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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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0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5 ✦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가라” (마가복음 7장 24-30절) [들어가는 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찬송 중 하나가 바로 <21세기 새찬송가> 305장(통일찬송가 405장)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일 것입니다. 이 곡은 영국의 존 뉴튼(John Newton)이라는 유명한 목사가 작사를 했습니다. 그가 남긴 이야기 가운데 아주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나는 세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랄 것입니다. 내가 천국에서 꼭 볼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이 천국에 없는 것을 알고 놀랄 것이고, 두 번째는 내가 천국에서 볼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그곳에 있는 것을 알고 놀랄 것입니다.” 이 말은 성경적 교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믿는 것 같았는데 천국에 안 온 것을 보니 사실은 안 믿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혀 안 믿는 것 같았는데, 우리가 보는 눈앞에서는 믿지 않았었는데, 어딘가에 가서 믿게 되어 천국에 왔기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이런 천국의 의외성은 천국에서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신앙이 아주 좋은 것 같았던 목회자나 장로들도 박해가 일너날 때, 그들 중 순교한 분도 있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난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모습 중 하나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았던 사람들이 의외로 박해 앞에 담대히 나아간 경우도 있습니다. 4복음서를 읽다 보면, 특히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주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다고 한탄하며 안타까워하시는 것을 봅니다. 반면, 예수님도 놀라시며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하신 사람들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그런데, 둘 다 이방인, 즉 안 믿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없고 그냥 말로만 하셔도 자신의 하인이 나을 것이라고 믿은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누군가가 찾아와서 치료해주어야 할 텐데, 백부장은 말로만 해도 나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도 마태복음을 보면 “네 믿음이 크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은 자신의 자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동기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여기 교회에 나오신 분들 중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들도 계시지만, 이렇게 교회에 나왔다는 것, 예수님 앞에 나온 동기가 다 다릅니다. 자녀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도우심을 구하며 주님께 나온 분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자녀의 문제를 끌어안고 예수님께 이 여인도 나오면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믿음을 칭찬해주셨습니다. 오늘 이 여인의 믿음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며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두로에서 한 여인을 만나신 예수님 (24-26절) 지난주 본문에 보면,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서로 논쟁하며 예수님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자기들의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신 예수님은, 그 후에 일어나 두로 지경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4절) 두로는 당시 뵈니게(페니키아) 지역, 즉 갈릴리의 북서쪽으로 4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지금의 레바논 지역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로의 위치가 어디인가가 아니라, 여기는 이방인 지역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곳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부정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이러한 이방인 지역에 예수님은 어쩔 수 없거나, 어쩌다 보니까 우연히 가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으로서 일부러 이방인 지역인 그곳에 들어가심으로써, 유대인들의 정하고 부정한 것에 대한 개념을 예수님이 여지없이 깨뜨려버리신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에도 바리새인들이 계명을 지키려 하는데 뭐라고 하신 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유대인이니까 자동적으로 정결하고, 이방인이니까 자동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인종과 상관없이 그 마음에 따라 정하고 부정하게 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두로에 어떤 사역을 하러 가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24절에 보면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했기 때문입니다. 한 집에 들어가셔서 거기에 계신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점으로 볼 때, 예수님은 두로에서 쉬면서 다음 사역을 준비하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던 예수님의 계획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옴으로 인해 무산되고 맙니다. 주님의 명성은 갈릴리의 경계를 넘어 이방 지역인 두로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이미 사람들이 예수님께 많이 찾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 동네에 오시니까 사람들이 알아보고 소문이 금방 퍼져서 수많은 무리가 몰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한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립니다. 이 여인은 헬라 사람이고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나옵니다(26). 한국 혈통으로서 미국에 오면 1세입니다. 어떤 분들이 저에게 “2세입니까?” “아니오.” “1세입니까?” “아니오.” “1.5세입니까?” “아니오.” “그럼 뭡니까?” “1.1세입니다.” 참 애매합니다. 완전히 1세도 아닙니다. 한국에서 성인기를 안 보냈기 때문에 한국 시스템을 잘 모릅니다. 그렇다고 2세나 1.5세도 아니니까 1.1세나 1.2세라고 합니다. 우리 2세들은 처음에는 한국말을 하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영어를 주로 하고 사고방식도 미국식이 됩니다. 그와 같이, 이 여인은 그리스 사람의 혈통이면서 수로보니게(시리아 페니키아)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중동 지역에 헬라 문화가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었고, 많은 그리스 사람들이 그곳에 이주해서 살았습니다. 특히 뵈니게(페니키아) 지방에 위치한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은 헬라 문화에 깊이 영향을 받았고, 당시 거기에는 이 여인처럼, 헬라인이면서 수로보니게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2. 