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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9일 주일예배

추수감사절 메시지

어떤 상황에도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들어가는 말]

 

이번 목요일이 추수감사절이고 오늘은 교회에서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매년 추수감사절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는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마음을 돌아보십시오. 나는 정말로 감사합니까? 마음에 감사가 넘치고 계십니까? 오늘은 추수감사절이니까 무조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추수감사절이 되면 가족들이나 성도들 또는 주변의 아는 분들을 초대해서 함께 만찬을 나누곤 하는데, 올해도 계획이 있으십니까?

 

하지만 그렇게 음식을 준비하고 함께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날에, 오히려 음식을 만드느라 힘들어서 짜증이 나고 불평과 원망이 쌓이기도 합니다. 음식을 만들다가 도와주지 않는 배우자 때문에 짜증이 나고, 움직일 줄 모르고 소파에 누워 계속 먹어대며 풋볼이나 보는 가족(특히 아들)의 모습이 열받게 합니다. 교회에서도 함께 음식을 준비하며 나누는데, 힘들어서 짜증이 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런 마음도 듭니다. ‘괜히 Thanksgiving Day 같은 게 있어서 이게 무슨 고생이냐.’

 

여러분, 정말 그러십니까? 지금 뭔가 마음이 불편해서, 아니면 상황이 좋지 않아서, 아무리 추수감사절이 되었어도 감사할 게 없고 오히려 화가 나거나 괴로우십니까? 요즘은 미리 세일을 해서 조금 덜하지만, 그래도 Black Friday에 뛸 준비를 하느라 체력을 비축하고 계십니까? 과연 감사라는 것은 감사할 것도 없는데 억지로 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1.   감사 명령

 

먼저 생각해볼 것은, 감사가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액자에 넣어서 걸어두기도 합니다. 외우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왜냐하면 짧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실 말이 안 된다고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6-18)

 

여기 세 가지 명령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하라는 것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순종하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그래도 의지적인 부분이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교회에 나오라, 이런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이나 감사와 같은 것은 감정인데, 감정은 명령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마음이 슬픈데 기뻐하라고 명령한다고 기뻐집니까? 지금 내 마음이 낙심되고 절망스러운데 감사하라고 명령한다고 감사가 되겠습니까?

 

지금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서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가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더 마음이 안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 잔뜩 화가 나 있는 사람에게 가서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하면 더 화를 낼 겁니다. 사실 슬픔이나 절망이나 낙심과 같은 마음은 내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힘들어서 생긴 감정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명령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이 명령으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며 슬퍼하는 유족을 향해 울지 마라. 믿음의 사람은 울지 않는다. 아버님(어머님)은 천국에 가 계시다. 슬퍼하고 우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사실 그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슬플 때는 슬퍼하고 기쁠 때는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정상적인 마음 상태입니다. 슬픈데 자꾸 기뻐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감정을 조작하려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한다고 감정이 조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 감정을 조작하려고 들면 자기 내면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감정이 조작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런 명령을 내리신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말이 안 된다고 느껴지는 말씀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접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 여기에는 엄청난 메시지가 숨어 있구나.’ 내가 모르는 것이지 성경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말이 안 된다고 느껴지실 때는 여기에 뭔가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맞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성령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그것을 발견하려고 나아가면 됩니다.

 

오늘 말씀은 결코 감정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은 결코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그렇게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신도들입니다. 특히 이단들이 그런 일을 아주 잘합니다. 사람의 감정을 후벼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는 북 치며 찬양하라고 되어 있지만, 찬양할 때 사람을 흥분시키는 식으로 북을 둥둥 쳐서 가슴이 뛰게 만들고 흥분하게 만드는 것, 몽롱한 분위기를 만들어 뭔가 신령한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조작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자연스럽게 되면 괜찮지만,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려 할 때 그것은 조작일 뿐입니다. 이단들이 그런 것을 참 잘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거기에 넘어갑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절대로 감정을 조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무시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신앙은 감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감정을 조작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들고나와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힘들면 힘든 대로 나오고 슬프면 슬픈 대로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힘들면 하나님, , 힘듭니다.’라고 하고 슬프면 , 슬픕니다.’라고 하고,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도 힘들거나 슬플 때 그것을 말하며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정상이지, 힘든데도 안 그런 척하는 것은 믿음이 강한 게 아닙니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괴로운데 기뻐하라고 하고, 그래야 믿음이 좋은 거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영적 태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영적 태도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모두 영적 태도와 영적 방향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기도는 당연하고, 기쁨과 감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영적 태도와 영적 방향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고 또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2.   올바른 영적 태도와 방향성

