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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6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23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마가복음 6 45-56)

 

[들어가는 ]


하나님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을 ‘신학’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Theology인데, ‘theos(하나님)’라는 단어와 ‘logos(말씀)’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7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학이 있는데 소위 ‘번영 신학’입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 중에서 특별히 축복을 강조합니다. 미국에서도 대형교회들을 보면, 전도를 열심히 해서 성공한 교회들도 있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너무 부정적이니까 언급하지 않고 긍정적인 측면인 축복만 강조하여 크게 성장한 대형교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복을 약속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번영 신학은 너무 한 쪽만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번영 신학은 한국에서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것은 한국 사람들의 기복주의적인 성향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70-80년대에 가파른 성장을 하다가 90년대 후반부터 2천 년대에 들어오면서 굉장히 감소하고 있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번영 신학입니다. 왜냐하면 사회가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주님을 찾아 나오고, 교회에 나오면 뭔가 좋은 일들이 있고, 교회의 시설도 잘 되어 있고, 교회에서 주는 것도 많고, 뭔가 누리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부유해지면서 교회가 더 시시해졌기 때문에, 화려하게 해놓은 데는 지금도 잘 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데는 감소하게 된 것입니다.

 

전도를 할 때도 이전에 많이 사용되던 말이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정말로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정말로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복이 무슨 복이냐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분명히 복을 받는데 그 복은 ‘하늘의 복’입니다. 그런데 번영 신학은 ‘땅의 복’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오히려 이 땅에서 손해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부터가 그 참혹한 십자가 형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다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말씀대로 순종하다 보니,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업에서 금전적인 손해도 보고 인간관계가 끊어지기도 하고 따돌림을 당하는 일도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 후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그곳에서 반대쪽으로 가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닌 게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소문처럼 예수님이 정말 자신들이 기다리던 그 메시야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은 그분의 권위에 압도되어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종하여 배를 타고 건너갑니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 가운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노를 젓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순종의 결과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살기로 결정할 때, 이처럼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나 힘겹게 노를 젓는 것 같은 상황에 처할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 뜻에 따라 올바로 살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바다 위의 배처럼 표류하며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계속 이렇게 믿어야 되겠습니까?

 

 

1.  기적 후에 하신 일 (45-46절)

 

예수님은 그 전에도 유명하셨고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인기가 있으셨지만, 오병이어 기적 사건으로 인해 인기가 더욱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주된 원인은 ‘이분 옆에 있으면 굶지는 않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나게 유명해지고 요즘 아이돌 못지않은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크게 세 가지 일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5-46절)

 

지난 안식월 때 이 뱃새다에 갔었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으로 추정되는 들판에도 가보았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건너편 뱃새다로 가게 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바로 해산시키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 사건 이후에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즉시”(45)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래, 너희가 나를 왕으로 좀 섬겨 봐라. 나도 좀 누려보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즉시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 하는 무리를 해산시키십니다(요 6). 물론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왕이 되어 그들을 다스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권위를 내세워 수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즐겁게 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어 그러한 대중적인 인기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를 한 몸에 받는 것보다,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예수님께는 훨씬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사역이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사람들은 어느 곳이든지 따라왔지만, 예수님은 홀로 있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한 번만 그러신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이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의 원천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며 힘을 얻었기 때문에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러한 시간을 매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이 매일 있어야 합니다. 특히, 어떤 사역을 맡아 섬기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면 이러한 시간이 없이 할 때 참 곤란해집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왜 내가 맡은 이 일이 이렇게 안 될까? 왜 사람들이 협조를 안 할까? 왜 이렇게 냉랭할까? 왜 내가 맡은 사역은 이렇게 지지부진한가?’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으십니까?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시기 위해 일부러 어려움을 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무기력한 것은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매일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주님을 안 믿는 사람은 몰라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주님과 교제를 안 하겠습니까?

 

자신의 하루 일과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일하는 시간을 빼고, 하루 중 얼마나 주님과 만나는데 투자하고 있습니까? 물론 일하는 중간에도 주님께 기도하며 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시간에 주님과 만나는 데에 얼마나 투자하고 있습니까? 반면 자신의 엔터테인먼트와 만족을 위해서는 얼마나 시간을 보내십니까?

