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528일 주일예배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 4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

(골로새서 322~ 41)

 

[들어가는 말]

 

어느 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한 가게를 운영하는 교인과 대화를 하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자기 가게를 새로 꾸미거나 고장이 난 부분을 수리할 때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아니, 본인도 교회를 다니면서 왜 그렇게 하세요?” 하고 물었더니 그분이 대답하기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에 비해 일을 소홀히 하고 또 허술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같은 교인이라 그런지, 더 안심하고 더 쉽게 보고 대충 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볼 때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성실하고 충실하게 일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간혹 소홀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교회에서 직업관에 대해 가르쳐주는 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에 대해 알려주고, 교회 생활이나 전도는 어떻게 하는지,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말해주는 경우는 많지만, 사회생활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가르침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일터의 삶>을 다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내용을 자세히 다룹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의 생업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일에 보람이나 재미를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돈을 버는 목적으로만 일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분들은 은혜를 받았다 하면 직장을 그만 두고 신학교에 갈 생각부터 하거나 선교사로 헌신한다고 합니다. 소위 세상일은 별 의미가 없고, ‘영적인 일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을 듣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일과 하나님의 일을 나눕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읽어보면 틀린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결코 세상일과 하나님의 일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성경적인 직업관인지, 오늘은 그것을 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 전에 이것을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돈을 벌기 위해(먹고 살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일하면 행복하기 때문에 합니까? 단순히 집 밖에 나갈 수 있어서 합니까?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합니까?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로 일을 합니까?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이 하시는 일(직장, 사업, 가정)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여러분이 일하는 이유가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우리의 생업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학생, 사업, 직장인, 가정주부 등), 우리는 자신의 일을 통해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1.   본문의 배경

 

오늘 읽은 골로새서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 당시의 종들에게 준 말씀입니다. 그 당시 1세기에 예수님을 믿은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는 노예들이 많았는데, 과연 노예라는 것이 무슨 소명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먼저 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에는 이 말이 둘로스(doulos)’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고용된 일꾼이 아니라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당시 노예는 특정한 집에 팔려 와서, 앞으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소망이 없이 평생 그 집에서 일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골로새서를 쓸 당시에 노예제도는 이미 오래 지속된 제도였습니다. 그때 로마에만 6천만 명이나 되는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로마에 있던 노예들은 부잣집들이 소유한 동물들보다도 낮은 취급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노예제도는 아주 악한 제도였기 때문에 마땅히 중단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노예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오늘 본문에서 노예들은 자기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권면을 합니다.

 

왜 그 당시 교회가 노예제도를 반대하면서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노예제도를 없애는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런 악한 제도를 없애는 데에 물리적, 폭력적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힘이 있으셨지만, 폭력을 사용해서 로마를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회복되고 나아가 악한 것을 없애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바꾸셔서 사회를 바꾸시는 것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 의도를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 개혁이 먼저냐, 영혼 구원이 먼저냐고 질문합니다. 뭐라고 한마디로 결론짓기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에 대한 좋은 답변을 노아의 시대를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세상이 악해서 노아 한 사람만 하나님이 의롭게 여겨주셨습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 아내, 세 아들과 그들의 아내들 8명만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다 홍수로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심판을 받고 모든 악한 것들이 쓸려 간 후 새롭게 노아의 가족들로 다시 시작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은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천국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도로 금방 악해졌습니다.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아무리 사회가 바뀌어도 또 악해진다는 것입니다. 잠깐은 좋아질 수 있지만 또 악해집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해주는 가장 큰 계명, 즉 가장 중요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 일을 하든지, 제대로 크리스천답게 살기만 하면 사회의 악한 시스템이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인 빌레몬서를 보면, 오네시모라는 종이 나옵니다. 그의 주인의 이름이 빌레몬입니다. 오네시모는 자기 주인의 집에서 뭔가를 훔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지내면서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오네시모는, 자기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아가 용서를 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인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바울이 써준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당시 법에 의하면, 주인의 것을 훔쳐 달아난 것은 사형에 해당될 수 있는 죄였기 때문에, 바울은 빌레몬에게 당시의 사회 통념과는 완전히 반대가 되는 일을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당시 이 편지를 쓰던 바울의 심정을 이 말씀을 통해 느껴보십시오.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두고 내가 복음을 위하여 갇혀 있는 동안에 그대를 대신해서 나에게 시중들게 하고 싶었으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대가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잠시 동안 그대를 떠난 것은, 아마 그대로 하여금 영원히 그를 데리고 있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는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나에게 그러하다면, 그대에게는 육신으로나 주님 안에서나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생각하면,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아 주십시오.” (1:10-17)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대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힘든 요청입니다.