 

그렇다면 올바른 영적 태도와 방향성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기쁨과 기도와 감사는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영적 태도와 방향성의 문제인데, 이것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감사는 상황이 좋을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영적 결단과 선택이다

 

사람들은 뭔가 일이 잘되거나 자기 뜻대로 풀려 가면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통 사람의 감사입니다. 그것도 감사이지만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일이 잘 안 되면 감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그런 식으로 상황에 따라 내가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상황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영적 결단과 선택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인데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이 이것을 모든 일에 대해 다 감사하라.’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헌금을 할 때 감사 제목을 써주시면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나중에 전달받아 기도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헌금 봉투에 범사에 감사합니다.’라고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추상적입니다. ‘범사모든 일을 말하는데, 모든 일이 뭐냐는 겁니다.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잘될 때든 안 될 때든, 다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감사하는 것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원어도 그렇고, 영어 성경으로 보면 ‘Give thanks for all things.’가 아니라, “Give thanks in all things (circumstances).”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모든 일 때문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긴 것 자체에도 감사해야 하고, 쓰러진 것 자체에도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감정 조작이 됩니다. 슬픈 일을 당했는데 그것으로 인해서도 감사하라고 하면 감정 조작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서 감사할 제목을 찾아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단과 선택의 문제입니다.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지금 나쁜 일이 일어났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인하여 무조건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일어나는 어떤 일이라도 그 속에서 감사 거리가 있으니까 그것을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거기에 감사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약속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감사 명령입니다.

 

여러분, 살다 보면 수많은 일들이 우리 삶 속에 일어나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 삶에 벌어지는 일 중에 간단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사실 그것이 한 가지가 아니라 그 안에 많은 것들이 합쳐진 상태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합쳐져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안 좋은 일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좋은 측면도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또 겉으로 보기에 좋은 일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안 좋은 측면도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일이 잘되거나 안 된다고 생각될 때 어떤 질문을 하시라고 했습니까? ‘과연 그럴까?’입니다.

 

좋은 일이 벌어졌을 때 과연 이게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이 벌어졌을 때 과연 이게 나쁜 일일까?’를 묻는 겁니다. 우리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복합적으로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좋은 일이라도 그 안에 나쁜 측면이 있을 수 있고, 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그 안에 좋은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삶의 사건에는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데도 우리는 삶에 일어난 어떤 사건의 여러 측면 중에서 그저 한두 가지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음이 붙들려서 그것이 주는 메시지를 받고 그것에 맞추어 살아갑니다. 좋은 일인 것 같으면 그냥 좋아하고, 나쁜 일 같으면 완전히 낙심합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 다른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어떤 사람은 굳건히 잘 버티고 어떤 사람은 그냥 무너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같은 일이라도 그 안에 여러 가지 측면이 섞여 있는데, 버티고 이기는 사람은 거기서 감사할 제목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무너지는 사람은 안 좋은 것만 보는 겁니다. 붙드는 것이 다르니까 반응이 달라집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대부분 사람들이 좋은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 몇 가지를 붙들고 거기에 사로잡혀서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행복과 감사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인생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게 아니라, 마치 끝없는 하수처리장 같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복들을 제쳐놓고 그저 깨진 것, 아픈 것, 상한 것만 붙들고 그런 더러운 것들을 하수처리장처럼 처리만 하다가 인생을 다 허비해 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하수처리장 같이 살아갑니다.

 

어릴 때 살던 곳 근처에 하수처리장이 있었는데 시설은 멋지고 대단해 보였지만 늘 악취가 났습니다. 아무리 잘 꾸며 놓아도 하수처리장은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살게 되면 평생 헐떡거리며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 속에서 그런 것들만 붙들고 살다가 끝나버리는 안타까운 인생이 되고 맙니다.

 

한국 속담 중에 좋은 것도 많지만 문제 있는 것도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라는 속담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에게 좀 심각한 증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지가 많으니까 조금만 바람이 불어와도 가지가 적은 나무보다 더 많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가지 많은 나무는 열매도 많다.’ 이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태도입니다. 사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가지가 많으면 열매도 많아야 하는 게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 그 많은 열매를 맺는 통로인 가지에 대한 감사를 하지 않습니다.