 

사실 드라마 한 편을 봐도 한 시간이 갑니다. 그런데 주님과의 교제는 5분만 해도 얼마나 힘듭니까?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며, 우리는 아무 때든 어디서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따로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많이 드는 예이지만, 열애 중인 청춘 남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두 사람이 따로 만나지는 않고 항상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에만 둘이 만난다면 연애하는 관계가 아닐 것입니다. 따로 둘이서만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사랑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서로 만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랑은 진짜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을 주셨는데, 이미 있던 계명이지만 가장 중요한 게 뭐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그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게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네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믿어라. 따라라.’라고 했으면 열심히 할 텐데,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한다면 따로 시간을 내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이웃과 만나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따로 시간을 내어 하나님과 단둘이서만 만나기를 원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힘든 일,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주님께 간절히 나아가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리고 모든 것이 잘 될 때는 그다지 마음이 간절하게 되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안 해도 잘 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일이 잘 풀리고, 내가 인기를 끌고, 존경과 칭찬을 받을 때, 바로 그때가 굉장히 위험한 때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일수록 자꾸 초점이 나에게 맞춰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광을 받을 때가 바로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주님과 만나는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더욱 열심히 가질 때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 무기력해지거나 삶의 기쁨을 잃는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자기가 해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만에 빠지게 되는 원인 역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제대로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하신 분 앞에 선 나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 어떻게 교만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 시간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예배에 나와 있어도 마음이 다른 데에 가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정말 집중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끼리 만남을 가져도 대화를 하긴 하는데 생각이 다른 데 가 있으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내게 유익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도 하고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는데 관심은 다른 데 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의 만남은 내게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매일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과 교제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지혜를 공급받아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할 때 더욱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애타게 기다려본 적이 있으십니까? 빨리 자고 일어나 큐티하고 새벽기도로 하나님과 빨리 만나고 싶다고 생각해보셨습니까? 아마 드라마 한 편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못할 겁니다. 드라마를 하다가 딱 끊으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러면 내일을 얼마나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까? 한국과 시간차가 있으니까 잠만 자고 일어나면 벌써 올라와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신이 납니까? 그 이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정말 기다려본 적이 있으십니까?

 

세상의 재미와 하나님과의 만남의 기쁨이 뭔가 다른가 하면, 시작할 때는 비슷할 수 있지만 하고 난 다음에는 세상의 재미는 뭔가 아쉽고 부족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뭔가 뿌듯함, 뭔가 채워짐, 기대감,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셨습니다.

 

 

2.   제자들을 돌보시는 예수님 (47-52절)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는 시간이 이처럼 중요한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외면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혼자 산에 올라가서 도를 닦는 신앙이 아닙니다. 불교처럼 혼자 수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 잘 믿겠다” 하는 신앙은 성경에 없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믿음이 좋다는 것이 뭔가?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하는 것은 믿음이 좋을 때 나올 수 있는 모습이지만, 무엇보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가지는 동시에,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 삶에서 실천이 되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실천이 됩니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보이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보일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요일 4:20-21, 새번역)

 

물론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인간을 사랑한다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가지고 있으실 때에도 자신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잊지 않으셨습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7-48절)

 

제자들이 탄 배에 강한 바람이 마주 불어와서 물결 때문에 배를 타고 진행하는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은 교제 시간이 너무 귀하고 좋으셨을 것이 분명하지만, 예수님은 고통을 당하는 제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그냥 놔둘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로 가시는데, 어떻게 가십니까?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8절)

 

“바다 위로 걸어서” 오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지금 밤이라 배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물위를 걸어서 가신 것입니다. 그때는 밤 4경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으로는 오후 6시부터 1경이 시작하고, 한 경이 3시간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경은 오후 6시부터 9시, 2경은 9시부터 밤 12시, 3경은 12시부터 3시, 4경은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를 말합니다. 이때는 밤중에도 가장 캄캄한 시간입니다. 요즘에는 전기가 있으니까 환한 것이지 없다면 얼마나 캄캄하겠습니까.

 

이 사실만 봐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얼마나 생각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녁 때 헤어졌는데 새벽이 되도록 바다에서 헤매고 있으니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래서 이러한 사랑의 주님이 자기들을 구해주러 오셨는데,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49절)

 

저희 집에서 제 아들이 자는 방이 가장 바깥쪽이라 선선해서 스페이스 히터를 따로 갖다 놓고 켭니다. 밤에 들어가서 켜주는데, 어젯밤에도 켜주려고 들어가서 보니까 이불을 차버리고 자서 이불을 덮어주는데 갑자기 저를 보더니 “으악!” 하고 막 놀라는 겁니다.

