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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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6일 주일예배
✦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 10 ✦
“행함을 통해 드러나는 참 믿음”
(야고보서 2장 14~26절)
[들어가는 말 – 가정교회 사역에 관하여]
조금 전 간증도 해주셨듯이, 지난주 가정교회 리더십 컨퍼런스에 잘 다녀왔습니다. 제가 목회자 컨퍼런스는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다녔지만, 이번 리더십 컨퍼런스가 지난 여러 목회자 컨퍼런스들보다도 더욱 좋았던 컨퍼런스였습니다. 왜냐하면 찬양 팀으로 제가 앞에 많이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또한 그 내용이 더 뛰어났기 때문도 아니라, 도전과 감동과 은혜는 이전과 다 비슷했지만, 무엇보다 이번에는 저희 부부를 비롯해서 우리 교회 목자 세 가정과 같이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목회자 컨퍼런스를 혼자 다니면서 너무 아쉬웠던 것은, 이 좋은 내용을 저 혼자만 경험하고 저 혼자만 좋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갔다 와서 그것을 나누긴 하지만, 그리고 목자 컨퍼런스에도 몇 가정들이 그 동안 참석하고 왔는데 다녀온 분들은 좋았지만 다른 분들과 온전히 공유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같이 갔던 8명이 함께 그 경험을 공유했다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우리 교회 목자 부부들과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서 그 도전과 감동과 은혜를 같이 공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행복했습니다.
다음에는 꼭 모두 같이 갔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이런 컨퍼런스가 열릴 것 같은데, 소위 ‘중직자’라고 불리는 분들은 같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빠서 못 가고, 시간이 없어서 못 가고, 돈이 없어서 못 간다고 하는 것은 이유가 안 됩니다. 호주 시드니에서 오신 분들을 보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분들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닙니다. 비행기만 20시간 이상 타고 와야 했고, 커넥션이 잘 안 되어 고생도 했고, 1인당 비행기 값만 해도 $2500이 넘는데, 부부가 오면 그게 얼마입니까? 게다가 어린 아이들(1살, 2살 등등)까지 두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헌신을 하니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에 계신 시부모님과 친정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봐주러 오셨는데, 대부분 안 믿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전 주일에 그분들 중 다수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면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를 다 채워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다 채워주시면 헌신하겠습니다.’라고 하지만, 일단 헌신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안 될 것 같아도 정말로 모든 것이 채워지는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가정교회로 전환하여 사역한지가 어느덧 10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정교회를 하게 된 것은, 가정교회 그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 예수님이 원하셨던 그 교회를 회복해보자는 목적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성경적인 교회를 회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우리의 행복은 따라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행복하지 않습니까? 내 행복을 내가 먼저 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을 먼저 구하면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실제로 그 동안 우리 교회의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을 봅니다. 제가 부임한 초기에 <새가족반>을 하며 방문자들에게 우리 교회에 대한 첫 인상을 물어보면,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고 하거나 환영을 별로 안 해준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인들이 밝다’, ‘분위기가 따뜻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변화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정교회로 전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주님 앞에 서는 날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이 지구에서 영원히 사실 분이 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사망률은 100%입니다. 언젠가 다 죽습니다. 그런데 마치 나는 안 죽을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 죽습니다. 언제인가 하는 시간문제이지, 우리는 다 죽습니다.
우리가 정말 성경을 믿는다면, 죽은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섭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분명히 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서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들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매일 삶 속에서 하고 계신 일들 중에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들고 갈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습니까? 돈을 들고 가겠습니까? 무슨 학벌, 배경, 집안, 사회적 성공 같은 것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1센트도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설 때 갖고 갈 것,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영혼입니다.