 

1세기 당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많은 노예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노예 출신의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많은 노예들이 자기 주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된 주인들은, 자신이 크리스천이 되도록 인도해준 노예들을 해방시켜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물리적인 힘을 동원해서 노예제도를 없애도록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대신,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변화시키심으로써 사회의 제도를 바꾸게 하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런 일이 우리 한국에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복음이 들어와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교회가 서면서 종들이 예수님을 먼저 믿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놀랍게도 종은 장로이고 주인은 일반 성도인 경우가 생겼습니다. 그 당시 사회로는 정말 혁명적인 일입니다. 그때 많은 양반들이 교회에 나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부터 그런 구분이 무너진 겁니다. 초창기에는 교회가 그렇게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요즘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2.   일의 목적: 주님을 두려워 함

 

그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노예인 크리스천들에게 뭐라고 권면합니까?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2)

 

이 구절을 보면서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종들이 자기 주인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것인가?’ ‘노예로서 주인을 섬기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일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질문에 대한 답 모두 그렇다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노예제도는 가장 악랄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도 양반과 상놈이 있었고, 중간에 중인도 있었고, 위로는 왕족도 있었습니다. 신분을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회에서 노예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 삶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가 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5-6세 되는 양반집 꼬마 도련님이 40-50대 백정의 목에 줄을 걸고 끌면서 넌 날 따라와. 넌 돼지야.”라고 하며 따라오게 한 겁니다. 불과 100여 년 전에 우리나라가 그런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복음 때문에 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노예들을 향하여 자기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런 말은 성경에서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경전에도 나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다 알고 지키는 사회 윤리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나 일반 윤리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내용은 비슷할지 몰라도 그 목적이 완전히 다릅니다. 왜 해야 하는지가 전혀 다릅니다. 성경에서 성실하게 일하라고 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주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기 주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윤리나 사회의 통념은, 상류층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인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다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놓치는 것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온 우주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에만 제한된 주님이 아니십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크리스천(신자)은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는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비신자)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이러한 주권과 소유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에 대한 주님의 주권과 소유권, 그러니까 내 삶도, 내 생명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신자이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비신자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신자라고 하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진짜 신자인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명도, 모든 소유도 다 주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두 다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 십일조입니다. 처음 제가 부임했을 때에 비해서 지금은 우리 교회에 이 믿음의 표현을 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십일조라고 하면 보통 내 것의 1/10을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그게 아니라 주님의 것이 10입니다. 주님의 것이 전부 다인데, 주님은 우리에게 나는 1만 갖겠다. 네가 9를 가져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데 네가 1을 가져. 내가 9를 가질 게.’라고 하시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슨 돈이 없어서 1이라도 갖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러니까 전부 다 우리가 쓰게 하셔도 되는데, 그러면 우리가 타락하니까 타락을 방지하고 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최소한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은혜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작할 땅을 주시면서 소유와 관리를 철저히 구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간 다음 그 땅을 나눌 때, 하나님이 그 소유주가 되시고 백성들은 땅을 받아 경작하는 관리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원리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제도가 바로 희년(Jubilee) 제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땅을 경작하며 살다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경작지를 팔게 됩니다. 그렇게 땅이 남의 손에 넘어갔지만, 50년 만에 찾아오는 희년이 되면 돈을 주고 산 땅이라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제도가 희년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땅은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인간이 사고 팔 수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에 무슨 일이든 성실하게 섬길 때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꼭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삶의 어떤 영역이든지 주님께서 내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실 부분이 없습니다. 우리의 일터나 학교 공부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앞에 계신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실하고 정직하다면, 그러한 태도가 우리의 일하는 데에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 시대에 한국 교회가 엄청난 부흥을 하고 교회에 사람들이 미어터질 때, 겉과 속을 구분하고 세상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는 경향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엄청나게 열심히 봉사하고 믿음이 좋고 존경을 받는 신앙인이며 지도자인데, 사회에 나가면 사기치고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회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밖에 나가서 하는 일은 세상일이라고 하며, 세상일은 자기가 알아서 적당히 하고 교회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어디 그런 구분이 있습니까? 그런 게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그런 구별이 없습니다. 교회 안의 일이든 교회 밖의 일이든,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섬기듯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권면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3-24)