 

이것과 똑같습니다. “유령인가!”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도와주러 왔는데 “으악” 하고 소리 지른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당히 황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마음이셨을까?’ 도와주러 왔는데 유령이라고 소리 치며 놀라니 얼마나 황당하셨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님은 그들을 금방 안심시켜 주십니다.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50-52절)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유령이다!” 하고 소리치며 무서워하니까, ‘얘네들이 나를 이렇게 모르나? 그럼 한 번 당해봐라.’ 하면서 ‘우우’ 하면서 더욱 공포심을 유발하신 것이 아니라 즉시, “곧” 말씀하셨습니다. 빨리 제자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마음에 평안을 찾기를,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어려움이 생기면 마치 믿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평소에는 다 믿는 것 같은데 막상 어려움이 생활 속에 닥치면 전혀 신앙인의 모습이 없어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편법을 쓰고 세상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제자들이 꼭 그랬습니다. 바로 방금 전까지, 몇 시간 전만 해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주님의 제자로서 우쭐거리며 옆에서 ‘보라, 내가 저분의 제자다’라고 하며 거들었던 그들인데, 놀라운 일들을 직접 경험한 그들이었는데, 이제 어려운 지경에 이르니까 예수님이 도와주러 오셔도 유령이라고 놀라 소리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것은 주님을 정말 믿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유령은 무슨 유령이겠습니까?

 

그런데 48절에서 예수님이 도와주러 오셨는데 그럼 도와주셔야지 “지나가려고 하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와주러 오셨으면 도와주셔야지 지나서 어디를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50절에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영어로 “It is I.”로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출애굽기 33-34장에 보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다 멸하겠다고 하실 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러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간절히 구했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네 앞을 지나가겠다. 너는 내 뒤만 볼 것이다.”라고 하시고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셨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It is I”라고 하실 때도, 모세를 처음 부르셨을 때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자기를 누가 보냈다고 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I am who I am.”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 “I am who I am.”과 “It is I.”라는 말씀은 같은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여기서 “내가 바로 너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야(구원자)이다.”라는 것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 주님이 도와주러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은 우리 주님이 바로 그런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주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일어나고 괴로울 때 우리는 주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그래 놓고는, 정작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이게 뭐냐?" 하면서 소리칠 때가 있습니다.

 

대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안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도와주셔도 자기가 기도한 내용은 다 잊어버리고 엉뚱하게 상황을 해석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때는 기도를 해 놓고도 그 기도가 이뤄질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기도노트를 만들어서 적어가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처음 생긴 교회, 바로 초대 교회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왕이 교회를 핍박해서 요한의 형제이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를 칼로 죽입니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헤롯은 베드로도 잡아서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네 명씩 네 조로 된 군인들, 즉 열여섯 명이나 되는 군인들로 하여금 지키게 합니다. 베드로가 잡혀 들어가자 온 교회는 그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음 날이면 죽임을 당하는 그 밤에 베드로는 두 명의 군인들 사이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잠을 잡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주님의 사자가 나타나 베드로를 깨우는데 쇠사슬이 풀어집니다. 베드로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비몽사몽간에 천사를 따라 감옥에서 나오는데, 베드로 자신도 그것이 환상인 줄로 착각합니다. 삼엄한 경계를 하는 그곳을 나와 한 거리를 지나서 천사는 그를 떠나는데, 그제야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자기를 구해주신 줄을 깨닫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즉시 교인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 집의 대문을 두드리자 로데라는 계집종이 나와서 보고 베드로의 목소리인 것을 깨닫고 너무 기뻐서 문을 여는 것도 잊은 채 안으로 들어가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서 있다고 소리를 칩니다. 그때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오, 주여,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라고 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여종에게 ‘네가 미쳤구나’ 하고 말하자, 여종은 참말이라고 우겼다. 그러자 그들은 ‘베드로의 천사일거야’ 하고 말하였다.” (행 12:15, 새)

 