제가 이번 컨퍼런스 때 목회자를 향한 권면 중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이번에 특별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야, 내가 저 영혼을 네게 5년, 10년 맡겨주었다. 그런데 쟤는 왜 여기 안 오고 저기 지옥에 가 있느냐?’라고 하시면 큰일입니다. 그것은 담임목사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교회에 나오는 영혼들이 천국에 못 가고 지옥에 가면 담임목사가 책임져야 할 일이라는 겁니다. 그것에 제가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목장에 소속되어 출석하시고, <생명의 삶> 공부도 들으시고, <새가족반> ‘예수영접모임’도 하셔야 등록을 받아줍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 많이들 안 오십니다. 등록 과정이 까다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안 하면 편합니다. 와서 이름 쓰면 등록되었다고 하고, 조금만 열심히 하면 서리집사 받으라고 하고, 계속 열심히 하면 안수집사 되고, 또 더 열심히 하면 장로가 되고 그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수집사나 장로가 되고 심지어 목사가 되었는데 구원을 못 받았다고 하면 이게 얼마나 충격입니까? 그런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뿐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나는 영생을 얻었다. 나는 천국에 확실히 간다.’ 하고 대부분 믿으실 텐데, 그렇게 믿는 경우에도 점검을 해야 합니다. 믿은 게 다가 아닙니다. 믿었으면 주님의 제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어린 아기가 태어났는데, 5살, 10살, 15살이 되었는데도 계속 몸이 갓난아기로 있으면 큰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영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지가 5년, 10년, 20년, 30년, 60년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계속 어린 아기로 있으면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계속 아기에 머무릅니까? 하나님이 ‘너는 무엇을 하다 왔니?’라고 물으실 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다 왔습니다.’라고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놀다 왔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운동하고, 여행하고, 게임하고, 놀다 왔습니다. 드라마 보고 그러다 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는 섬긴 일이 없느냐?’라고 하시니까 ‘섬겼습니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시간에만 하고, 피곤하면 안 가고 그랬습니다. 저 사람은 내 마음에 너무 안 들어서 미워하다 왔습니다.’라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말씀드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 그런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녀라고, 크리스천이라고 하는데, 정작 그 삶을 보면 전혀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이 없는 것이 많은 경우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되지 말자고 노력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감사하며 ‘하나님, 제가 이렇게 살다 왔습니다. 저와 동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라고 기쁨으로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정교회를 하면서 사랑하고 섬기고 전도하는 것을 해보는 것입니다.
예배만 살짝 왔다 가면 제자가 되겠습니까? 살짝 와서 은혜만 받고 가는 게 예배가 아닙니다. 물론 은혜도 받아야 하지만, 그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 제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결단하며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참된 예배를 드린 줄 어떻게 압니까? 내게 결단이 있는가, 예배를 통해 헌신이 있는가를 점검해보면 됩니다.
거기서 다가 아니라, 감정의 터치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목장에 나가 서로 나누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고 하나가 되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가기 싫어도 가는 겁니다. 사실 가기 싫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목자 목녀 목부인데도 가기 싫을 때가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럴 때가 더욱 가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방향으로 가다가는 항상 어린아이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기 싫지만 옳으니까 하고, 내가 하고 싶지만 옳지 않으니까 안 하는 것이 성숙입니다. 그럴 때 믿음이 자랍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그런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자꾸 만나다 보니까 인간적인 약점도 보이고 꼴 보기도 싫고 별로 얘기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서 만나 얘기를 듣고 또 하고, 반갑게 사랑을 나누고 그래야 합니다. 너무 하기 싫은데 주님이 원하시니까 ‘그래 하자’ 해보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예수님을 닮는 것이지,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싹 피하고, 하기 싫은 것이 있으면 안 하고... 그래서는 어린아이 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추구해보자고 하는 겁니다.
삶 공부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말씀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목장에서는 감정적인 터치를 받으며,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서 힘을 모아 주님을 모르는 분들도 이 사랑을 알려주어 그 영혼이 구원받도록 함께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자라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에 함께 나와 말씀 앞에 결단하고 나아가, 그대로 삶 속에서 살아보는 겁니다.