 

내가 상전을 섬길 때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사역이나 전도를 열심히 해도 상이 있지만, 지금의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듯 열심히 일할 때 역시 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24절에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유산을 상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종과 노예들에게 이것은 엄청난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종들이 예수님을 영접해서 크리스천이 된 후에는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가진 게 없으니 드릴 것도 없습니다. 소유권이 없어서 헌금을 드리고 싶어도 할 수 없고, 종이기 때문에 자기 시간도 없습니다.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싶어도 교육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니까 자기는 하나님 앞에 가서 상 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되어 좌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섬기듯 네 주인을 섬겨라. 그러면 하늘에서 상이 있다.’라는 말씀을 들으니, 그것이 노예들에게 큰 격려와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동시에 상이 있다는 말은, 사역을 잘못하면 꾸중을 들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25)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장이나 사업, 가정의 일들도 주님의 뜻대로 잘하지 않으면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주님께서는 교회 생활을 어떻게 했느냐만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라, ‘너는 네 가정에서 얼마나 충실한 남편/아내였고, 얼마나 충실한 자녀였고, 얼마나 충실한 부모였느냐?’라고 물어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너의 사업을 어떻게 경영했느냐? 너는 네 직장생활을 얼마나 성실하게 했느냐? 학교생활을 어떻게 했느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생명의 삶> 공부 때 배우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의 장은 크게 세 곳인데, 가정, 일터, 교회입니다. 이 세 군데서 사역을 열심히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에서 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잘못 생각하는데, 신앙생활은 교회에서 하고 밖에 나가면 내 맘대로 사는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교회에서 하는 게 아니고, 교회에서는 신앙 훈련을 받는 겁니다. 가정교회의 세 축이 뭡니까? 주일예배, 목장, 삶 공부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열심히 드리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 앞에 의지적으로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목장에서 마음을 나누고 서로 터치해주고 기도해주며, 서로 위해주고 서로 섬기며, 안 믿는 영혼을 같이 전도합니다. 또 삶 공부를 통해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익힙니다. 이런 훈련을 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실제로 가정과 일터에서 하는 것입니다. 사업이 사역이며 신앙생활이라면 어떻게 적당히 잘못된 것을 속여 팔거나 대충 하겠습니까? 직장이 사역이며 신앙생활이라면 어떻게 상사가 볼 때는 열심히 하고 안 볼 때는 대충하며 눈가림만 하고 그러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 일할 때 그 시간에 드라마를 본다고 했는데, 그건 자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꾸중 들을 일입니다. 심지어 직장에서 일할 시간에 <생명의 삶> 숙제하고 그래도 안 됩니다. 쉬는 시간에 해야지 일할 시간에 그러면 안 됩니다.

 

또한 학생들은 학교가 사역이며 신앙생활이라면 어떻게 컨닝(cheating)을 하고 남의 것을 베끼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을 꼭 깨달으셔서 교회 사역을 열심히 섬기실 뿐 아니라, 가정에서, 사업체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잘 섬기셔서 주님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듣고 많은 상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3.   상 받는 삶의 비결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상을 받는 삶이겠습니까?

 

1)  주님께 하듯 하는 삶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23, )

 

우리의 진정한 상전은 하나님이십니다. 일터의 상사(보스)가 진정한 상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서 우리는 일터에서 우리 위에 자리한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상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천입니다.

