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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15일 수요예배

예수신경 3

아바 아버지의 사랑

(누가복음 1511~32)

 

1.   아바 아버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증거 합니다. 그분은 여기 있는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십니다


모든 사람안에는 IS나 테러리스트들도, 북한 김정은도, 또한 소위 수구 꼴통이나 종북 좌파도 다 포함됩니다. 지금 내가 너무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저주하는 사람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다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우리는 이 진리가 우리 삶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고백하기는 쉬운데 뿌리내리기는 어려운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더욱 힘쓰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며, 또한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신경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한 전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주기도문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아바,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일관성을 보여주시는데,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들을 보면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으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에는 모두 다 아바,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여러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야훼(YHWH)’는 절대 입으로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외에 아도나이’(주님), ‘엘로힘’(하나님), ‘엘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등의 다른 이름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으로 아바를 사용하셨을까요?

 

하나님을 야훼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이름은 너무 거룩해서 거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 중에서 아바를 선택하셨습니다. 아바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이며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친밀한 사랑의 아버지로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가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고 또 예수신경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사랑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일 4:10-11, )

 

너무나 놀랍게도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바라는 단어는 가정에서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아버지를 부를 때 아바라고 했는데, ‘아빠, 아버지라는 뜻으로, 친근함과 친밀함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바가 살고 있는 가정에서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될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처음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부모도 자신의 자녀를 완벽하게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사랑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을 온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그 결과 우리도 하나님께 완벽한 사랑의 마음을 드리지 못합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부모를 통해 끔찍한 경험을 겪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워 하며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한 방식이나 사랑하지 않은 방식 때문에 마음이 꽉 닫혀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친 아버지에게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당하거나 학대를 받고 자란 여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꺼려하고, 아버지라고 부르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아들이든 딸이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맞고 자라거나,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어?’라는 모욕 또는 넌 아무리 해도 안 돼.’라는 저주를 들으며 자란 경우,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나 증오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도 자기 자녀에게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게 참 무섭습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고, 책임이 큽니다.

 

비참한 과거 때문에 마음 문이 녹이 슨 채로 닫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마음에 대한 치유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합니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은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녹슨 우리의 마음 문에 부어지는 기름입니다. 그리고 그 기름의 이름은 바로 아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실제로 50대 후반의 웨슬리라는 남성은, 어릴 때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50년 동안이나 시달렸습니다. 원래 정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였으며 울기도 잘하는 울보였는데, 식구들이 재미삼아 놀릴 때에도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루는 그의 가족이 함께 가족 소유의 농장으로 피크닉을 갔는데, 한참 놀다 보니까 같이 있던 엄마가 안 보였습니다. 엄마는 집으로 갔을 것이라고 알았지만, 그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보고 싶어 평소처럼 엄마를 찾으며 울었습니다. 계속 울어대니까 짜증이 난 아빠가 그를 야단치며 말했습니다. “네 엄마는 갔어. 엄마는 너의 울음소리가 지겨워서 영원히 가버렸어.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그때 웨슬리는 아빠의 말을 듣고 더 큰소리로 울었다고 합니다. 마음속으로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아빠의 그 말이 너무 무겁게 자기 마음을 짓눌렀고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너무나 컸습니다. 물론 바로 조금 후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기에게 말도 없이 사라진 엄마가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았다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감정의 끈이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 후 그가 자라면서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으로 돌봐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50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찾으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게도, 웨슬리는 아버지의 그 몇 마디 말과 자기를 놓아두고 잠깐 사라졌던 어머니의 무정함에 대한 기억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바 아버지로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아바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무려 5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정에서 부모님과 함께 시작된다고 한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의 핵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면, 믿음은 우리를 향한 아바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시작됩니다.

 

무려 50년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웨슬리는 50년이 지난 어느 날 공원에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경험을 한 후부터 삶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아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기름은 마음속에 달라붙어 있던 모든 녹을 제거했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하나님이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 삶이 완전히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2.   탕자의 비유 속의 아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신경의 전제인데, 탕자의 비유는 이 사실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신앙의 중심은 예수신경이고, 우리의 기도 중에 나타난 예수신경의 모습이 주기도문인데,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는 예수신경이 이야기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어떤 상황에서 하신 것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1-2)

 

이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있었고,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 때문에 비난하며 앞으로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의심하며 주시하고 있던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그분이 하고 계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는 자기 유산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미리 받아서 먼 나라에 가 놀고먹으려 합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그가 원하는 대로 재산을 나누어주고, 아들은 집을 더나 방탕한 생활에 빠져 살다가 결국 가진 돈을 다 탕진하고 맙니다. 돈이 다 떨어진 아들은 돼지를 치는 일을 하는데, 돼지를 치는 것은 보통 유대인이라면 결코 하지 않는 일입니다.