이처럼 가정교회에서 사랑을 나누고 섬기며, 특히 주님을 모르는 VIP 분들을 초청해서 사랑의 섬김을 베풀어 그들이 주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정교회 정신의 핵심입니다.
1. 정말 믿으면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 보면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부하는 이유가 많은데, 그 중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안 믿지만 바르게 살고 도덕적으로 사는 분들이 예수 믿기가 참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분들 눈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위선자 같고, 말과 행동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르고, 자기보다 도덕적으로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런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를 내가 뭐 하러 나가나? 내가 더 나은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얌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이라면,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이 안 믿는 사람들의 삶과는 뭔가 달라야 하는데, 별 차이가 없거나, 더 탐욕스럽거나, 더 욕심이 많거나, 더 이기적이거나, 더 안 좋게 보이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예수 믿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해도 많습니다. 그렇다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4절)
여기서는 행함과 구원을 언급ㅎ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는 믿음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7-18절)
여기도 보십시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예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0절)
이런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허탄한 사람’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큰일 납니다. 이 말씀을 읽고서, ‘아, 구원은 행함으로 받는구나. 아무리 믿어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오해이고, 성경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볼 때, 분명히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착한 일을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믿음도 있어야 하고 행함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하나만 있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진짜로 믿은 것이라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엡 2:8-9, 새번역)
뭔가 착한 일을 해서, 내가 뭘 잘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에베소서는 바울이 썼고,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썼습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에는 행동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야고보서는 원래 유대인인데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쓴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그러면서 어떻게 믿음이 삶에 전혀 보이지 않느냐?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 믿음이 삶에 안 나타나고,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으냐?’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로마서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이지만 원래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로마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서는 이미 믿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위해서 쓴 것인데, 사실은 로마서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단지 같은 내용을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아무리 선을 행해도 완벽하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100%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끔 홈레스 사람이 길가에 서서 푯말을 들고 있으면 1불, 2불 돈을 주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것을 몇 번이나 해보셨습니까? 몇 번을 해보았기에 ‘나는 착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십니까? 백 번, 천 번 그런데 기 때문에, 누구든지 행위로 구원을 얻을 사람은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니까 로마서는 구원을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는지를 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뒷부분으로 가면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설명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무 행동이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가가 아니라, 구원을 받았다면 행동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이라고 하니까 더 혼동될 수 있는데, 사랑과 비교해 보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행함이 없는 사랑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 행동도 안 하면 그것이 사랑이겠습니까? 정말 사랑한다면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어쩔 수 없이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해주고 싶은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15-16절을 보면 한 가지 예가 나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5-16절)
아주 굉장히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입을 옷이 없고 그 날 먹을 음식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고 말만 하고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 그것이 과연 사랑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그런 사람을 향해 아무 사랑은 베풀지 않으면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기도도 안 해줍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면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사랑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것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안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차갑고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적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정말 사랑을 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사실 야고보가 말하는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이 따로 있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 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아예 믿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로 그렇다고 동의하는 것을 믿음인 줄 오해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오래 교회를 다녀서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또 부활하셨다는 것을 머리로 안다고 해도 그것은 그냥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지 믿음은 아닙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내가 안다고 하는 것과 그 자녀들이 아는 것은 다릅니다. 내가 백악관에 가서 ‘나는 트럼프 대통령을 잘 압니다. 지금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셔츠도 입고 있을 정도입니다.’라고 하며 들어가려 하면 체포됩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이 아빠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 무조건 통과입니다. 정말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인격적인 관계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19절)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귀신들도 그것을 다 압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며 떱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하나님을 믿습니까?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해야 하는데, 귀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반대 일만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포함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것은 정말 믿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믿으면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2.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
1) 아브라함
야고보는 행동하는 믿음의 인물로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1-24절)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으로,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살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땅으로 이민을 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그의 후손을 큰 민족이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이를 전혀 낳지 못하고 할머니가 된 그의 아내 사라는 90세가 되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인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이 십대 소년이 되었을 때 잡아서 제물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 명령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맞나?’ 하며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막 잡으려 할 때 하나님께서 말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에 대해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17-19)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이삭을 통해 수많은 후손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잡아 죽여도 하나님께서 능히 그를 다시 살려주실 것으로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해주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정말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약속이 없거나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자기 혼자 믿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착각내지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먼저는 약속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또 그것을 믿어야 하며, 믿었으면 행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도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19-20)
저는 이 말씀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묻어 두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마음을 합해 기도할 때 응답해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전 교회에서도 그랬고, 지금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이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해서 응답이 되면, ‘어차피 될 것이 되었겠지.’라고 할지 모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될까? 그건 옛날 얘기지 지금은 달라.’ 또는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살면 세상에서 망하지.’ 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대로 하면 반드시 잘 됩니다. 복을 받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1:25).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 믿고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엄청난 복을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고 행하는 자가 복을 누립니다.