 

가지가 있어야 열매를 맺지 않습니까? 가지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열매를 많이 맺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인데, 그것은 잊어버리고 거기에 감사하지 않으며 살고 있습니다. 가지가 많은 나무는 그렇지 않은 나무보다 당연히 바람에 더 많이 부딪칩니다. 그러나 그만큼 열매도 더 많이 거둘 수 있는데, 바람에 부딪히는 것만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가지에 달릴 열매는 못 본 채, 그저 바람이 부는 것을 걱정만 합니다.

 

그만큼 사람은 낙관적이지가 않고 부정적이며 비관적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며 힘들어합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가진 게 뭔지 물품 명세서(inventory)를 만들어 보십시오. 깜짝 놀라실 겁니다. ‘이렇게 많은가?’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나에게 없는 것 한두 개 또는 두세 개를 가지고 불행해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지금 나 자신의 마음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힘들어하고 있다면 대부분 그런 것들 때문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보다 없는 것에 집중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러한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을 거부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가 안에 있어서 자꾸 부정적인 것을 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도, 자기에게 없는 것 딱 한 가지를 보면서 괴로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래서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우리가 목장에서 감사 제목을 자꾸 나누자고 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인 노력입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내려는 노력입니다. 그런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을 향해 오늘 말씀은 믿음의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감사 거리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찾아야 합니다. ‘지금 네가 못 보고 있어서 그렇지, 찾아보면 아직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주 많다. 차고 넘치는 것이 너무나 많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적 태도와 방향성의 문제이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죄악 된 본성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붙들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것들을 거부하고 감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백화점 중 제이씨 페니(JC Penney)가 있습니다. 지금은 평범하지만 처음에는 아주 좋은 백화점이었습니다. JC Penney 백화점을 세운 사람은 다름아닌 J. C. Penney라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천인 그의 이름의 JCJesus Christ가 아니라, James Cash Penney입니다. 그러니 돈을 안 벌 수가 없습니다. cash를 긁어모은 것입니다.

 

<평생감사, 실천편> 책에도 이 사람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월급으로 한 달에 $2.27를 받고 점원으로 시작했는데, 열심히 일하며 고생하다 자기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그러다 40대 때 1927년에 주식회사로 전환했는데, 1929년 증권 파동이 일어났고 그때 잘못 판단해서 엄청난 돈을 잃었습니다.

 

그 후 그는 낙담하고 고민하며 실의에 빠졌고 그때 대상포진을 앓게 되었습니다. 너무 아파서 밤마다 잠을 잘 수 없고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몸도 아프지만 잃어버린 것들, 실패한 것들에 대한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54세의 나이에 병실에서 뒹굴며 그렇게 고통스럽게 있는데, 하루는 병원 채플에서 찬송하며 기도하는 예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그것을 들으면서 영적으로 깨어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중에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철저히 어둠의 동굴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빛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찬란한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서 제 삶은 순식간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그 예배의 자리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붙잡았습니다. 그때부터 다시 시작하여 그가 은퇴할 때는 1,600개의 점포와 연간 4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시켰습니다. 그가 그날 무엇을 붙잡은 겁니까? 그가 그때 무엇을 붙잡았는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있습니다. 나중에 그가 은퇴한 목회자들을 위해 100채의 집을 지어서 바친 일이 있었는데, 그 봉헌식에서 그가 한 인사말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때 그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것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아직도 나에게 있는 것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참다운 복이 온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때 그가 발견한 빛은 감사의 관점 전환이었습니다. 자기는 다 잃어버린 줄로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인데, 그날 예배를 통해 관점이 바뀌면서 ,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들이 많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엄청난 부자들에게 당신은 얼마나 벌어야 만족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Just a little bit more(조금만 더).’ 그 인생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하는 인생이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별로 가진 게 없어도 내가 가진 게 이렇게 많구나.’라고 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없는 것 같아도 실제로 우리가 가진 게 많습니다. 일단 내 생명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얼마나 귀합니까? 그리고 가진 게 사실 많습니다. 그 적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정말 행복해집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한 달에 $2.27 받고 시작했던 때에 비하면 지금 내게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데 내가 왜 지금 이러고 있나?’ 하는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이 발견이 그를 살려냈습니다.