여인의 믿음 (25-30절) 1) 겸손하고 간절한 믿음 (25-26) 두로 사람들은 예수님이 위대한 선생이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것,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을 다 들어서 알았습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도 바로 그 예수가 두로에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빨리 와서 발아래 엎드립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5-26절) 이 여인은 심심해서 그냥 구경 온 것이 아닙니다. 급히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딸이 귀신에 들려있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25). 이러한 어려운 상황이 이 여인을 예수님께 오도록 만들었고, 그분 앞에 겸손히 엎드려 간절히 구하게 했습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장으로 높은 사람이었던 야이로도 자기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기 때문에 체면을 무릅쓰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여인도 자기 딸의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처럼 어려운 상황이 일어날 때 우리를 겸손하게, 또 간절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주님께 나오지 않고 완강히 버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치 열 가지 재앙을 만나고서야 이스라엘을 보내주었던 이집트의 바로 왕처럼,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자존심으로 버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상황이 자기 통제 아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입니다. 어떻게 연약한 인간이 마음대로 다 통제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순종할 뿐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는 보통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이 여인처럼 겸손하게 주님께 와서 발아래 엎드려 간절히 기도합니까? 아니면 계속 버티며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지고 혼자서 애씁니까? 왜 어려운 문제가 닥치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올 때, 보통 “Why me?”라고 말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오는가?” 그런데 그런 것을 묻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은 옵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안 해서 이런 벌을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때도 있지만 더 적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벌을 받아서 그렇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고 함부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어려운 문제가 일어납니까? 특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도 일어납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려움을 통해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용히 이야기해주어도 잘 못 들으니까 “야!”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시는 것이 어려움이라고 표현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주님 앞에 이렇게 겸손하고 간절히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문제가 생김으로써 더욱 주님 앞에 나오게 되고 더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고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된다면, 그 자체가 놀라운 축복입니다. 어려움에 닥쳐도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어려움이 있을 때 그래도 하나님께 나아오며 기도하고 도움을 찾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자존심 따지거나 체면을 따질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생겼는데 일단 주님께 나오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나오는 마음이 너무 귀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너무 귀하게 보십니다. ‘너는 나를 찾지도 않더니 이제 어려움을 당하니까 나오냐?’라고 야단치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오히려 기뻐하시고 안아주시면서 “잘 왔다. 잘 왔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어려움은 오히려 은혜로 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2) 인내하고 민감한 믿음 (27-28) 오늘 본문의 이 사건 전에는 예수님께서 어느 누구의 요청도 “싫다”라고 거절한 적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사람들을 고치시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시고, 귀신도 쫓아내주시고, 병자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절) 만약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던 두로 사람들 중의 하나라면 어떻게 느끼시겠습니까? ‘야, 참 아름다운 말이다.’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니, 사랑의 예수님이 어떻게 이런 비인간적인 말씀을 하실 수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비롯한 두로 사람들을 가리켜 "너희는 개"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만일 이 여인이었거나 두로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이렇게 반응을 할 것입니다. ‘아니, 이것 보시오, 예수 선생, 나는 당신이 사랑이 넘치는 위대한 선지자라고 들었소. 그런데 뭐? 지금 당신 우리를 개라고 했소? 당장 나가시오. 당신 같은 사람 필요 없소.’ 이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이 여인의 반응입니다. 뭐라고 합니까?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8절)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대답입니다. 그런데 그냥 보면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입니까? 자존심도 없습니까? 어떻게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자기가 개라고 버젓이 인정을 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 여인의 고백이 도대체 어떤 믿음이기에,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말입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4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믿음을 칭찬하신 경우가 딱 두 번입니다. 첫째는, 가버나움의 로마 백부장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마 8:10) 예수님이 깜짝 놀라셨습니다.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인데, 그 중에 아무도 이 로마 사람, 이방인 백부장 같은 믿음을 못 보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칭찬입니까? 두 번째로 칭찬하신 사람이 바로 이 여인입니다. 마태복음에는 가나안 여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 15:28) 자기가 개라는 것을 인정한 것뿐인데 그게 무엇이 대단해서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까지 하십니까?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이토록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를 모욕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거기에서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위대한 믿음입니다. 유대 전통으로 볼 때, 개는 부정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집들은 개를 애완용으로 집에서 기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어디입니까? 헬라 문화권인 두로 지역입니다. 