지금 자기들이 실컷 "주여, 베드로 사도를 지켜 주시옵소서. 안전하게 풀려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하게 울면서 기도를 했을 텐데, 정말 베드로가 왔다고 하니까 농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계속 문을 두드리니까 문을 열어서 베드로를 보고 모두 놀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는데, 자기들의 기도가 실제로 응답이 되었는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기도한 내용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기도 응답을 받을 때 놀란 적이 있으십니까? 기도 응답은 안 되어야 정상인데 되어서 이상하다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기도 응답이 되는 게 정상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기를 원하십니다.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안 보는 사이에 우리 뒤에서 막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주님께서 도와주시는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많은 경우에 이럽니다. “우연히 된 거겠지. 뭐, 기도해서 됐겠어? 우연히 된 거지.” 아이가 감기에 걸려서 간절히 함께 기도합니다. 약 먹고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 열이 뚝 떨어집니다. 그러면 이럽니다. “약 먹어서 난 거겠지. 우연히 낫겠지. 어차피 날 건데 난 거겠지.”라고 합니다.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셔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목장에서 사소한 기도제목이라도 나누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응답되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하시는 일을 봐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에 큰 일이 일어날 때, 뭔가가 나타날 때, 그것은 유령이 아닙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운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나를 도와주시기 위해 직접 오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역사 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방법으로 나타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도와주시기 위해 역사 하시는 것임을 깨달아가야겠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소리치며 두려워할 때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즉시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먼저 주님을 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3.  진정한 제자들 (53-56절)

 

제자들은 능력의 주님이 누구신지를 보는 데 다시 실패합니다. 마음이 둔하기 때문입니다(52). 그런데 게네사렛 사람들은 즉시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에게 병자들을 데리고 옵니다.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53-55절)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시니까 막 따라갑니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제자들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다. 놀라운 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있다고 듣는 곳으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56절)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만진 모든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만지지 않은 사람들은 고침을 못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까짓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어린애 장난이냐? 뭐가 만지면 낫고 안 만지면 못 낫냐?’라고 하며 버티면 나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냥 만진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저분을 만지면 나을 것이다’ 하는 마음, 연약하지만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와서 그의 옷가라도 만졌을 때 나음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의 반응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유치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올 때 주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나아올 때는 귀찮거나 캐주얼한 마음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오기 전에 먼저 기도할 제목이 ‘내게 간절한 마음을 주옵소서’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나아올 때 분명히 주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나가는 말]

 

제임스 메리트(James Merritt)라는 분이 쓴 <성령의 열매가 당신을 리더로 만든다>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세상에 알려진 가장 강력한 자연의 힘들 가운데 허리케인이 있습니다. 시속 155마일의 강풍과, 시간당 5인치를 쏟아 붓는 폭우를 동반하며, 10층 높이의 해일을 일으키는 허리케인은 전 도시들을 단 몇 분 만에 초토화시킬 수 있습니다.

 

허리케인의 두 가지 구성요소가 특별히 흥미롭습니다. 하나는 허리케인의 눈인데, 이곳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회전의 중심이며, 가라앉은 공기가 구름과 번개가 발달하는 것을 억제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눈을 곧바로 둘러싸고 있는 것이 구름 벽인데, 상승기류와 강력한 비구름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구름 벽은 조용한 눈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가장 센 바람과 가장 많은 비를 포함하는 허리케인의 가장 강력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폭풍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항상 평화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어디인가? 바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깊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평화는 아무 데서나 발견하거나, 사거나, 만들어낼 수 없는 평화입니다. 진정한 기쁨입니다.

 

우리 한국의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을 무렵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꼭 못과 같다. 당신들이 우리를 칠수록, 우리는 더욱더 깊이 박힌다. 그리고 당신들이 우리를 더 깊이 박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평온해진다.”

 

폭풍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중의 하나는, 우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더욱 깊이 박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삶의 깨진 조각들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깨지지 않는 평화를 주신다.”

 

우리의 삶의 폭풍 한가운데서 누리는 이 평화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이것은 세상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의 믿음의 문제입니다다. 다른 사람들이 침착함을 잃는 동안에 우리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일을 통제하시고 담당하시고 수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 속에는 바로 이처럼 힘겹게 노를 젓는 것과 같은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께 우리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아멘으로 맞아들이며 주님의 진정한 평화를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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