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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17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16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마가복음 5 1-20)

 

[들어가는 ]

 

뉴스를 보다 보면 종종 어느 유명한 운동선수가 계약을 하면서 엄청난 액수의 연봉을 받게 되었다는 기사가 뜹니다. 연봉이 천만 달러가 넘고 5 계약을 맺으면서 천만 달러를 받게 되었다는 식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반면 인기가 없거나 실력이 뒤처지는 선수들은 최저 연봉 밖에 받다가 그것도 되면 퇴출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수천만 달러를 받는 사람의 가치가 달러를 받는 사람의 가치보다 높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시대 사람들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세상에서는 돈이나 명성이나 능력에 따라 평가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진정한 기준이 없습니다.

 

가끔 ‘쓰레기 인생’이라는 말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완전히 버려져서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며 철저히 버려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사람의 가치조차 초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의 가치가 똑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돈이나 명성이나 능력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아닙니다.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할 없이 엄청납니다. 왜냐하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에 의해 많이 무너져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말로 표현할 없고 돈으로 환산할 없을 정도의 고귀한 보물이 우리 각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귀에게 가치를 빼앗기고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이런 우리의 원래 가치를 회복시켜주시기 위함입니다.

 

 

1.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 (1-9)

 

1절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지역에서 배를 타고 반대편인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건너옵니다. 지역이 어디였느냐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공관복음(Synoptic Gospels) 관점을 공유하는 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가다라라고 하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거라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이 정확히 어느 곳이었는지를 100% 확실하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가 어디였든지 상관없이 가지 분명한 것은, 지역이 데가볼리였다는 것입니다. 데가볼리는 갈릴리 호수 동편에 위치한, 개의 독립된 도시들이 모여 있던 지역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바로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시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이방인의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은 사람을 만나시게 됩니다.

 

배에서 나오시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2-4)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나아옵니다. 사람은 악하고 더러운 귀신에 들린 아주 부정한 사람입니다(2). 무덤과 같이 아주 부정한 죽음의 장소에서 사는 사람입니다(3). ‘광풍’을 뚫고 오신 예수님께서 이제 ‘광인’을 만나신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는데, 이곳은 시체가 있는 곳입니다. 사람은 무덤 사이에 살면서 무덤을 마구 파헤치고 시체를 만지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도착하신 이곳은 모든 것이 부정합니다. 사람도, 장소도 부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곳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폭풍을 뚫고서 오셨습니다.

 

지금 사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마디로 말해서 그는 가장 비참한 인생입니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귀신에 들렸는지는 모르지만, 누가복음을 보면 이러한 상태가 오래 되었으며 옷도 입지 않고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8:27). 사람들과 함께 정상적인 생활을 없는, 짐승과도 같은, 아니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완전한 인생의 실패자이고, 사회로부터 따돌림 받고 격리된 사람이며, 게다가 사람은 초인간적인 힘을 갖고 있어서 여러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끊어 버리고 도망을 가는, 아무도 컨트롤할 없는 사람입니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5)

 

내용을 보고 사람의 모습이 어땠을 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니까 몸에 줄줄 피가 흐릅니다. 씻은 적이 없을 테니까 국물이 흐릅니다. 머리는 산발이고 엄청난 냄새가 납니다. 입에는 거품을 물고 짐승처럼 우어어 짖어댑니다. 눈은 제멋대로 돌아가고, 살기가 보이는 눈빛입니다. 무시무시합니다.

 

싱글 자매님들, 이런 사람과 사귀거나 결혼하고 싶으십니까? 딸이 있는 부모님들은 이런 남자와 딸이 사귀도록 허락하시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이곳에 제자들은 아마도 ‘이거 완전히 잘못 왔구나, 혹시 선생님이 장소를 잘못 택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며 최대한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은 스스로 이런 삶을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가 없어 괴롭게 소리를 지르며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죽지 못해 삽니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이에 물으시되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9)

 

여기에서 군대라는 것은 로마군대의 ‘레기온’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오천 내지 육천 명의 군인으로 조직으로서 로마군대의 핵심을 이루던 부대입니다. 말은, 지금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귀신들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은 일부러 이곳에 와서 사람과 만나셨느냐는 점입니다. 굳이 그렇게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이곳에 오셨습니까? 이곳에 오지 않으셨더라도 아무도 비난하거나 뒤에서 욕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실패하고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롭게 해볼까 해서 이곳에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명성은 날로 높아가고, 사람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오셨습니까? 그것은 오직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영혼이 있음을 아시고 일부러 이곳에 오셨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고침을 받으러 왔지만,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은 아무리 자기가 원해도 주님께 수도 없고 누가 그를 데려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쌍한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그것도 위험한 폭풍을 뚫고 사람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처럼 위에 사시는 동안 예수님은 사람과 같이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특히 아무 가치 없고, 쓸모없고, 망가진 인생들, 아주 흉악하고 못된 죄인들을 돌보셨습니다.

