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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2일 수요예배

이 시대의 거짓 신들 4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여인

(창세기 2931~35)

 

1.  날마다 비수에 찔리는 고통

 

지난주에 우리는 야곱이 라헬에 대한 사랑을 우상으로 삼았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야곱은 라헬만 있으면 다 될 것 같이 여겼고, 라헬은 야곱에게 단순한 아내가 아니라 일종의 구세주였습니다. 그렇게 우상숭배는 야곱의 삶을 망쳐 놓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모든 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였는가? 바로 레아였습니다. 레아는 첫째 딸인데, 창세기 본문이 레아에 대해 남긴 정보는 딱 하나뿐입니다.

 

레아는 눈매가 부드럽고,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 (17, )

 

개역개정에는 시력이 약하다고 되어 있고, 이것을 시력이 나빴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구절이 레아는 시력이 약하나 라헬은 눈이 아주 좋았다라고 하지 않고 라헬은 미모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약하다라는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레아가 사팔뜨기였거나, 눈에 총기가 없었거나, 어딘가 보기에 흉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The MessageGood News Translation 같은 영어 성경들을 보면, 레아는 눈만 봐줄 만했고 라헬은 얼굴과 몸매가 다 예뻤다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어떤 것이 맞든 상관없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레아는 그다지 외모가 볼품이 없었고 평생 자기 동생 라헬의 빼어난 미모에 가려진 채 살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은 레아와 결혼하려고 값을 치를 남자가 아무도 없을 것을 알았습니다. 라헬을 결혼시켜 큰돈을 챙기려면 레아부터 처리해야 하는데, 몇 년째 그 방법이 막연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바로 야곱에게서 찾았습니다. 이렇게 제 발로 굴러온 기회를 그냥 놓칠 라반이 아닙니다. 이 엄청난 사기꾼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놓치겠습니까?

 

하지만 이 상황을 레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겠습니까? 자기는 한마디로 아버지가 기뻐하지 않는 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딸이며, 오히려 자기를 볼 때마다 골치 아프고 짐스러워 합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동생과 자기를 비교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웃든지 아니면 동정합니다.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언제나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특히 남자들의 시선을 받는 라헬을 볼 때마다 질투심이 일어나는 동시에, 자기 때문에 시집을 가지 못하는 동생에 대해 미안하기도 하고, 굉장히 감정이 복잡합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원하지 않던 딸은 이제 남편이 원하지 않는 아내가 됩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30).

 

한마디로 레아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여자,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레아의 마음은 야곱만큼이나 공허했습니다. 반응도 야곱이 한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그랬고 이삭이 에서에게 그랬듯이, 레아도 야곱에게 똑같이 행동합니다. 마음의 희망을 야곱의 사랑을 얻어 내는 데에 둔 것입니다. 야곱은 어떻게든 라헬의 사랑을 얻어 보겠다고 하고, 레아는 어떻게든 야곱의 사랑을 얻어 보겠다고 합니다. 야곱의 사랑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레아는 무엇을 합니까? 가정의 전통 가치관을 통해 자신의 행복과 정체성을 찾으려고 시도합니다.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2)

 

당대에는 아들을 낳는 것이 여인에게 축복이고 남편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레아는 모든 희망과 꿈을 남편에게 걸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들만 낳으면 남편도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결국 내 불행한 삶도 해결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야곱과 비슷합니까? ‘라헬과 결혼만 하면 그 동안 불행했던 내 삶이 술술 풀릴 것이다.’ 레아도 내가 아들만 낳으면 남편도 나를 사랑할 것이고, 그 동안 무시당하고 괴로웠던 내 삶도 펼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낳고 또 낳고 또 낳습니다.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3)

 

하지만 아기를 낳을수록 레아는 지옥 같은 외로움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자신이 가장 갈망하는 남자가 자신이 평생 따라갈 수 없는 것을 가진 여자의 품에 안겨 있으니, 그 모습을 봐야 하는 하루하루의 삶이 지옥의 고통이었습니다. 날마다 심장이 비수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야곱은 운명적 로맨스를 추구했고, 전통주의자 레아는 아기를 낳으며 아내라는 신분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둘 다 실패했습니다. 지난주에 언급했던 어네스트 베커(Ernest Becker)라는 문화 인류학자가 그 이유에 대해서 아주 잘 설명했습니다.