이 여인도 그리스 혈통입니다. 바로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바로 그 귀여운 애완용 개라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문화에 맞춰서 예수님이 얼마나 적절하게 말씀하시는지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수 없는 부정한 존재라서 “너희는 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시간적으로 어디부터 먼저 해야 되는가,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하고 그 다음에 너희들에게 전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행 1:8, 새) 이것을 봐도 순차적으로 나갑니다. 먼저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유대, 사마리아, 땅 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27절에서 “먼저”라는 단어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핵심단어입니다. 27절을 다시 한 번 읽을 때 “먼저”를 크게 읽고 “개”는 작게 읽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많은 두로 사람들이 “개”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고 기분 나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먼저”라는 단어에 귀가 번쩍 뜨이는 겁니다. ‘아, 이분이 지금 내 요청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믿는 믿음을 요구하고 계시는구나!’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이 여인이 살던 수로보니게(시리아 페니키아) 지역의 대표적인 두 도시가 두로와 시돈입니다. 성경에 보면 항상 두로와 시돈이 같이 나옵니다. 그런데 시돈은 아주 유명한 사람의 고향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악질녀, 가장 악한 여인인 이세벨의 고향이 바로 시돈입니다. 우상 숭배의 본거지가 시돈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 아합인데, 그 아내가 이세벨이었고 그 고향이 시돈입니다. 그러니까 두로는 그 옆동네입니다. 이처럼 우상 숭배가 전통적으로 깊이 뿌리 박혀있는 지역에 사는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이 여인이 그 동안 헛된 우상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벗어나 유일하게 참되시며 살아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 믿음을 가지라고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거부하거나 모욕하는 것이 아니며, 유대인들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참된 신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표현을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동안 섬기던 헛된 우상들을 다 버리고, 너무나 익숙해 있는 자신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이 참되신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따르기로 결단하기로 원하는가? 그것을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저 딸 문제 해결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길 원하는가?’ 이것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 28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비록 개와 같더라도 주님의 집에서 함께 살 수 있게만 된다면 좋습니다. 부스러기라도 충분합니다. 주인의 집에서 귀여움을 받는 개들도 주인의 자녀들이 먹고 흘린 것을 같이 먹고 살지 않습니까? 저는 주님의 집에 들어가 살기를 원합니다.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바로 이 여인의 이러한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29절) “이 말을 하였으니.” 자칫하면 아주 심하게 들릴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 여인은 인내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뜻을 올바로 잡아낼 줄 아는 영적인 민감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여인의 딸이 나았다고 선언을 하십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주는 큰 믿음의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해도,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심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더 상황이 어려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 이렇게 반응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왜 더 어려워집니까? 하나님, 이렇게 밖에 못하십니까?” 이 여인에 빗대어 이야기하면 이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나를 개로 취급하시다니 정말 주님이 맞습니까? 좋아요, 그럼 이제 관두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안 하겠습니다. 전부 다 관두겠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 실망할 수는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될 때 얼마나 실망이 됩니까? 그런데 사탄의 유혹이면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할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 우리 삶 속에서 혼동되어 있는 정리해주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다 깨끗하게 정리하신 다음에 복을 주십니다. 복잡한 데에다 복을 주셔봐야 우리가 누릴 수 없기 때문에, 깨끗하게 된 다음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시험을 통과할 때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100세에 낳고 얼마나 애지중지 사랑했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이삭을 내놓아라. 죽여서 바쳐라.” 하시니 얼마나 깜짝 놀랄 만한 일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우상처럼 된 겁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고 이삭만 보입니다. 너무 좋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인생이 망치게 되었고 이삭도 망치게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정리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이 바칩니다. 그러니까 “Stop! 이제 됐다!”라고 멈추게 하십니다. 몰라서 그러신 게 아니라 아브라함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9-1-1 비상 전화처럼 평소에는 알아서 살다가 위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거나, 마치 보험처럼 평소에는 알아서 살다가 문제가 일어날 때만 불러서 해결해달라는 식으로 취급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필요할 때는 “빨리 와서 도와주십시오”라고 하고, 불편할 때는 “좀 나가주십시오.”라고 주문하는 태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믿기는 그렇고 또 안 믿자니 영 찜찜해서 보험처럼 일단 걸어 놓자는 태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을 종처럼 대하는 태도로 “하나님, 빨리 이거해요. 저거 해요. 왜 안 하는 거예요?”라고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 비인격적인 관계, 내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정말로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1:1의 인격적 관계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방에 있다가 거실로 나와서 ‘내가 왜 나왔지?’라고 한 적이 없으십니까?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믿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내 머리카락인데도 흰머리가 되지 말라고 해도 희어지고, 빠지지 말라고 해도 빠집니다. 내 것인데도 내 말을 안 듣습니다. 