 

세계적인 신약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라는 분이 있는데, 아주 기가 막힌 말을 했습니다. “크리스천이 만들어내는 모든 물건이 하나님께 보여드려도 될 만큼 좋아야 한다.”

 

사업을 하는 분들은 사업을 할 때 내가 이 지역에서 꼭 필요한 사업체가 되겠다는 각오로 하시면 좋겠습니다. 직장인이라면 회사에서 볼 때 언제 자를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절대 나가면 안 된다고 걱정할 정도의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학생이라면, 주님께 보여드릴 만큼 열심히 공부합니까?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나의 일을 하나님께 보여드릴 만큼 열심히 일합니까? 교회에서도 자신의 사역을 주님께 보여드릴 만큼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습니까?

 

특히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은 자신의 상관이 없는 데서 조심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의 흉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부목사들도 담임목사님 흉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윗사람의 흉을 보면 안 되겠습니다. 그 사람을 흉보는 것은 결국 주님을 흉보는 것이 됩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고객들을 대할 때 주님 섬기듯 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까다로운 손님들도 있는데, 나가고 난 다음에 뒤에서 욕하고 흉보지 마시고 주님께 하듯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3:18에도 있지만,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시기 바랍니다(5:22). 물론 남편들은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아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19절에 의하면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 압니다. 아내 분들이 남편을 보면 존경스럽기는커녕 한심할 때가 많지요? 그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신 말씀 때문에 모욕감을 느끼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훌륭한 사람을 섬기는 게 더 어렵습니까, 아니면 한심한 사람을 섬기는 게 더 어렵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아내들에게 엄청난 상을 받을 기회를 주신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남편들도 죽기까지 아내를 사랑해야겠습니다.

 

또한 교인들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 이것도 압니다. 여러분이 저와 같은 목회자를 보실 때, 교회 지도자들을 보실 때, 답답하고 마음에 안 드는 점들이 많으시지요? 그러나 부족한 점이 있으면 뒤에서 흉을 보거나 비난하지 마시고 기도해주십시오. 흉보는 것은 우리 주님을 흉보고 비난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이것 역시 부족한 리더들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함으로써 상 받을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주님을 섬기듯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신 절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은 크건 작건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우리가 볼 때 아주 보잘것없고 비천하고 하류층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5장에서 그러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내게 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안 한 것이 내게 안 한 것이다.” 우리가 그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주님의 필요를 채워드리는 것이고, 그분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주님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됩니다.

 

 

2)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의 일처럼 하는 삶

 

22절의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한 마음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이것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집중하고 전력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건성으로 하게 됩니다. 지금도 예배드리고 있지만,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건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잘 모르고 건성으로 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겁니다. 직장에 나가는 분들은 출근 시간을 잘 맞추어 나가지 않습니까? 사업체에서 종업원이 늦게 온다면 꾸중도 하고 제대로 나오라고 말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예배드리러 올 때는 어떻습니까? 10, 20, 30분을 늦게 와도 아무렇지도 않으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까?

 

우리는 모든 일을 나의 일처럼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 내 인생이 걸린 약속이 아침 5:30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너무 이르기 때문에 안 가겠다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그 시간에 맞춰서 나갈 것입니다. 아침에 못 일어난다면 밤을 새서라도 그 시간에 나갈 것입니다. 모든 일을 주님의 일로 여기며 그렇게 일하는 사람에게 상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3)  모든 일을 즐거움으로 하는 삶

 

종에 관해서는 네 절에 걸쳐 말하면서 상전들에 대해서는 딱 한 절만 말합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41)

 