 

로맨틱한 사랑은 인간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고, 사람들의 좌절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관계도 하나님의 역할이라는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상대를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우상화하더라도, 지내다 보면 그 사람의 부족하고 잘못되고 심지어 부패한 모습과 결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하는 상대방을 하나님의 위치로 격상시켜서 결국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흠을 없애고 자기 약점을 가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우상화함으로써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지우려고 하고, 또 자기 존재가 헛되지 않다고 정당화하려 합니다. 바로 그것이 구원받으려는 시도입니다. 물론 상대방은 인간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구원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채움을 받으려 한다면 또 다시 공허해지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자는 사랑을 이용하여 섹스를 얻고, 여자는 섹스를 이용하여 사랑을 얻는다.’ 그런데 사실은 양쪽 다 우리를 좌절하게 만드는 가짜 신입니다. 야곱은 미모의 아내를 얻어 라헬로부터 자기 삶의 정당성을 찾으려 했기 때문에, 상대에게 마음을 주면서도 그녀의 미성숙한 모습과 여러 가지 결함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레아는 남편이 몸으로는 분명 자기 옆에 있고 함께 잠자리를 했지만 그의 마음은 자기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야곱의 사랑과 헌신은 레아가 아니라 늘 라헬에게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아는 부부관계를 통해 아기를 낳음으로써 야곱의 마음이 자기에게 와서 연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4)

 

그러한 레아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레아와 연합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에 따라 레아의 마음은 늘 공허했고 그녀의 삶은 언제나 불행했습니다.

 

21세기에 들면서 점점 확산되어 온 인식이 있는데, 많은 여성들이 헌신적 관계라는 우상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2009년에 나온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He’s Just Not That Into You>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뉴욕 타임스 New York Time>의 평론을 보면, 할리우드에서 양산되는 영화 속의 젊은 여자들이 이제 여성적 갈망을 다분히 구두와 결혼식과 아기에 할애하는 듯 보인다.”라고 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실제로 영화 속 한 여성 등장인물은, 첫 데이트에서 돌아온 뒤 친구에게 전화해서 아주 멋진 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상대 남자는 집에서 다른 여자에게 전화를 걸고 있습니다. <뉴욕 타임스> 평론에서 제대로 지적했듯, 백마 탄 왕자님과의 로맨스와 거창한 결혼식을 우상으로 삼는 여자는 이미 갈망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평론가는 여자들에게 여성이 우상화하는 전형적 사랑을 버리고 남성처럼 사랑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니까 남자들이 이 여자 저 여자 동시에 만나는 것처럼 여자들도 그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우상숭배는 사람을 노예로 만듭니다. 남성이 우상화하는 사랑은 한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여러 여자와 사귀어도 되는것입니다. 여성이 우상화하는 사랑은 여성을 로맨스에 대한 중독과 남성에 대한 의존에 빠뜨려 상대방에게 조종당하기 쉽고 취약하게 만듭니다. 양쪽 다 일종의 노예 상태인 겁니다. 양쪽 다 눈을 멀게 해서 인생의 지혜로운 선택을 막습니다. 양쪽 다 삶을 망가뜨립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인격적인 은혜의 하나님을 붙들라

 

이 안타까운 본문의 이야기에서 영적 변화를 보여주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레아입니다. 비록 맨 마지막에 가서야 그렇게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레아만이 영적 성장을 보여줍니다. 먼저 하나님이 레아 안에 행하시는 일을 보십시오. 레아가 하는 말에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32).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33).

 

레아는 하나님을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레아가 여호와에 대해 어떻게 알았을까요?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단어는 엘로힘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문화에 하나님내지는 신들에 대한 보편적 개념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훗날 모세에게 스스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혈통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12:1, 7-8)

 

그렇다면 레아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야곱이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하여 들었던 것을 레아에게 말해준 경우뿐입니다. 이처럼 레아는 혼란에 빠져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인격적인 은혜의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인생의 돌파구는 출산의 세월이 모두 흐른 후에야 찾아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35)

 

넷째 아들 유다를 낳고서 레아는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라고 합니다. 이 고백에는 당당함이 느껴집니다. 이전에 세 아들을 낳고 선포하던 말과는 다릅니다. 아들을 낳을 때마다 주님(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 믿음은 결국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여호와를 부르고 믿음을 이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러서 남편의 사랑을 받겠다는 겁니다.

 

르우벤을 낳고서 주님께서 나의 고통을 살피시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이제는 남편도 나를 사랑하겠지.”라고 했습니다(32). “주님을 불렀지만 남편의 사랑을 원합니다. 또 시므온을 낳고는 주님께서,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렇게 또 아들을 주셨구나.”라고 합니다(33). 여기도 또 남편 사랑 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를 낳고 낳은 다음에는 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도 별 수 없이 나에게 단단히 매이겠지.”라고 합니다(34). 여기서는 하나님 이야기는 안 하고 또 남편 타령을 합니다.

 

르우벤과 시므온을 낳았을 때는 여호와 이야기를 했는데, 셋째 아들 레위를 낳은 다음에는 왜 여호와 이야기가 없습니까?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을 묵상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분을 찾으며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별 응답이 없으니까 다시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래도 또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삐치는 겁니다. ‘하나님을 불러봐야 소용없구나.’ 그러다 어떤 계기로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레아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이 말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부른 이유는 아들을 주셨기 때문이고, 그것은 결국 아들을 통해 남편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을 때마다 이제는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네 번째로 유다를 낳고나서는 남편이나 아이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너무 놀라운 변화입니다.

