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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6일 주일예배

제자의 삶 산상수훈 19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태복음 69~13)

 

[들어가는 말]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지만, 저도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하는 소위 모태신앙입니다. 제가 아기였을 때 교회에 다녔던 기억은 당연히 나지 않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그저 컴컴했던 것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꽤 어린 나이 때부터 매주 제 발로 걸어서 교회를 다녔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가 만 5살쯤 되었을 때인데, 제가 원해서 매주 교회에 갔던 기억이 분명하게 납니다.

 

그때 저희 가족이 청와대 근처에 있는 옥인동이라는 데 살았는데, 거기는 조금 언덕이 있는 동네였습니다. 제가 살던 집에서 언덕을 조금 내려가면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그때 어린이들을 맡아서 인도하던 분이 중년의 여자분이었던 것으로 제가 기억합니다. 아마 30대나 40대였을 텐데, 아주 어렸던 제 눈에는 굉장히 나이가 많으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동네의 작은 교회였기에 아이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게다가 유치반은 더 적어서 서너 명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 선생님이 아이들을 매주 교회에 나오게 하는 아주 기가 막힌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는가? 정말 저도 매주 교회를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하는 그 선생님만의 아주 기가 막힌 방법, 그것은 바로 귀하고도 귀한 미제 캬라멜이었습니다. 네모나고 조금 누런 색깔이었는데, 가끔 까만 색깔 캬라멜이 있었습니다. 초콜릿 맛이었는데, 그걸 서로 먹겠다고 하며 아이들 모두 자기에게 달라고 조르던 기억도 납니다. 아주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제가 교회 가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매주 캬라멜 얻어먹겠다고 열심히 나갔던 겁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일단 교회에 나오면 그 캐러멜을 아이당 두 개씩 주셨습니다. 그리고 뭔가를 잘할 때마다 또 하나씩 상으로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잘하려고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 구절을 암송하면 하나 주고, 특히 주기도문을 잘 외우면 두 개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얻어먹겠다고 열심히 성경 구절 외우고 주기도문을 외우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 후 다른 데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서는 안타깝게도 캐러멜을 안 줬습니다. 그래도 그 교회 초등부에 다니면서 계속 주기도문을 열심히 외워서 캐러멜은 아니었지만 공책이나 연필 같은 상을 줬던 기억이 또 납니다. 그때 그래서 열심히 외웠는데, 그 열심히 외운 것을 지금도 외우고 있는 겁니다. 그때는 이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외웠습니다. 그때는 성경책이 개역 한글이니까 조금 더 말이 어려운 것이었는데, 지금도 그래서 새로 나온 번역으로 외우려고 하면 더 힘들고, 옛날 외웠던 그것으로 계속 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상을 받겠다고, 캐러멜 얻어먹겠다고, 공책과 연필을 받겠다고 열심히 외웠던 주기도문 즉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주기도문은 어떤 기도인가

 

우리는 계속해서 지금 산상수훈(마태복음 5~7)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 중심이 바로 주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크게 예수님의 말씀과 기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말씀이 주기도문 안에 담겨 있고 또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삶과 메시지 전체가 이 짧은 주기도문 안에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또 많이 그리고 오래 기도하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그 참된 정신을 가지고 자기의 기도 생활을 점검하며 기도해 나가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무조건 기도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기도하는 게 필요합니다.

 

지난주 본문인 5~8절에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기도의 올바른 내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지난번에는 어떻게 어떤 태도로 기도해야 하는가를, 오늘은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십니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이 기도를 함으로써 캐러멜을 얻고 내가 원하는 상을 얻겠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뭔가 나에게 유리한 것을 얻어내는 게 아니라,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사실 모든 기도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목적과 인생의 목적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목적도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여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 성도의 삶,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내 나라를 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고, 또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며 그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인생의 목적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그렇게 살 이유가 없고 그럴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을 볼 때 그와는 반대일 때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목사이면서도 가끔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는가?’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을 높이려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내 나라, 내 왕국을 세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특히 그랬지만, 지금도 보통 기도회나 예배가 끝날 때 예배를 마치면서 주기도문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토요새벽예배라든지 또 가끔 제가 없을 때 장로님들이 인도하실 때도 주기도문으로 마칩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이 곧 예배를 끝낼 때 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배를 끝낼 때도 물론 사용할 수 있지만, 주기도문은 사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많이 기도하거나 뜨겁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아무리 오래 기도해도 잘못 기도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뜨겁게 기도해도 그것이 잘못된 열정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올바르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의 핵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 구절이 나중에 우리가 살펴볼 6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이 사실은 주기도문의 핵심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더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자기 필요를 먼저 구합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아무리 열심히 하고 아무리 오래 해도 이기적인 기도가 되고 기도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이기적으로 되어가는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기도의 태도와 내용을 여기서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구하고 나서 그다음에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표현했는데,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하여 그 순서를 바꾸십니다. 땅의 것을 먼저 구하는 대신 하늘의 것을 먼저 구하라고 하십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기도입니다. 기도가 바뀔 때 삶이 바뀌고 기도가 바뀔 때 또 우리의 미래가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살고 있다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지금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안 하고 있거나 기도를 잘못할 때 잘못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태도로 기도해야 하고 또 올바른 내용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기도 중에 기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십니다. 이 기도를 우리가 주기도문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예수님이 직접 이렇게도 물론 기도하셨겠지만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해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기도이기에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2.   기도의 대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9a)