자기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인생을 맡기고 살겠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인도하든지 남을 인도하든지 하는 것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주인으로 우리 삶을 돌봐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자꾸 벗어나서 다른 데로 가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붙들어 놓으려고 하시기에 때로는 어려움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나오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하나님과만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이 써놓은 편지들을 보십시오. 너무 답답해합니다. 성도들이 주님 안에 있는 이 풍성함을 너무 모르고 자꾸 다른 데를 기웃거리니까 너무 답답해서 그 풍성함을 좀 알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내내 외쳤던 메시지입니다. 내게로 좀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진정으로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은 다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멸망의 길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로 가야 우리가 잘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종으로 부리려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잘되게 하시기 위해서 이리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절망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 하나님이 내 삶을 정리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려고 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주님과 나 사이를 막고 있는 것이 없는지 점검하고 그러한 것들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과 생기 넘치고 뜨거운 1:1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있는 어떤 물건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내가 필요할 때마다 나와서 나를 도와주는 존재가 아니라, 내 삶 속에 살아 계신 주님이 되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상황은 계속 어렵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해도, 상황을 보는 내 눈이 바뀝니다.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뀌고, 두려움과 염려가 아니라 주님의 평안과 기쁨과 위로가 내 마음을 다스리게 되고, 결국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능력이 생깁니다. 이것이 믿음의 축복입니다. 3) 순종하는 믿음 (29-30)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에 대해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이 있는데, 그것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30절) 29절에서 예수님이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이 여인은 ‘내 딸이 나았는지 어쩐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라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하지 마시고, 직접 저희 집에 가서 귀신을 쫓아주세요.’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런 줄 알고 신뢰하며 집으로 갔습니다.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자기를 받아주신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자신을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의 길로 인도해주신 이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했기 때문에 믿고 갔습니다. 제가 확신하는 것은, 귀신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딸이 나았는지 아직 보지 못한 상태에서도 이 심각한 문제가 더 이상 이 여인에게는 문제가 될 수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딸이 낫고 안 낫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참되신 하나님과의 생생한 1:1의 인격적 관계가 예수님을 통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딸이 계속 귀신에 들려 있어도 이제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낫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치유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집으로 간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지 않고 혼자 간 것이 이 여인의 믿음과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로 고정시키고 믿음을 회복한 뒤에는, 문제를 직면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문제가 해결이 될지 어쩔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가지는 이상,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더 이상 내게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그 문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나를 가족으로 받아주신 주님께서 주님의 뜻대로 해결해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의 결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문제의 해결된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계속 주님께 붙어서 ‘아이, 그러지 말고 가달라니까요.’라고 하면 해결이 된 것이 확인이 안 됩니다. 집으로 가야 확인이 됩니다. 아직 해결이 되지 않았다면, 해결되는 시점을 향해 가고 있는 도중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든 순종하는 믿음, 문제를 향하여 담대히 나아가는 이 믿음, 그 결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축복이 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이렇게 나와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누구를 믿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헌신하고 있습니까? 또 어떻게 헌신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헌신해야 한다고 하니까 다음에 믿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매여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 ‘헌신’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6장 28-29절에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을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매일 깊은 인격적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헌신입니다.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눈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강요나 억지로가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내게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목사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에 의해서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다른 데 다 가보십시오. 더 좋은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렇게 갈 때에 내 삶에, 내 가정에, 우리 교회에, 어떤 문제가 와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의 헌신이 있는 삶은 그 눈을 하나님께 계속 고정시키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과 헌신의 삶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