 

마침내 레아는 자기 마음속의 가장 깊은 소망을 남편이나 자녀에게 두기를 포기하고, 주님께 둔 것으로 보입니다. 34절과 35절 사이에 뭔가 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인지는 나와 있지 않으니 모르지만, 세 번을 해보니까 아무리 아들을 낳아도 남편의 사랑이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의 사랑을 얻는 것이 헛된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은 다음 아들을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헛된 것이구나.’ 하고 깨달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아들을 주시든 안 주시든, 남편이 나를 사랑하든 안 하든, 나는 주님을 찬양하겠다.’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뒤에 또 읽어보면 레아가 오락가락 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래도 여기서 결단을 하며 나아간 겁니다. 아버지 라반과 남편 야곱은 레아에게서 삶을 빼앗아갔지만, 그녀는 결국 주님께 마음을 드림으로써 자기 인생을 돌려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3.  내가 너의 참 신랑이다

 

하나님이 레아 안에서 행하신 일뿐 아니라 레아에게 해주신 일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아는 네 번째 아들에게서 뭔가 특별한 점이 있는 것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뭔가를 해주셨음을 직감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유다였는데, 창세기 49장에 보면 훗날 진정한 왕이신 메시야가 바로 그를 통해 오신다고 야곱이 유언에서 예언합니다.

 

유다야, 너의 형제들이 너를 찬양할 것이다. 너는 원수의 멱살을 잡을 것이다. 너의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유다야, 너는 사자 새끼 같을 것이다. 나의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어 먹고, 굴로 되돌아갈 것이다. 엎드리고 웅크리는 모양이 수사자 같기도 하고, 암사자 같기도 하니,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으랴! 임금의 지휘봉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자손만대에까지 이를 것이다. 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이 오시면, 만민이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 (49:8-10, )

 

이것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여인을 찾아오셔서, 그녀를 예수님이 태어나실 계보의 조상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세상에 구원이 임하도록 한 통로는 아리따운 라헬이 아니라, 볼품없고 아무도 원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했던 레아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구약의 예수님이라고 할 정도로 훌륭한 요셉 같은 사람이 아니라, 속고 속이고 도망가고 많은 실패를 경험하며 아주 험한 인생을 살았던 야곱에게 그 이름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메시야(그리스도)도 아름다운 라헬이 아니라, 사랑받지 못한 여인 레아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의외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약자를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레아에게 주신 이 놀라운 선물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1)

 

여기 보면 주님은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친히 그녀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내가 너의 참 신랑이다. 나는 남편 없는 자의 남편이요, 고아의 아버지다.’ 그분은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고행을 하거나 수행을 하거나 뭔가 선행을 하여 공덕을 쌓아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 친히 내려오셔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분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 연약한 사람,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해주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왕과 백성들의 관계나 목자와 양의 관계뿐 아니라, 그분은 남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인 관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 기뻐하시며 어쩔 줄 모르십니다. 아무도 봐 주지 않거나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까지도 그렇게 기뻐해주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상숭배를 이기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로맨틱한 상대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는데, 그들은 주님의 이러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너의 참 신랑이다. 네 마음의 모든 갈망을 이루어 줄 곳은 단 하나뿐이다. 그곳은 바로 나의 품이다. 내게로 오기만 하면 마지막 날에 그 품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배우자가 없는 사람이나 결혼한 사람이나, 주님이 우리의 참된 신랑이심을 알아야 합니다그래야 결혼생활이 자신의 신적인 기대의 중압감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혼만 하면 다 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며 배우자에게 허황된 기대를 품고 결혼한다면, 배우자에게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배우자를 덜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대상이 배우자이든, 자녀이든, 어떤 다른 것이든, 그 사람(그것)만 있으면 내 인생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그 사람(그것)이 내 인생에서 없어지면 큰일 난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나 그것이 나의 우상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내 마음이 채워집니까? 아닙니다. 마음은 마음대로 채워지지 않고, 인생은 망가집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내 마음을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분을 붙들고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배우자나 자녀나 어떤 것이 내 인생을 아름답게 해주는 역할로 바뀝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배우자나 자녀를 덜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에 평안과 기쁨이 옵니다. 순서가 바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가 막힌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예수님은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 둘째는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첫째와 둘째의 순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도로 볼 때는 첫째와 둘째가 똑같은데, 순서에는 분명히 첫째와 둘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먼저 하면 어떻게 됩니까?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을뿐더러, 내 사랑의 대상이 우상으로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없이 배우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없이 자녀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없이 심지어 VIP를 섬기고 사역한다면 그런 사역과 봉사조차도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다음 것들이 놀랍게도 자기 자리를 찾게 되고 인생이 아름다워집니다. 그래서 인생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까? 레아의 삶이 가리키는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4.  그리스도만이 내 생명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레아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자신의 조상 레아처럼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53:2, )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11)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셨습니다.