 

돼지가 먹는 음식찌꺼기조차 먹지 못하는 지경에 처하자, 아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고향에 도착한 그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낸 것과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21).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아버지(아바)는 방탕한 아들을 이해 잔치를 베풀어줌으로써, 토라(율법)를 존중하던 그 사회의 통념을 깨뜨려버립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동생을 향한 아바의 사랑에 심통을 부리는 큰아들을 언급하십니다. 큰아들은 그 동안 자기가 얼마나 전통을 성실하게 지키며 일했는지 말하면서, 살아 돌아온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던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식사하는 것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탕자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이 비유의 핵심 인물인 아바를 부각시키십니다. 그럼으로써 이웃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설명하십니다.

 

이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아바가 얼마나 사랑이 많고 너그러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또 다른 놀라운 점은, 아바가 자기 둘째 아들의 귀환을 가장 먼저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0)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것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나가서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들이 올 때 아버지가 먼저 나가서 안고 입을 맞추며 맞아줍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한 아들이 이처럼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고, 부자 관계를 끊고 집을 떠났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성의 장로들은 그 아들을 마을 중앙에 세워놓고 그의 발 앞에 그릇을 놓은 다음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그릇을 깨뜨린다는 것은 추방을 의미하는 법적 행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서 아바가 자기 아들을 맞으러 급히 달려간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먼저 발견함으로 아들이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이 아바는 종들에게 서둘러 지시를 내립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2)

 

또한 아바는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풉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3-24)

 

아들이 돌아왔을 때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창피를 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그의 마음이 낮아졌고 회개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을 통해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죄를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과 같이 드신 게 아니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과 같이 드셨던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서 끌려온 여인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께서는 회개하는 자녀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그들이 한 단계 더 높은 지위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의복을 입혀주십니다. 그들은 아바가 주신 최고의 옷을 입고, 그분의 반지를 끼고, 그분의 신발을 신습니다. 또한 최상품 송아지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즐거운 축제를 벌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맞아들이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돌아온 아들과의 재회를 기뻐하며 축하하는 아바와 같으십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신경을 가능하게 해주는 전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전제는 아바라는 단어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3.   마음을 열어 진리를 받아들이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예수신경의 전제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먼저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상관없이, 모든 것은 우리를 향한 아바의 끝없는 사랑과 함께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니ᄁᆞ 우리의 사랑도 시작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것을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매일 기억하라는 의미에서 아바라는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아바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아바의 사랑에 대해 마음을 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합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수술을 통해서 병이 낫도록 수술대 위에 눕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를 맡기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의사를 믿지 못해서 수술대에 오르지 않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으로 긴장을 풀지 않는 한, 방어적으로 있는 한, 치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바 아버지를 신뢰하고 맡길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여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세 가지입니다.

 

1)  열쇠를 넣어 돌리는 것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열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만드셨고, 그 안에 열쇠를 꽂을 수 있는 문을 설치해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쇠는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쇠로 마음 문을 여는 것입니다.

 

 

2)  하루 종일 짧은 기도를 반복하는 것

 

아버지, 나를 사랑하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 짧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살았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의 행동을 하루에 하나씩 실천하기

 

가장 쉬운 믿음의 행동은 혼잣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잘 알고 계셔.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군가가 나에게 못되게 굴거나 불편하게 합니다. 그럴 때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지만(미워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누가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던질 때 이렇게 해보십시오. ‘너는 나를 미워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은 무슨 주문 같은 게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잊어버리고 상처를 받을 뻔한 자신에게 진리를 선포하고 상기시켜주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때로는 어떤 과거의 잘못이나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아픈 기억이 우리 마음속에서 막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바로 오늘 비유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죄인이 돌아오는 것을 너무나 반겨주시는 분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함으로써, 그런 기억을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잘난 사람만 사랑하시는가 하고 생각한 적이 없으십니까? 돈 많은 사람, 좋은 학교 나온 사람, 권력을 잡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 큰 집에 사는 사람, 비싼 자동차를 모든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에서 당당하게 섬기며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만 사랑하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죄에 찌들고, 허랑방탕하고, 돼지 냄새를 풍기며 오랜 시간을 허비하다가 아바에게 돌아온 둘째 아들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에서 금방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바는 바로 그 아들을 위해 엄청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기껏 큰 집에 살고, 최고급 차를 타고, 비싼 옷 입고, 명문 학교 나오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떵떵거리는 것이 겨우 우리의 목표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혹시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아바가 베푼 잔치에 조금 늦게 도착하더라도, 그 무엇보다 좋은 일은 아바와 잔치의 자리에 함께 앉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이야기해주십시오. “아바와 함께 잔치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예수신경은 첫 번째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예수신경의 토대를 이루는 전제는 아바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리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붙들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아바 아버지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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