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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19일 수요예배

치유기도 11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

(고린도후서 103~6)

 

1.   마음의 병

 

지난주 컨퍼런스에 다녀올 때 공항에서 커피를 사 마시려고 줄을 섰는데, 제 앞에 한 젊은 남자가 서서 주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키가 더 크고 호리호리하고 수염도 기른 잘생긴 청년이었는데 뭔가 불안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고, 다시 보니까 신발 없이 양말만 신은 발을 쉴 새 없이 계속 떨면서 바닥에 쿵쿵거리고 있는 겁니다. 옷도 히피 스타일로 입고, 뭔가 말하는 것도 행동도 이상했습니다. 괜찮은 외모에 키도 훤칠한 청년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좀 안타까웠습니다.

 

그와 같이 요즘 어디를 가든 정신적인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한 것을 느낍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사람들을 소리 없는 절망으로 몰아가는 마음의 병 때문에 감정적, 정신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감정적, 정신적인 마음의 병은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만 아니라 아주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종종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원인이 확실하지 않은 만성질환, 우울증, 공황장애, 불면증과 같은 정신질환부터, 알코올, 마약, 도박, 게임, 성 중독과 같은 중독 증상, 그리고 분노 조절 장애와 마음의 쓴 뿌리로 인한 폭력성까지, 그 증상이 아주 다양합니다.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더라도 자주 영적으로 눌리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며 쉽게 평안이 깨어지는 성도들이 꽤 있는데, 말씀을 읽고 기도와 예배를 드려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더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몇 년 전에 나왔던 <마더 테레사의 편지>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인도의 극빈 지역에서 청빈하고 헌신된 삶을 살던 마더 테레사의 인생을 토대로 한 영화입니다. 예수님의 본을 받아 고귀한 헌신의 삶을 산 마더 테레사였지만, 수녀원을 나와서 독립적으로 임종자의 집을 시작하면서 영적, 감정적 눌림이 시작됩니다.

 

그런 증상이 심해지면서, 가까운 사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테레사 수녀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자신이 버림받은 것 같이 느껴진다고 언급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논란이 되어, 로마 가톨릭에서 마더 테레사를 성인으로 추대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런 고통을 겪게 된 원인을 추정할 만한 단서가 영화에 나옵니다. 마더 테레사가 죽어가는 콜카타의 인도 사람들에게 사랑과 안식을 누리게 해주기 위해서 임종자의 집을 세울 장소를 물색했는데, 좀처럼 구하지 못하게 되자 이전에 칼리 사원으로 사용했던 버려진 건물에서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칼리란 여성 에너지의 상징으로 죽음의 신이며 힌두교의 샤크티파와 불교의 밀교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칼리는 인도 전역에서 두루 숭배되는 죽음의 신이며, 그 중에서 테레사 수녀가 있었던 콜카타의 사원이 가장 유명합니다. 칼리 사원에서 100년 전에는 아이들을 잡아서 목을 잘라 바쳤다고 하는데,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영국이 그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 후부터 짐승을 제사로 바쳤는데, 지금도 제사를 위해 염소의 목을 치는 끔찍하고도 피 비린내 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영적인 일을 잘 이해합니다. 셈족의 후예인 동양 사람들은 영적인 부분이 발달했습니다. 세계 4대 종교의 발상지가 모두 동양이라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유교 모두 동양입니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비교적 이성적이라서, 철학, 과학, 신학적 교리 등이 서양에서 발달했습니다.

 

알바니아 계의 유고슬라비아 출신이었던 테레사 수녀도 서양인으로서 이런 영적인 부분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에서는 다소 각색이 되었겠지만, 테레사 수녀가 칼리 사원 자리에 임종자의 집을 시작하고 칼리 사원을 드나들면서부터 그녀의 영적, 정신적 고통이 시작된 것은 분명합니다.

 

테레사 수녀처럼 감정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덜어주고 도와줄 사람들을 찾아다니지만 쉽게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런 교인들을 돌봐주는 사역자들도 엄청난 에너지 사용에 따른 탈진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중 하나는 이런 영적, 감정적, 정신적 문제를 가진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고, 그 원인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 그 중 태반이며 심지어 사역자들조차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환경을 통해 영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타종교 믿었든지 우상숭배를 했던 장소에서 살게 되거나,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도 영적인 영향을 받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받기 이전에 심겨진 세속적 가치관과 인본주의에 기초한 생각 체계의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빛 가운데 나가려는 것을 방해합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할 정도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7:15, )

 

로마서 7장은 몇 주 전 내면아이(inner child)’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내면아이의 상처의 문제인 것도 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이 영적인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교회를 잔멸하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고, 넘치는 혈기와 유대교에 대한 열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200마일도 넘는 거리를 달려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강한 추진력과 목표 지향적인 성향이었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애 말년에 쓴 로마서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함께 떠났던 마가가 도중에 돌아가 버린 일로 바나바와 다투게 됩니다. 그것은 2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 예루살렘 교회에 헌납할 정도로 헌신된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사울의 회심을 의심하며 경계할 때 그를 보증해주며 도와준 인물입니다(9).