또 그분은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모두가 그분을 버렸고, 예수님은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께마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분은 왜 레아의 후손이 되셨습니까? 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셨습니까?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53:6, )

 

우리를 사랑하신 그 모습에 깊이 감격하며 감사할 때, 다른 가짜 구세주들은 우리 마음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갖 노력과 관계들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려던 헛된 노력을 그만두게 됩니다.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엉뚱한 데서 구원자를 찾으려던 것도 그만두게 됩니다. 참 구원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3:3-4, )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연인이나 배우자나 자녀나 직업이나 사업이나 취미생활이나 돈이나 성공이나 그 무엇도, 우리의 생명이나 정체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시선이나 내 분야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구원)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런 눈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놀라운 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배우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자녀를 너무 사랑하더라도, 그들이 결코 나의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내 생명이십니다. 그렇게 고백하며 살 때 우리도 레아처럼 삶을 되찾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연인이나 배우자나 자녀나 집안 배경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그 자체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눈을 맞추면 오히려 인간을 향한 진짜 사랑이 가능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눈을 안 맞추고 인간을 사랑하면 집착이 되고 우상숭배가 된다는 겁니다.

 

우상숭배는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며, 그러면 결국 우상도 망가지고 나도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오히려 배우자나 자녀나 어떤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들도 살고 나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인생을 살기 위하여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해야 합니다.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 삶 속에 있는 여러 대상들 중에서 모든 거짓 신을 능히 물리치게 할 만큼 아름다운 분은 누구신가? 누가 진정한 삶을 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뿐입니다.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라는 사람은 그 답을 이런 식으로 썼습니다.

 

내 사랑스러운 주여, 오직 주님만이 내 생명이요 빛이요 아름다움이십니다.”

 

우리도 매일 이 고백을 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다른 어떤 사람이나 내가 사랑하는 어떤 것이 아닌, 오직 주님만이 내 생명이시라고 고백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에게 주시는 참된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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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가짜들에게 결별을 선언하라" (골 3:1-10) - 이 시대의 거짓 신들 10/최종 (1/03/18) kpccoh 2018.01.04 1028
131 "연약함을 통한 승리" (창 32:21-32) - 이 시대의 거짓 신들 9 (12/27/17) kpccoh 2017.12.28 682
130 "은혜 없는 종교가 만드는 가짜 신" (욘 4:1-11) - 이 시대의 거짓 신들 8 (12/20/17) kpccoh 2017.12.21 835
129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인 권력욕" (단 4:4-37) - 이 시대의 거짓 신들 7 (12/13/17) kpccoh 2017.12.14 832
128 "성공의 유혹" (왕하 5:1-14) - 이 시대의 거짓 신들 6 (12/06/17) kpccoh 2017.12.07 659
127 "모두가 너무 원하는, 그러나 최악의 우상인 돈" (눅 19:1-10) - 이 시대의 거짓 신들 5 (11/29/17) kpccoh 2017.11.30 1192
»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여인" (창 29:31-35) - 이 시대의 거짓 신들 4 (11/22/17) kpccoh 2017.11.23 3014
125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우상" (창 29:13-35) - 이 시대의 거짓 신들 3 (11/15/17) kpccoh 2017.11.16 1123
124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던 평생소원" (창 22:1-14) - 이 시대의 거짓 신들 2 (11/08/17) kpccoh 2017.11.09 1173
123 "내 마음속의 위험한 우상들" (출 20:1-6) - 이 시대의 거짓 신들 1 (11/01/17) kpccoh 2017.11.02 4291
122 예수님과 함께하기(6):"빈 무덤에서" (눅 24:1-12) - <예수신경> 30 (10/25/17) kpccoh 2017.10.26 1530
121 예수님과 함께하기(5):"십자가에서" (눅 23:26-46) - <예수신경> 29 (10/18/17) kpccoh 2017.10.19 873
120 예수님과 함께하기(4):"최후의 만찬에서" (눅 22:7-20) - <예수신경> 28 (10/11/17) kpccoh 2017.10.12 829
119 예수님과 함께하기(3):"산 위에서" (눅 9:28-36) - <예수신경> 27 (9/27/17) kpccoh 2017.09.28 1293
118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 (마 16:13-20) - 이맘다해 선교사 kpccoh 2017.09.21 401
117 "소망이 그분의 이름 " (창 2:2-7) - 홍 영락 (Steve Hong) 전도사 kpccoh 2017.09.14 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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