이럴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자결하지 않도록 막아준 바울과 실라에게 제가 실수하지 않도록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또는 궁금해 하는 마음으로 예의를 갖추면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여기 그냥 남아 계십니까?’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큰 충격과 감동 속에서 미안한 마음으로 , 제가 아까 낮에 두 분을 투옥시키고 두 발에 차꼬를 채울 때 혹시라도 제가 좀 아프게 했다거나 결례를 행한 것이 있다면, 제 직책상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양해해주십시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사과의 말을 건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간수는 달랐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돌발적이고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 그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선생들이여(주님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겠습니까?’였습니다. 구원에 관한 질문입니다. 물론 자기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빠져나갈 수 있겠느냐는 의미도 있겠지만, 이렇게 정확히 말한다는 것은 구원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이것을 번역하면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이 간수의 마음속에 평소 구원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묘지에서 그저 한 줌의 흙으로 끝나 버리는 인간의 육적인 삶 너머를 생각했습니다. 특히 그가 군인이었던 사람이니까 전쟁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얼마나 많이 봤겠습니까? 자기가 죽인 사람도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죽고 그냥 끝나는 것인가?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가?’ 또 죽은 사람들 중에 어린 병사들도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젊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 것인가? 끝나면 뭔가 그 뒤에도 있는 게 아닌가? 영원한 삶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어렴풋이 생각은 해봤지만 어떻게 하면 그리로 갈 수 있는지 그 길은 알지 못했습니다.

 

누구에게 질문을 해봐도, 우상의 도시이자 황제의 도시인 빌립보에서 영원한 삶을 향한 구원의 길을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순간 이런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뭔가를 알 수도 있겠다.’ 하는 마음으로 내가 무엇을 하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결정적인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질문을 평소에 품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한밤중에 다른 말만 하다가 끝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중요한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일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구원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어떻게 하면 나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바울과 실라에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구원에 대한 질문이 있으시다면 대충 하고 넘어가거나 아니면 대강 살다가 어떻게 되겠지하고 생각하지 마시고 구체적으로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심각하게 나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교회에 나오면 성경에서 우리가 죽으면 그냥 끝나는 게 아니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데, 그게 진짜인가?’부터 시작해서 이것이 정말 진리인지 공부도 해보시고 연구도 해보시고 알아보시고 심각한 질문을 해보시면서 그 과정을 거쳐보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나는 그런 거 안 믿어.’라고 하실지 몰라도, 안 믿는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안 믿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심각하게 알아보는 이 간수와 같은 태도가 필요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놀랍게도 저 멀리 시리아 안디옥에 있던 바울을 부르셔서, 그것도 유럽 대륙으로 갈 마음도 없던 사람을, 아시아로 가는 길을 막고 막고 막으셔서 드로아까지 오게 하시며, 거기서 환상을 보여주셔서 마게도냐로 건너오게 하시고, 빌립보에 오게 하시고, 심지어 뜻하지 않은 고난을 당하여 감옥에 갇히게 하신 이 모든 일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프로그램 해놓으시고 컴퓨터처럼 진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1300마일이나 되는 이 긴 여정을 돌고 돌면서 여기까지 와서, 특히 이 빌립보 지하 감옥에 수감되게 하신 것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던 이 간수의 질문에 대답을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전율하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일입니까?

 

 

3)  주 예수를 믿으라

 

이 근본적인 질문에 바울과 실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답을 해줍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1-32)

 

아주 단순한 대답인 것 같지만 복음의 모든 것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간수에게 그냥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대답했습니다. 방금 주님들이시여라고 말한 이 사람에게 우리가 주가 아니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퀴리오스는 예수님이시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 호칭이 사람에게 사용될 때 황제에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최고의 호칭이 됩니다. 집안에서는 작은 주라는 의미로 노예가 주인을 퀴리오스라고 불렀습니다.

 

도망을 갈 수 있었음에도 가만히 앉아 있던 바울과 실라에게서 나오는 권위와 의연함에 압도당하여 그가 그들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노예가 주인을 섬기듯 내가 섬길 만한 분들이 당신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너의 주인이 아니다. 내가 너의 주인이 될 수도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주인이 되실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라는 말 앞에 정관사를 붙였습니다. ‘그 주님’, ‘유일하신 주님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간수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자기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놀랍게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고 대답했습니다. ‘네 집이란 함께 사는 사람들, 즉 가족들을 말합니다. 집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당신 한 사람뿐 아니라, 당신의 가족을 포함하여 모든 주변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 하고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한 사람만 대표로 믿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저절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슨 패키지 딜(package deal)로 한 사람이 믿으면 ‘Buy One Get One Free’라는 식으로 다 같이 들어가는 그런 게 아닙니다. 헬라어를 보면 주어가 너와 네 집인데, 문법적으로는 2인칭 복수형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동사도 당신들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복수형이 되어야 하는데 헬라어 원어에는 단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무조건 한 사람이 믿으면 다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같이 잘하자고 하면 내 아내가 너무 잘 믿습니다. 천국 갈 때 내가 아내의 치맛자락 잡고 가면 됩니다.’라고 합니다. 마음은 좋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부모님이 너무 잘 믿으셔서, 내 자녀가 너무 잘 믿어서, 내 배우자가 너무 잘 믿어서,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잘 믿어서 나도 간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단순히 교회에 왔다 갔다 하니까 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니까 나도 가겠지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각자가 주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4)  죄와 사망의 감옥에서 벗어난 기쁨

 

간수와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결과를 33-34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33-34)

 

바울과 실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한 간수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음으로써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꾸어 표현하면,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그동안 매여 있던 죄와 사망의 속박과 감옥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날 밤 바울과 실라가 육적인 감옥에서 벗어났다면,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영적인 감옥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이 죄와 사망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자신들의 능력이나 의지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물론 본인들이 은혜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믿음으로 붙들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바울과 실라가 없었더라면, 그 한밤중에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죄와 사망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은혜를 입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바울이 귀신 들린 여종을 여러 날 계속 만났을 때 굉장히 괴로워했습니다. 그 불쌍한 여인을 더러운 귀신의 속박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그녀를 이용해서 돈을 벌던 주인들에게 핍박받을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기로 결단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불쌍한 여인으로부터 더러운 귀신을 쫓아냄으로 귀신이라는 감옥에서부터 그 여인을 해방시켜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과 실라는 이런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정식 재판도 못 받고 맨몸으로 심한 태형을 당하고, 지하 감옥에 갇혀 두 발마저 차꼬에 매여 엎드려야만 했던 아주 불편하고 괴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한밤중에 이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족들까지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몸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힘으로,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죄와 사망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며 복음의 원리입니다.

 

죄와 사망의 감옥으로부터 인간을 벗어나게 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이 땅에서 십자가 죽음의 속박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순교라는 속박을 스스로 당하며 스스로 자신들을 감옥에 내어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죄와 사망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쌍한 여종을 귀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준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 깊은 빌립보 감옥의 매임을 기꺼이 당함으로써, 참 역설적이게도 그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죄와 사망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언어와 문화와 모든 환경이 낯선 땅에 가서 자발적으로 헌신과 섬김의 매임을 당했기 때문에, 오래 전 그런 선교사님들 덕분에 우리 민족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져서 우리도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죄와 사망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가 복음을 위해 자발적으로 고난을 감수하고, 갖은 불편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일을 위해 애쓰며 나아갈 때, 또 다른 누군가가 죄와 사망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 3.1 운동 100주년을 막 지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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