바나바는 초대 교회의 아주 헌신된 일꾼이었고 사울까지 도와준 사람입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는 별명이고 원래 이름은 요셉인데, 별명이 이름이 될 정도로 바나바는 관대한 성품과 훌륭한 믿음을 지녔으며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11:24).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할 정도로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에게 마가는 조카이기도 했지만, 이전에 실패했던 마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 2차 선교여행에도 그를 데려가자고 하는 과정에서 바울과 크게 다툽니다(15:39). 바울은 결국 바나바와 헤어지고 실라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강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바울에게는 강한 자아와 혈기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나중에 두 사람이 화해한 증거가 성경에 나옵니다. 이것은 사탄의 방해였을 수도 있고 바울의 강한 성격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연약함까지 바꾸셔서 선하게 인도해주셨습니다. 바울이 그런 불굴의 의지와 추진력으로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룬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기질과 성격이 그에게 연약함이었던 동시에 치유가 필요한 영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며,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십대의 나이 때부터 떨어져 살았습니다. 또 헬라 지역은 길리기아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헬라 지역이었지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살았다고 했으니까 얼마나 강한 유대인의 정체성과 자부심으로 살았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상처로 남은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7:22-24, )

 

 

2.   진리의 빛을 차단하는 견고한 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어두움과 죄악 속에서 상처받고 신음하는 우리를 치유하고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라고 한 다음 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까 그렇게 해주신다고 찬양을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후 5:17, )

 

예수님을 처음 믿고 성령을 받으면 놀라울 정도로 생기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생기 넘치게 살아가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원하시는데, 슬프게도 많은 경우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현실은 그 반대가 됩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예수님을 닮아가기보다는 오히려 바리새인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크리스천 부부와 비신자 부부의 이혼율이 거의 비슷하게 조사되고 있습니다. 한국도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목회자의 스캔들은 교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가십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이 우리를 아주 슬프게 합니다.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데, 인격과 성품이 변화되지 않고 습관적인 죄와 중독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분명히 예수를 잘 믿는 사람 같은데 엉뚱한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갑자기 사라지거나 갑자기 가정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LA 같은 곳에서는 갑자기 사람이 찾아서 어디 갔나 하고 찾으러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거기 있다고 합니다. 도박에 빠져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 누구나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고 주님의 은혜를 맛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 이후 영혼의 깊은 밤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이 치유가 필요한 순간인 것입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먼저, 죄에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의지의 연약함이 나타납니다. 또한 쉽게 거짓을 진리로 착각하게 만드는 생각의 왜곡이 일어납니다. 분노와 두려움, 정욕과 충동을 통해 죄 가운데로 이끌어가는 감정의 혼돈도 일어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잘못 때문이기도 하지만 육체적 고통을 주는 몸의 질병도 발생합니다.

 

이런 증상이 진행되다가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과 육신이 묶여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 영역을 우리는 내면의 견고한 진(stronghold)’이라고 부릅니다. 견고한 진은 새로운 삶을 공부할 때 다루는데, 우리가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될 뿐 아니라 진리의 빛을 차단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고통 속에 살아가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은, ‘생명의 삶을 들으신 분들 중에 더 이상 안 나가고 새로운 삶을 하지 않은 분들이 꽤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을 통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지 배웠지만, ‘새로운 삶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 천국의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를 배워야 하는데, 그것을 안 배우니까 이전과 비슷하거나 안 믿는 사람과 비슷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견고한 진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견고한 진은 영적으로 깨부수어야 하는데, 성령의 검, 곧 말씀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깨뜨려 부술 수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싸움은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3-4)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깊은 차원의 치유를 해야 하는 이유는, 악한 영들의 활동에서 이런 것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의 영 안에는 악한 영들이 절대 들어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은 깨끗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에서 배우듯이, 악한 영들이 우리의 혼과 몸에 들어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혼(soul)지정의의 영역, 즉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숲속에 악령들이 자기 모습을 감추고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식, 또 잘못된 믿음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고 감정을 자극시키면서 잘못된 의지로 고집을 부리게 함으로써 묶임 가운데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특히 상처라는 것은 상처 난 감정입니다. 지성과 의지도 잘못될 때 문제이지만 특히 악한 영들은 우리의 상처 난 감정을 자극하여 역사할 때가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결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받은 우리의 구원을 취소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정말 강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믿었다면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최대한 우리 믿는 자들을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하여 황폐하게 살도록 괴롭히는 것이 마귀의 목적입니다.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3.   언제 들어왔나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각자 안에는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어두움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들어온 경우가 있고, 믿은 후에 들어온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받고 거듭나면 영은 깨끗하지만, 거듭났다고 해서 다시는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는 것은 굉장히 순진한 생각입니다.