 

감사의 명령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조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감사 제목을 찾아내라고, 영적 선택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상황은 똑같지만 해석이 달라지면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이 일을 내가 바꿀 수 있습니까? 못 바꿉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 순간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일어났다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그러면 내가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해석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반응이 다른 겁니다. 제대로 해석한 사람은 거기서 살아나고,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사람은 거기서 무너지는 겁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그렇습니다.

 

감사는 우리에게 감사할 만한 상황이 주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오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감사의 상황을 선택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 결단이 바로 감사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기를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믿음에 있어서 감사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나 결과가 아니라 영적 태도와 방향성인데, 그 두 번째가 우리 삶을 걸고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이며 성취입니다. 그냥 상황이 좋으니까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상황에서 오는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삶을 걸고 반드시 이루어 내야 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는데, 내가 그것을 내 삶에서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은 듣기만 해도 얼마나 은혜가 됩니까?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 뒤에 뭐가 붙어 있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원하시는 바가 있으셨습니다. 아들을 죽음의 자리에 가도록 하시기까지 하나님이 얻고자 하셨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인 우리의 삶에 이 기쁨과 감사가 넘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가 슬픔 가운데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기쁨과 감사 가운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얼마나 기다리더라도, 너희 인생에 이 기쁨과 감사가 넘치기를 원한다. 나는 너희가 정말 기쁘게, 감사하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상황을 보고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분노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힘드니까 당연히 분노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거기 계속 머문다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계속해서 잡혀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죄가 됩니다.

 

성경이 명령하는 것은 그런 감정을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감정 조작이 됩니다. 감정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며, 그렇게 하면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슬플 때는 슬플 수 있고, 기쁠 때는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때로 우리는 아플 수 있고, 실패하여 힘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되는 게 없다고 하며, 불행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사업이 잘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안 되나?’ ‘저 사람은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안 되나?’ ‘저 친구는 학교에서 잘나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안 풀리나?’ 그런 느낌이 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내 삶 자체라고 정의해서는 곤란하다는 겁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내 삶은 원래 이렇게 재수가 없어. 내 삶은 원래 되는 게 없는 인생이야. 내 인생은 원래부터 외로운 것이었고, 원래부터 이렇게 힘든 삶이었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느끼는 순간이 올 수는 있지만, 결국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이며, 나는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약속해주셨기 때문에.’라고 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 감사 명령입니다.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 기뻐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는 마음 상태에 있으시다면, 너무 힘들더라도 이런 게 나야.’라고 그냥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해야 합니다. “이 모든 잘못된 것들은 내게서 떠나라!” 하고 명령하십시오. 그럼 떠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으니까 그렇습니다.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분하고 억울합니까? 그것들을 향해 나가라고 명령하십시오. 두렵고 고통스럽습니까? 열등감이 느껴지고 피곤합니까? 나가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이름으로 떠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예수 이름으로 나가라. 떠나라.’ 해도 안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기다리는 겁니다. 그때의 부정적인 감정이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런 감정은 속임수입니다. 진짜 내가 아닙니다. 절대 그때 감정에 근거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 안 되고, 기다려야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 상태에 있을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 반드시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거창한 것을 생각할 게 아니라 부부 싸움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부부 싸움을 할 때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데, 감정이 격해지고 막 화가 나다 보면 그냥 말을 막 해서 마음을 찌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감정이 속임수이기 때문에 그걸 다 쏟아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합니다. 그래서 그때 심호흡을 하시며 기도하십시오.

 

어제 라이브 영상 목회편지를 할 때 이 비법을 알려 드렸는데, 보신 분들이 계십니까? 굉장히 화가 날 때 꼭 이 방법을 써보십시오. 심호흡하는 겁니다. 화가 나는 순간, 독한 말이 나오기 직전에 일단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는 입을 벌려서 내보내는 겁니다. 들이마실 때는 코로, 내보낼 때는 입으로 하는 겁니다. 지금 한번 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냥 이렇게만 하지 마시고, 분노가 막 치밀어 올라서 독한 말을 쏟아내기 직전에 공기를 코로 들이마시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온갖 하나님의 좋은 것들로 내 안을 채워주십시오. 성령 충만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며 숨을 들이마시는 겁니다. 그리고 숨을 입으로 내쉴 때는 내 안에 있는 이 악독함과 분노가 지금 떠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며 내쉬는 겁니다.