 

우리가 이 주기도문을 살펴볼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기도의 초점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서부터 이 땅을 보는 관점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보게 해줍니다. 내 삶이 세상에 집중하고 온통 눈이 거기에만 집중되어 있고 온통 관심이 거기만 가 있는데, 우리는 이 기도를 할 때 나에게서부터 하나님에게로 관심이 옮겨지고 또 이 세상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로 우리의 초점이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기도라는 것은 정말 놀랍고 신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유한한 존재인데, 저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신 그 하나님 나라와 기도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우리가 유한한 이 땅에서 기도할 때 그것이 저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인 하나님 나라로 연결되고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땅과 하늘이 연결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아버지, 우리의, 하늘에 계신 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아버지라는 단어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물론 요즘 시대에는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굉장히 안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들이 자녀를 학대하고 폭행하며 심지어 성범죄까지 저지르는 그런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년 전부터 여성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지 말고 어머니라고 하자고 주장했고, 그게 아니면 아예 그냥 아버지나 어머니라는 말을 떼고 하나님으로만 부르자고 주장했습니다. 요즘 진보적인 미국 교회들을 가보면 하나님을 부를 때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영어로 ‘God Himself’라고 하는데, 그런 교회에 가보면 그냥 ‘God Godself’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라는 단어가 너무 안 좋은 이미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의 관점을 가지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2천 년 전 당시를 해석하면 안 되고, 그 당시 문화 속에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해석해야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2000년 후인 지금 21세기 개념을 끌고 들어가서 이건 너무 남성 우월주의적이다.’라고 해석하면 성경을 잘못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헬라어로 파테르인데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사실 예수님밖에 안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셨고, 이 특권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또는 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잘 부르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안 믿으면 하나님이 자기의 아버지가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라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좋지만, 기도하실 때 아버지!’라고 해보십시오. 느낌이 다릅니다.

 

그 당시로 이것은 아주 놀랍고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제가 대통령에게 찾아가서 대통령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사람, 미쳤구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대통령 근처에도 못 가고, 혹시라도 옆에 갈 수 있어도 대통령에게 아버지, 저 아들이에요.’라고 하면 저 사람, 미쳤다라고 생각할 게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도 높으신 하나님,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우리가 아버지라고 한다는 게 보통 일입니까?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그 생각을 안 하는데,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이고 얼마나 엄청난 은혜가를 알아야 합니다. 특히 그 당시에는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다는 것이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종교가 자기들이 믿는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는 신이 어디 있습니까? 이단들이 제일 우두머리인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지만, 신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는 데는 없습니다. 오히려 전부 다 노예로 삼으려고 하지, 아들딸로 삼으려는 데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친근한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보통 하나님이라고 하면 제3자처럼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저 멀리 계신 어떤 절대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그 당시 1세기 유대 상황에서 자녀를 전적으로 돌봐주고 보호하고 인생을 책임져주는 존재로서의 아버지로 부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딸의 관계로 부르라고 하십니다.