 

유명한 리더십 전문가이며 목회자이기도 맥스웰(John Maxwell) 초창기에 베스트셀러 중에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을 키워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굉장히 중요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관심과 헌신은 다르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데 관심이 있다면 당신이 편리한 때만 일을 것이다. 당신이 어떤 일에 헌신되어 있다면, 일이 당신에게 편리하지 않을 때에라도 이유를 대지 않고 일을 하게 것이다.”

 

우리가 전도가 됩니까? 영혼 구원이 이루어집니까? 관심은 분명히 있는데 헌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분명히 영혼이 주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을 우리는 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관심에 머무니까 내가 편리한 때에만 그렇게 하고 내가 일이 있거나 피곤할 때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을 살리는 데에 관심만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헌신이 되어 있으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치유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때때로 주님은 당신께 우리가 나오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때로는 직접 와주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여 어쩔 줄을 모르면서 괴로워할 , 직접 와서 도와주십니다. 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처럼 이전에 방황하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똑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실 문제가 있는 사람이 먼저 그것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의 영혼을 향해 가지셨던 헌신의 마음을 우리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삶에는 아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줄로 믿습니다.

 

 

2.   돼지 떼의 몰사와 사람들의 반응 (10-17)

 

그런데 귀신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6-7)

 

자기를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0)

 

귀신들이 기도도 합니다.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귀신들보다 훨씬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마침 거기 돼지의 떼가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1-13)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영화의 장면이라면 정말 놀라운 광경입니다. 이처럼 돼지들이 집단으로 몰살하는 광경을 돼지 치던 자들이 마을에 가서 모든 일을 보고합니다. 헐레벌떡 뛰어가 정신없이 외쳤을 것입니다.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4)

 

한두 마리가 물에 빠져도 놀라운데, 한꺼번에 2,000마리가 몰사했다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겠습니까? 사람들이 허겁지겁 와보니까, 귀신들렸던 사람이 멀쩡해 채로 옷도 입고서 예수님의 발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께 이르러 귀신 들렸던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5)

 

그들은 사람이 온전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불가능할 같았던 일이 일어나자 너무나 놀라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백성은 두려워하면서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예수께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6-17)

 

떠나달라고 합니까? 이유는 크게 가지입니다.

 

먼저, 엄청난 힘을 가진 악한 영들보다 훨씬 강한 힘을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귀신들렸던 사람이 어디에서 사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힘과 돈을 들여가면서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귀신의 세력을 고립시키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통제하기도 하면서 귀신과 거기서 함께 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지만 문제와 더불어서 사는 방법을 터득하여 익숙해져

있는데, 이제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시자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혹시 편안하게 살고 있는 자기들을 어쩌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것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파워라 할지라도, 자기들이 예측이나 통제를 없는 파워는 두렵고 꺼려지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경제적인 손실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던 인간이 이제 치유함을 받은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의 사건을 보고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을 통해 발생한 경제적 손해를 계산하고 그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 동네에 있었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해야 마땅했습니다. 이런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에 대해 놀라며 자기들과 함께 해달라고 요청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대신에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돼지 떼를 잃은 것만이 보이고, 구원받은 사람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저런 인간쓰레기는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괜히 살려 가지고 아까운 우리 돼지들만 죽었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사람의 구원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들의 구원에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돼지를 원합니다. 귀신들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보다도 돼지를 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요즘에는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느냐,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라갔느냐 등에 따라 결정되는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값을 지불하고 사신 고귀한 생명이, 그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은 물질 때문에 살인을 당합니다. 물질 때문에 매장을 당합니다. 그것은 사탄의 생각입니다. 사탄은 많은 돼지를 죽이면서까지 영혼을 구하는 것은 말이 된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잘못된 가치관을 바꿔주길 원하십니다. 물론 돼지 2,000마리라면 값을 따질 엄청나게 비쌌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2,000마리의 돼지를 희생하더라도 불쌍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십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람보다는 오직 돼지에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2,000명의 사람들을 희생해서라도 한두 마리의 돼지를 살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돼지가 마리만 죽어도 호들갑을 떨며, 세상의 종말이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돼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무엇이 중요한가,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가를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사이에 굉장한 혼동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이런 혼동된 가치관 때문에, 영혼보다 돼지가 우대를 받는 현상이 있지 않습니까? , 학벌, 지식, 세상의 지위가 있으면 교회 내에서도 목소리를 있게 됩니다.