 

어쩌면 마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공격의 강도를 더 높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왕국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면 더욱 강한 공격을 해올 것입니다. 마귀가 자기 왕국을 위협하는 영적이고 신앙적인 제자로 나아가는데 그냥 두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와 가정에서 리더들을 공격하는 겁니다.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당회원들, 목장의 목자 목녀들, 가정에서는 특히 아버지들을 공격합니다.

 

구원받기 전에 타종교에 심취했거나, 오컬트(ocult: 접신 등 신비주의적인 것)를 통해서 사탄에게 결박되었던 사람이 예수를 믿으려고 하면 공격이 훨씬 더 강하게 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늘 깨어 있기 위해 더욱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령들의 활동을 느끼지 못하고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초신자의 경우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중보기도 모임에 참석하거나, 초신자일수록 목장에 열심히 나가고 예배에도 열심히 나와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 대해서도 배우고 깨어 기도함으로써 적극적인 자세로 악한 영들의 공격을 대처해야 합니다. 그런데 초신자 때는 혼자 하기 힘드니까 다른 형제자매들과 같이 영적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군대로서 싸우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도 한 마리가 오는 게 아니라 여러 마리가 집단으로 옵니다. 그래서 우리도 같이 싸워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벧전 5:8-9)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자신의 삶에 있었던 일들의 모든 결과까지도 자동적으로 면제받는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주부습진으로 고생하는 한 여성이 있다고 해보십시오. 이 여성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주부습진이 계속 있을 때 그것을 보고 잘못되었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반면,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가진 남성이 있다고 할 때, 대개의 경우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그런 문제는 거의 해결이 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여전히 같은 문제로 고통을 받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남성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환경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잘못된 말과 행동이나 좋지 않은 환경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서적 상처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그것이 견고한 진이 될 수 있습니다. 견고한 진은 그 자체가 죄라기보다는, 악한 영들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대개 알코올 중독과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는 분노와 두려움의 영에 노출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렇게 알코올 중독과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는 감정적으로 분노와 두려움의 상처를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통해 분노의 영과 두려움의 영이 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도 통제할 수 없는 분노와 두려움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데, 그럴 때 그는 상담을 통해서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부모를 용서한 다음, 필요에 따라서는 자기 안의 견고한 진으로 형성된 분노와 두려움의 영을 쫓아내야 합니다. 내 분노와 두려움의 상처가 견고한 진이 되어서 악한 영이 들어오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삶견고한 진을 깨는 기도의 시간을 갖고, ‘경건의 삶때는 용서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견고한 진을 깨고 용서하며 악한 영들을 쫓아내고 상처를 치유했더라도, 또 다시 같은 문제에 얽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쓰레기를 치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악한 영을 쫓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혼과 육에 있는 상처의 쓰레기를 치우는 것입니다. 쓰레기가 있는 곳에 바퀴벌레와 쥐들이 몰려옵니다. 바퀴벌레가 싫고 쥐가 싫으면 깨끗하게 하고 있으면 됩니다. 깨끗하면 안 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상처라는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면 악한 영들은 쫓겨 갔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보혈의 능력을 사용해서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온갖 형태의 악령의 역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악한 영이 역사하는 것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영은 물러가라!”라고 하는데, ‘이렇게 해서 될까?’ 하고 의심할 수 있지만 정말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악한 영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라는 생각은 아주 순진한 생각이고 위험합니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이 귀신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혼(지정의, 특히 감정)과 몸에 악령들이 장난을 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통로가 되어서 그리로 들어와 장난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른 채 그냥 나는 어쩔 수 없어. 이게 내 모습이야.’라고 하며 악한 영의 공격에 굴복하게 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이 아니라 피폐한 삶을 살고 맙니다.