 

기도는 이런 관계성에서 시작합니다. ‘나는 기도를 잘 못하겠다.’라고 하시는 분들은 하나님이 정말 내 아버지이신가를 먼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면 기도가 어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자기 아빠 엄마에게 아빠, 이거 줘. 저거 줘. 이거 해줘. 저거 해줘.”라고 하는 게 뭐가 어렵습니까?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어린아이처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얘기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삶에 대해서 이것저것 다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거기에 우리의 신앙고백이 있고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어디 계십니까? 이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늘에 계신다고 하니까 많은 사람이 sky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도 그렇지만, 영어로도 sky가 아니라 heaven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물리적인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이 하늘은 무한히 높은 곳을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을 말합니다. 이러한 무한하신 하나님, 절대자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면 누구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다고 하니까 자꾸 저 멀리 계신 것으로 생각하는데,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내 주변은 다 하늘입니다. 내 주변은 다 어떤 영역이고 공간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계시고, 나라 안에도 계시고, 내 사업체 안에도 계시고, 내 직장에도 계시고, 우리 교회에도 계시고, 우리 목장에도 계시고, 우리 집에도 계시고, 어디나 계시고, 내 마음에도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나 통치하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할 때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 삶에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내 삶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도록 내가 내어드리고 있는가, 이게 문제입니다. 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시도록 할 때 내가 있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또 뭐라고 하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각자 개인적으로 할 때도 나의 아버지만이 아니시라 우리 아버지이시고, 같이 모여서도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기도를 넘어서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부를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내 삶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하늘의 눈으로 내 삶과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볼 때, 또 인간을 볼 때도 영원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됩니다.

 

기도는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통로가 됩니다. 특히 땅에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는 땅의 문제를 하늘의 능력과 연결시켜 주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땅을 하늘과 연결시켜서 땅을 살려내는 통로입니다.

 

 

3.   주기도문의 내용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데,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사람을 향한 기도입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이 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까? 어떤 사람이 와서 질문하니까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도 그와 같은데, 즉 똑같이 중요한데, 내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하셨습니다(22:37-40).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며,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앞의 세 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도, 뒤의 세 가지는 이웃을 사랑하는 기도입니다.

 

1)  하나님을 향한 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도

 

(1) 하나님의 명예를 구하는 기도

 

첫 세 가지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기도인데, 9절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신 다음에 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일단 대상을 부르시고, 그다음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십계명 중 제3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오용하는 사람도 많고 악용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관용어처럼 쓰는 “Oh, my God”을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른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만 그런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도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을지 모릅니다. 목회자도 그렇고 교회 중직자들도 그렇고, 소위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당하게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과 자기주장의 합리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들이 뭐가 있습니까? 주로 할렐루야아멘을 많이 씁니다. 우리 교회가 할렐루야는 별로 많이 안 하는 것 같은데, 기도할 때는 다 아멘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할렐루야와 아멘이 뭡니까? ‘할렐루야주님을 찬양하라라는 명령문이고, ‘아멘그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는 믿음의 응답입니다.

 

하지만 그런 말조차 우리가 얼마나 잘못 사용할 때가 많습니까? 조금만 뭣 하면 할렐루야라고 하고 또 아멘을 합니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그냥 막 쓰는 겁니다. ‘Oh my God’이라고 하는 사람들만 뭐라 할 게 아닙니다. 이것에 대해 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할렐루야, 아멘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잘 생각하면서 사용해야겠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원합니다.’라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높여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는 기도

 

나라가 임하시오며” (10a)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도의 두 번째로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위에, 내 삶에, 내 마음에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통치가 내 삶에 임하기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에게만 나타난 아주 독특한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90번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쓰셨고, 또 신약에는 122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예수님이 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이면서도 현재적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나의 삶과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 요한과 똑같은 말씀을 선포하며 시작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 천국이라는 말, 즉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이제 죽을 때가 다 됐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나를 통해 이 땅에 오니까 빨리 회개하라.’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지구 종말 때 하나님 나라가 영원히 임하겠지만,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예수님을 통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끌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이 될 수 있고 그러한 삶으로 살 때 내 삶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간구하며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여기서 뭐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까?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게 하시고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오게 하도록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라는 겁니다.

 

여러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오해하는 게 뭐냐 하면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라고 하니까 예수 믿고 나는 이제 구원받았다. 나는 천국에 간다.’ 하고는 나가서 아무렇게나 산다는 겁니다. 이전과 똑같다는 겁니다. 뭐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합니다.