종들을 어떻게 부렸는지 주님께 보고드릴 때를 대비해서 의와 공평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요즘으로 하면 내가 사업을 하거나 직장에서 내 밑에 사람이 있을 때, 월급을 밀리지 말고 제때 주고, 쉴 때는 제대로 쉬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상전에게 하는 권면은 딱 한 절인데 종에게는 네 절이나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당시 크리스천 상전은 몇 명 안 되고 대부분 종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보입니다. 종들은 이런 권면의 말씀이 없어도 어차피 자신의 생사를 쥐고 있는 상전에게 순종해야 하는 인생입니다. 섬기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권면의 말씀을 종들에게 주신 것은 종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22절에 보면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라고 합니다. 육신의 상전이 있으면 또 다른 상전도 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종들에게 육신의 상전도 있지만, 하늘에 상전이 있다. 그분이 진정한 상전이시다.’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전들에게도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대기업 회장이라도, 자기 위에 상전이 계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말 상전이 아니라 자기도 주님께 대해서는 종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결론적으로 하는 말씀은, 지금 종이든, 노예든, 주인이든, 다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누구는 종으로 살고 누구는 상전으로 삽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상전이 너를 소유한 것이 아니다. 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네가 현재의 위치에서는 종이고 섬겨야 하는 위치니까, 네가 억지로 마지못해서 끌려가지 말고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섬겨라.’ 하고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나가는 말]

 

종종 프로 스포츠 선수들을 보면, 한 팀에서 주전으로 잘 뛰다가 주전에서 밀릴 때, 가만히 있어도 많은 돈을 받지만 그보다 적은 돈을 받더라도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으로 이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일에도 이토록 뛸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며 기회를 찾아 팀을 바꾸는 엄청난 결정을 내리는 일이 많습니다.

 

물론 모든 일은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하는 것이므로 본질상 거룩한 일입니다. 세상일은 속된 것이고 교회 일만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섬기고 교회 사역을 하는 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르고, 못한다고 사양하거나 억지로 맡고서도 상 받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낭비하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사역을 두 번 다시 부탁하지 않습니다. 오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역을 싸구려로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제발 좀 해달라고 간청하고 구걸해서 간신히 하게 되면 그것은 싸구려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주님의 일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가끔 자기가 부족해서 자신 없다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분들에게는 격려하고 설명해서 다시 하도록 말씀드리지만, 귀한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다시 부탁을 하지 않습니다.

 

삶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이 공부하자고 할 때 안 하겠다고, 못 하겠다고 하는 분들은 한두 번은 권하지만, 끝까지 안 하겠다는 분들에게는 더 이상 권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하면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맡겨주시는 사역이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받는 상은 교회 사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만이 아니라, 온 세상과 온 우주를 소유하고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직장에서 상관을,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할 때 하나님의 상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일만 상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또 가정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가정에서 배우자를, 부모님을, 또 자녀를 하나님의 뜻대로 잘 섬길 때 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가정이든 일터이든 교회이든, 주님께 하라는 것이 결국 뭡니까? 다 관계의 문제입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이 내가 하기를 원하시는 일이 뭔가를 계속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그 뜻을 찾고 이웃을 향해 그것을 베푸는 삶은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결국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때 누가 행복할까요? 섬김을 받는 사람도 좋지만, 섬기는 내가 행복합니다. 그렇게 살면 그렇게 사는 사람이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사는 것이 너무 재미있고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천인데 불행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와도, 일터에 가도, 집에 와도 재미있고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삶에서 이런 재미와 행복을 느끼고 계십니까? 만약 아니라면 잘 점검해보시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기도하면서 고쳐야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모든 면에서 다 열심히 하니까 상을 무지하게 받겠구나?’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몰라 한 말씀 더 드립니다. 열심히만 한다고 자동적으로 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하는 일이 상을 받는 사역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셔야만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남을 섬기는 마음, 즉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업체나 직장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장소로 생각할 때 상이 있습니다. 교회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술집이나 룸살롱처럼 사람을 타락하게 하는 사업의 개업예배는 할 수가 없습니다. 도박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일은 장사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사업체가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이 되고 상 받을 기회가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사업을 올바르게 하셔야 합니다. 사업체 주인이 우리 주님이심을 정말 인정하게 되면 세금을 속일 수 없습니다.

 

또 가정이나 교회를 돌보지 않고 사업과 직장에만 몰두해서 소홀히 하는 분들도 꾸중을 듣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은 엉터리로 하고 직장생활이나 학교생활은 대충 하면서 교회 일만 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는 삶을 사셔서, 이 세상에서는 진정으로 재미있고 행복한 삶을 사시고,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에는 주님으로부터 상을 정말 많이 받고 그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