2) 라합
야고보는 또 다른 행동하는 믿음의 예로 기생 라합을 들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5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 아래 애굽을 나와 가나안을 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광야에서 40년간 생활을 하다가 모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새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공격해야 할 성이 여리고 성이었는데, 여호수아는 그 성을 정탐하기 위해 두 사람을 보냅니다. 그 두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라합이라는 여자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아마 여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스파이가 숨어들어 왔다는 정보를 얻은 여리고 정보원들이 쫓아왔는데, 라합은 그들로부터 두 정탐꾼을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가나안을 점령하게 되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살려줄 것을 부탁해서, 여리고 성이 멸망당할 때 라합의 집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지적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편을 택하는 일종의 모험이었습니다.
진짜 믿음이라면 라합처럼 우리를 모험의 길로 인도합니다. 모험이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안전한 일, 당연한 일에는 믿음이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위험하고 불확실하고 앞이 안 보일 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으면 행하는 겁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대로 행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26절)
[나가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다닌 지 5년, 10년, 아니 평생을 다녔어도 삶에 별로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성경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예배를 안 드려서도 아닙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기도를 안 해서도 아니고, 큐티를 안 해서도 아닙니다. 그런 것을 다 해도 변화가 없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들은 대로, 배운 대로, 깨달은 대로, 행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혹시 삶에 아무 변화가 없으면서도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신다면, 이 시간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가지고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작은 일부터 말씀을 믿음으로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피곤한데 새벽기도회에 나오거나 수요예배에 나오면 더 피곤해질까봐 못 나오시는 분이 계시면, 한 번 나와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 보십시오. 피곤하지 않습니다.
혹시 세금 보고를 제대로 하면 생활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아서 주저하는 분들이 계시면, 믿음으로 결단하고 제대로 세금 보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에서는 분명히 세금을 제대로 내라고 말씀합니다.
주일날 일을 하지 않으면 돈을 못 벌 것 같아 두려워하는 분이 계시면, 모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행해보십시오. 됩니다.
학생들은, 시험 때나 페이퍼가 많을 때 주일을 지키면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주일을 빼먹고 그런다면,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힘을 얻고 지혜를 얻습니다.
성경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하다가는 손해를 보며 살 것 같아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한 번 해보십시오. 손해 안 봅니다.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갑자기 영적 거장이 되기를 기대하시는 게 아닙니다. 매일 조금씩만 변화되어 가면 됩니다. 그 변화가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나 자신이 가진 믿음은 산 믿음입니까, 죽은 믿음입니까? 다시 말해, 정말 믿는 대로 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론적으로 좋은 말이라고 동의하는 정도입니까?
작은 것부터 실천에 옮기면서, 매일매일 믿음으로 작은 모험을 해가면서, 그 믿음의 모험들이 쌓이고 또 쌓여서, 놀라운 믿음, 행함 있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의 거장들이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