 

그것은 진짜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정말 구원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이 확정된 사람은 이 땅에서도 바로 그 천국이 임하도록,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에, 자기 가정에, 또 자기의 일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애쓰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엣도 이루어지이다” (10b)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직전에 그 근처에 있는 겟세마네라는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을 옮겨 주십시오.”라고 하신 다음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완전한 적용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내 뜻을 하나님이 이루어 달라고 구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이것을 원하는데 하나님이 해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비슷해 보이는데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하늘, 즉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땅에서 이루어질 일만 남은 겁니다. 하나님 나라(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땅이라고 해서 저 멀리 있는 어디가 아니라 바로 내 삶입니다. ‘내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됩니다. 기도를 통해 내 뜻을 하나님께 통과시키고 결제받으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것, 내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우리 인생이 제대로 됩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 뜻이 다 이루어지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옥이 됩니다. 우리 각자가 원하는 게 다 다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원하고 저 사람은 저것을 원하며 서로 원하는 게 엉키고 설켜서 이 세상은 피바다가 되고 지옥이 됩니다. 지금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냥 흉기를 마구 휘두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라고 하며 막 해보십시오. 이 세상은 정말 지옥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만약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여기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고 구하며 산다면 정말 천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 정신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것,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기 뜻을 이루려는 욕구가 너무나 강합니다. 그것을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의 핵심이 자기 뜻대로 하는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내 삶에는 하나님이 필요 없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 이게 죄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때 세상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삶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필요 없고 이제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살겠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겠다.’라고 했을 때 결국 죄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자기 뜻을 끝까지 주장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으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16:24)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정말로 원한다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싫은데 억지로 내려놓으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면 조금 쉽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뭘까를 생각해보면서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할 때 인생이 참 아름다워집니다. 평안을 얻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나는 이걸 원하니까 하나님이 이걸 해주셔야만 해.’라고 하며 거꾸로 가면 인생이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힘든 것이 바로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힘든 겁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이름이 지금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도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이런 기도를 하라고 하셨습니까?

 

기도를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나는 알아서 하겠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데에 내가 바로 거기 동참하겠다는 것,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결단의 고백입니다. 내 삶에, 내 가정에, 내 사업체에, 내 직장에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도록 내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실제

 

이것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이렇게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 오늘 저의 일정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저를 통해 높아지게 해주십시오.’ ‘제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주십시오.’ ‘내 자녀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높아지는 일이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그저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내 자녀가 잘되게 해주시고, 건강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도 물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내 마음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내 자녀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합니다.’와 같은 기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를 위해서는 오늘 제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해야 하는데, 이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나가게 해주십시오. 내 자녀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인생의 목표가 성공이나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되도록, 그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이 되도록 해주십시오.’ 이런 것에 기초하여 더 구체적인 기도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2)  사람을 향한 기도, 이웃을 사랑하는 기도

 

주기도문에서 뒤의 세 가지는 이웃을 사랑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고, 또 우리 자신을 위한 간구이기도 합니다.

 

(1) 오늘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1)

 

사람을 향한 기도의 첫 번째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 그날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간편하고 단순한 삶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삶 공부 때 단순한 삶’(Simple Life)을 종종 이야기합니다. 요즘 삶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심플(Simple)하게 살지 않으면 신풀(Sinful)하게 산다.” 심플하게, 단순하게 살지 않으면 죄악 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자꾸 죄를 짓게 됩니다.

 

여기 보십시오. 몇 년 동안, 아니 며칠 동안도 아닙니다. 양식을 쌓아놓기를 구하는 게 아니라, 오늘 먹을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먹을 양식을 위해 기도하며 욕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만나를 내려 주셨을 때 보였던 그들의 반응입니다. 만나를 하루에 자기 식구 숫자의 양만큼 걷어가서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더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도록 아주 정확하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내일 혹시 이게 안 내릴까 봐 내일 것까지, 모레 것까지, 일주일 치까지 막 거두어 쌓아놨더니 썩어 버렸습니다.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만나를 그날그날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가 양식을 구하는 것도 그날, 그날을 위해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요즘 어떻습니까? 엄청나게 쌓아놓으면서 몇 년 치를 쌓아놓고 살려고 합니다. 특히 노후대책 같은 것을 위해서도 굉장히 애를 씁니다.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지혜롭게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너무 탐욕을 부린다는 겁니다. 지금 이 시대에 사람들은 오직 자기밖에 모릅니다. 지금 옆에서 다른 사람은 굶어 죽어가고 있고 엄청나게 고난당하고 있는데, 자기는 쌓아놓고 또 쌓아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고만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의 삶이겠습니까?