 

좋은 것은 채우고 나쁜 것은 내보내는 겁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영성가들이 이 기도를 실제로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화가 크게 치밀어 올라서 독한 말을 쏟아내기 직전에 이것을 꼭 해 보십시오. 굉장한 효과를 보실 겁니다. 그렇게 하면 후회할 일을 안 만들게 됩니다. 오히려 감사할 상황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가면 진짜 감정이 오는 겁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잘못된 감정에 휩쓸려 망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아들을 죽도록 내어주면서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너를 향한 나의 뜻이 기쁨과 감사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으면 나쁜 감정들이 지나가고 기쁨과 감사가 오게 됩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잘못된 감정에 근거해서 결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삶은 그런 상황과 감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감사를 찾아 선택하고 삶을 거기에 맞추어나가야 합니다. 바로 그런 영적 태도가 신앙적 감사로서 주어진 명령입니다.

 

 

[나가는 말]

 

사실 이 미국이 원래는 바로 그런 명령 위에 세워진 나라가 아닙니까? 미국에는 부활절이나 성탄절 등 많은 절기가 있는데, Thanksgiving Day이야말로 미국 고유의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미국만이 가지고 있는, 이 나라의 기초가 세워져 있는 것이 이 추수감사절입니다. 그 유래를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영국에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청교도들이 많은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중 126명이 63일간의 항해를 통해, 180톤짜리 Mayflower라는 배를 타고 왔습니다. 그래서 보스턴 근처의 플리머스(Plymouth)라는 항구에 내렸습니다. 그들은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땅이 힘든 곳이고 척박한 줄 알고 왔습니다. 단 한 가지,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며 예배하겠다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했을 때 바로 겨울이 닥쳤습니다. 오두막을 짓고 사는데 얼마나 혹독한 겨울이었는지, 이미 오면서 배에서도 많이 죽었지만 겨울이 지나고 그들 중 거의 절반이 죽고 말았습니다. 봄이 되었는데 얼마나 암담했겠습니까?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 땅의 원주민 인디언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이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씨도 갖다주었습니다. 씨를 뿌렸는데 농사가 잘되어서 가을에 풍작을 거두었고,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원주민들을 초대하여 3일 동안 축제를 벌인 것이 첫 번째 Thanksgiving Day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Thanksgiving에 대한 것에서 놓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추수감사절이 추수에 대한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영어로는 Thanksgiving Day인데 추수라는 뜻의 harvest라는 말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추수감사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추수에 대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만약 추수에 대한 것이라면, 추수감사절이 추수하는 10월에 와야지 왜 11월 말에 합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Thanksgiving Day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2년 뒤 매사추세츠 주지사인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의 칙령에 의해서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곡식을 풍성하게 내려주셨고, 사냥감과 고기가 많은 바다를 주셨다. 야만인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셨고, 흑사병과 각종 질병으로부터 지켜주셨으며, 또 양심을 따라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그대들의 행정관인 나는 그대들 순례자들 모두, 그대들과 아내들과 어린 자식들이 모임 장소에 함께 모이고, 오전 9시와 12시 사이 주후 1623, 곧 그대들 일행이 이 터전에 상륙한 지 제 31129일 목요일에 그대들의 목사로부터 말씀을 들으며 축복을 받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을 선포하노라.”

 

그러니까 원래 Thanksgiving Day는 추수가 잘되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신대륙에 정착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한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이 땅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지만, 첫발을 내디디면서 그들의 삶의 방향을 감사로 잡았던 것입니다. 비록 절반이나 되는 사람들을 땅에 묻었고 그 이전에도 바다에서 많이 보냈지만, 원주민들을 보내셔서 살려주시고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셨으니 감사하다는 감사의 조건을 찾은 것입니다.

 

너무나 혹독한 환경이었지만 감사의 제목을 찾아냈습니다. 자기들의 삶을 감사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는다고 방향을 잡은 것입니다. 영적 태도와 방향성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날을 Thanksgiving Day로 정한 것입니다.

 

이 나라는 그런 방향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미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 특히 믿음의 사람들은 매일이 Thanksgiving Day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정신으로 매일을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찾아보십시오. 분명히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많이 주셨을 것입니다. 찾아보십시오. 중요한 것들을 많이 주셨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매일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어떤 상황에도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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