 

성령께서 환히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한 교훈은, 그 양심에 낙인이 찍힌 거짓말쟁이의 속임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딤전 4:1-2, )

 

그리스도인이 된 후 마귀가 우리를 악한 영들에게 노출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전략이 바로 미혹, 즉 속임수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라는 말은 원래 믿음 안에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으면서도 미혹하는 영들에게 자신을 열어주면서 점차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구원을 잃어버렸다고까지는 나오지 않지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속임을 당하면 아주 황폐한 삶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믿지 않은 사람이라면, 정말 믿은 게 아닌데 그냥 지적으로만 동의하고 교회만 왔다 갔다 했다면, 완전히 거기에 넘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교리적으로도 참 이해와 해석이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믿음을 완전히 떠날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진짜로 믿은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적으로만 동의했거나 믿어보려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예 믿음을 떠났다면 그럴지 몰라도, 믿으면서도 순간적으로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르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고 이 부분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과 늘 붙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라도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르게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태하게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퇴보하는 것이고, 사실은 그 나태함을 통해서 악한 영이 장난을 치는 통로를 만들어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함으로 모든 악한 영의 속임수를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5)

 

우리에게 주신 무기는 강력합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우리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4.   치유의 이름 예수

 

예수님의 원래 이름은 원어로 예슈아(Yeshua)’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잉태 전에 이미 예수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전해주었습니다. ‘예슈아의 뜻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하나님이 치유하신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구원과 치유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주된 사명 중 하나가 치유인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4:18-19, )

 

그리스도메시야라는 호칭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예수님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해 구원과 치유의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보고 기뻐했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싫어했습니다. 특히 안식일에 치유하는 예수님을 보고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분명히 안식일 전날이나 안식일 다음 날에 병자를 치유할 수 있으셨으면서도 굳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2:28)

 

치유는 복음 사역과 함께 예수님의 최우선적인 사역이었습니다. 인류를 짓눌러왔던 악한 영들이 치유를 통해 떠나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가정교회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제가 들은 과목이 자유케 하는 삶이었는데, 강사로 오신 분은 순복음교회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장로교 목사님이셨습니다. 원래 그런 신비적인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전혀 알지 못했던 목사님이 어떤 계기로 인해서 이 영역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고, 실제로 그 동안 축사를 한 것이 120건 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처음 시작은 어느 청년이 자기 누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데리고 오면 기도해주겠다고 했는데 누나가 뭐 하는데?”라고 물으니 점쟁이에요.”라고 했습니다. 전주에서 아주 용한 20대 처녀 점쟁이였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새벽기도 때 찾아왔기에 마음이 떨렸지만, 그 사이 준비한 대로 하셨다고 합니다. 그 자매는 귀신이 들려서 점을 치던 사람이었는데, 귀신이 다 알려주어 점을 쳤다고 합니다. 그러다 그날 귀신들이 쫓겨가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에 의하면, 교회 안에도 정신적, 감정적인 마음의 병과 육체적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모든 정신적, 감정적 문제가 다 영적인 문제 때문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경우에 영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정신질환과 귀신 들린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대부분 억울하고 상한 감정의 쓴 뿌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영적 쓰레기를 계속 가진 채 오랜 시간을 견뎌 온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정신질환이 곧 귀신 들린 것은 아닌데, 그 마음의 상처와 쓴 뿌리를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있으니까 벌레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그런 상처와 쓴 뿌리가 곧 귀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쓴 뿌리가 악한 영들이 역사하는 통로, 즉 견고한 진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며 귀신을 어떻게 쫓아내나 하는 데 힘쓸 게 아니라, 쓰레기를 치우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치울 내 마음의 쓰레기로 혹시 무엇이 있는가? 혹시 내 삶에 관계의 어려움이나 어떤 문제가 있다면, 혹시 내 마음에 영적 쓰레기를 가지고 있어서 이런 영적인 문제가 일어나는 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치우지 않은 쓰레기는 악한 영들의 먹는 음식이 됩니다. 벌레들이나 쥐들이 쓰레기를 먹지 않습니까? 쓰레기가 악한 영들의 먹잇감입니다. 먹을 게 있는데 두고 쫓겨나가니까 억울해서 나중에 다시 온다는 것입니다. 못 먹고 나갔으니까 그게 먹고 싶어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쓰레기를 치워야 합니다. 여러 방법들이 있지만 간단히 이런 것입니다.

 

 

<< 쓴 뿌리를 치유하기 >>

 

1)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제 안에 악한 영의 먹이가 되는 부분, 치유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보십시오. 자신의 삶이나 성품 중 잘못된 것, 잘못을 반복하는 것, 우울한 것, 중독된 것, 문제가 된 것을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무엇입니까? 보여주십시오.’ 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2)  쓰레기를 예수님께 드리기

 

기도 후 그것이 떠오르면 회개 - 용서 - 드림 - 선포의 순서를 통해 해결하면 됩니다.

 

회개하고(내가 사람들을 판단했던 것), 용서하고(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 그 쓰레기를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16:19)는 말씀대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겨나가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할 필요도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게 기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고,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를 힘쓰며,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고 나아가면 악한 영들이 감히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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