 

단순한 기도는 정말 위대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큰 문제나 엄청나고 거창한 것만 기도하려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오늘 먹을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우리가 먹을 양식조차도 사실은 내 힘으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먹을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의 어떤 문제도 하나님께 내어놓고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기도가 사실은 위대한 기도입니다. ‘내가 이런 기도를 하면 너무 내가 구차해 보이고, 하나님께 죄송해서 나는 이런 기도를 못하겠네요.’라고 하는 분들이 계신데, 완전히 오해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는 뭐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 자녀가 자꾸 내 눈치를 보면서 이런 건 아빠엄마한테 얘기하면 괜히 좀 미안할 것 같아.’라고 생각하며 자꾸 말을 하지 말아보십시오. 그러면 부모 입장에서 그게 좋습니까? 하나도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가 납니다. ‘얘는 왜 나한테 달라고 하질 않나? 달라고 하면 줄 텐데 왜 자꾸 눈치 보면서 슬슬 다른 데로 자꾸 가지?’

 

하나님도 똑같으십니다. 그냥 말하면 되는데 이런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 너무 죄송해서 못하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게 더 죄송한 겁니다. 그냥 하면 됩니다.

 

 

(2)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기도

 

이웃을 사랑하는 기도의 두 번째는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2)

 

이것은 내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와 함께 타인의 죄를 용서해 주겠다는 서약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용서받았으니 나도 용서하겠다.’라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사실 이것은 관계가 아닙니까? 그래서 뒤의 14~15절에 보면, 이런 잘못을 용서하는 문제에 대해 예수님이 굉장히 심각하게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8장에 가보면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18)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관계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고 싶으신데 왜 우리가 복을 잘 받지 못합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증오와 미움이 아직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처를 받아서 그럴 수도 있는데, 그것을 해결해야지 자꾸 그것을 상대방을 미워하는 명분으로 쌓아놓고 용서를 안 하면 안 되겠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결국은 그게 자기에게 감옥이 됩니다. 내가 아무리 내 죄를 많이 회개했어도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것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결국 죄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운전할 때 기어를 파킹(P)에 놓았다가 드라이브(D)로 바꾸면 차가 가야 합니다. 가끔 파킹에서 드라이브로 바꾸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는데 왱 소리만 나고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중립(N) 기어에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도 차는 전혀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아무리 많이 회개해도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것을 용서하지 않으면 바로 그와 똑같다는 겁니다. 하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우리 신앙은 전혀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번에 우리가 다루었던 것처럼 마태복음 523-24절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빨리 가서 해결하고 와서 그다음에 예물을 드리며 예배를 드려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관계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사실은 예배가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사람이 정결하고 깨끗하며 그렇게 다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시험과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13a)

 

시험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사실 실망스러운 게 얼마나 많습니까? 살다 보면 시험에 들 만한 게 참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 어떤 사람이 안 보일 때 왜 이렇게 요즘 안 보이세요?”라고 물으면 , 시험에 들었어.”라고 말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시험에 들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시험에 들면 안 됩니다. 시험에 안 들어야 합니다.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그것이 누구 손해입니까? 자기 손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를 잘 아십니다. 그런데 믿음으로부터 멀어지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주님이 교회 공동체를 왜 주셨습니까?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라고 하시는데, 그러니까 교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혼자 드릴 수 있지만 왜 같이 모여서 드립니까? 공동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같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교제를 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그냥 무너집니다.

 

 

3)  영원을 바라보는 기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현재를 위한 기도입니다. 또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은 과거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미 죄를 지었으니까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은 미래를 위한 기도, 또 영원을 향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이 송영에 해당하는 기도를 하십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3b)

 

옛날 번역에는 대개 나라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찬양곡에도 대개가 붙어 있는데, 영어로는 “For”이고 헬라어로는 가르(Gar)”라고 돼 있기에 그렇게 번역했지만 새로운 번역들(새번역, 개역개정)은 그것을 뺐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이 부분이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괄호를 쳐 놓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주님의 주권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찬송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로부터 이사 가서 다른 교회를 가게 되면서 이제 더 이상 미제 캐러멜을 얻어먹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속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왜냐하면 꼭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시니까 외운 것입니다. 어린이 예배는 항상 끝날 때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끝났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것을 외우는 것이 필요하고, 또한 계속 이 기도를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주기도문뿐만 아니라 바로 이 주기도문의 정신을 가지고 우리가 평소에 기도할 때, 그러한 기도야말로 현재와 미래, 특히 미래의 안전을 위한 지혜가 됩니다.

 

우리는 노후대책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합니까?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후대책은 준비하지 않고 있습니다. 노후대책도 중요하지만, 영원히 살게 될 사후대책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영원을 준비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사후대책을 세우고 있습니까?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의 정신으로 우리가 매일매일 기도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영원을 위해 준비하고 투자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들이 다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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