 

사실 우리 교회에 그런 분들이 오시면 죄송한 마음이 들기는 합니다. 별로 우대해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오셨다고 OOO 박사님이 오셨습니다.”라고 높여주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똑같습니다. 사회의 지위가 교회 안에서까지 영향을 주어서는 됩니다. 그런데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도 주로 교인 수가 얼마냐, 1 예산은 얼마냐, 교회 건물은 얼마나 크냐 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돼지를 소유하고 키우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면, 그런 것만이 중요하다면,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이미 교회이기를 포기하고, 크리스천들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자세를 포기한 , 교회의 원래 목적과는 상관없는 것들이나, 크리스천으로서 불필요한 것들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대의 교회의 위기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싫어했습니까? 자신들의 일상생활이 예수님에 의해서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던 것을 예수님 때문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돼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혼보다, 주님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돼지”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한 잃어버린 영혼을 살리기 위해 너의 모든 돼지를 포기해라. 하고 하신다면, “예,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있겠습니까? 혹시 거라사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이제 떠나주십시오.”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분이십니다. 변화시키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바꾸시며 도전해 들어오십니다. 문제를 살짝 덮어놓고 그저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태도를 깨버리시고, 문제를 근본부터 해결하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뜻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제발 상관하지 말고 떠나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혹시 “저 그냥 내버려두세요.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삶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그냥 제가 알아서 게요. 저를 그냥 두세요.”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3.   치유 후의 변화 (18-20)

 

치유를 받은 후에, 귀신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8)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증거 하라고 하십니다.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19)

 

예수님은 사람이 자신과 함께 있지 못하게 하시고 집으로 돌려보내십니까? 예수님은 그를 이전에 자신이 속해 있던 사회에 다시 돌아가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동안 귀신에 들려 따돌림 당하고 고립되었던 사람이 다시 사회에 복귀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일을 증거 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서 그대로 전합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20)

 

그에게 있어서 집이란 어떤 곳입니까? 물론 편하게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곳입니다. 동시에 자신만이 유일하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인 곳입니다. 자기만이 유일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곳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1, 2, 10, 20년이 지나다 보면 주변에 믿는 사람들이 없어집니다. 전부 믿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크리스천들과만 같이 지내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사실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참된 교제를 갖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 하나입니다. 그러나 안에만 머물러선 됩니다.

 

오래 믿을수록 주변에 믿는 사람만 있게 되는데, 주님은 세상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곳이 직장이든, 사업체이든, 사무실이든, 학교이든, 공장이든, 친목 단체이든, 아니면 정말로 우리의 가정이든, 그리스도인이 없는 , 그곳으로 것을 명령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 때문에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길 원하십니다.

 

여러분, 전도가 어려우십니까? 가장 좋은 전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주셨다. 내가 이전에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변했다.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전도입니다.

 

 

[나가는 ]

 

우리 교회는 영혼 구원하여 주님의 제자로 만들자고 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을 구원한다고 해서 1년에 수백 , 수천 명을 전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다들 애쓰고 있지만 작년 같은 경우에는 명도 새로 믿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콜럼버스를 바꾸거나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 괜히 요란을 떠는 것처럼 보일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거창한 일도 아니고 엄청난 부흥을 일으키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해서 교회가 숫자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영혼 구원을 하는 일로 힘들어 하는 사람도 생기고 어려움도 겪습니다. 그러면서 일에 전력하며 나아가는 것이 정말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은 주님이 하셨던 일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른 아침 바닷가에서 소년이 무엇을 집어서 바다로 던지는 것을 지나가던 사람이 보았습니다. “너는 지금 하고 있니? 물으니까, “바닷물에 불가사리들이 떠밀려 왔는데 해가 뜨면 말라 죽을 같아서 바다 안으로 도로 던져주고 있어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은 웃으면서 말합니다. “얘야, 지금 해변가에 수많은 불가사리들이 널려 있는데 많은 것들을 언제 바다 안으로 던져서 살게 있겠니? 그만둬라. 그러자 소년이 대답합니다. “맞아요, 제가 바닷가에 있는 모든 불가사리들을 살릴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방금 제가 바다로 던져 넣은 불가사리는 살았잖아요!


우리 교회가 콜럼버스의 모든 비신자들을 구원받게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받게 있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며 예수님을 믿게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그런 분들이 여러 나왔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람의 운명을 바꾼 일을 우리가 같이 해낸 것입니다, 여러분!

 

, 명에게 전도하는 일은 때로 시시하게 보일 있습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해서 언제 전도하겠느냐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 사람에게 생명을 얻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고 천국에 가도록 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님이 맡기신 일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더욱 힘차게 마음을 함께 모아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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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 강렬한 유혹을 이겨낸 사람 (삼상 24:1-15)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8 (02/27/2022) admin_p 2022.02.27 1538
355 배신의 고통과 죽음의 위기 앞에서 (삼상 23:1-14)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7 (02/20/2022) admin_p 2022.02.20 1231
354 끔찍한 비극도 하나님의 뜻인가 (삼상 22:6-23)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6 (02/13/2022) admin_p 2022.02.13 1463
353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 (삼상 22:1-5)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5 admin_p 2022.02.06 1331
352 도망자가 된 위기의 다윗 (삼상 21:1-15)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 (01/30/2022) admin_p 2022.01.30 1252
351 요나단의 사랑과 사울의 질투 (삼상 18:1-16)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3 (01/23/2022) admin_p 2022.01.23 1285
350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승리한 비결 (삼상 17:31-54)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2 (01/16/2022) admin_p 2022.01.16 1516
349 중심을 보시는 주님 (삼상 16:1-13)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1 (01/09/2022) admin_p 2022.01.09 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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