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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23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0

베드로를 통해 나타난 주님의 능력

(사도행전 932~43)

 

[들어가는 말]

 

오늘 목회편지에 쓴 것과 연속되는 내용입니다. 두 주 전에 포틀랜드에서 열렸던 목회자 컨퍼런스에 다녀왔습니다. 그 뒷이야기를 조금 더 말씀드리면, 이번에도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가 또 딜레이가 되었습니다. 덴버에서 갈아타야 하는데 거기서 갈아타는 시간이 짧았기에 딜레이가 된 것을 그냥 타고 갔으면 비행기를 놓쳐서 토요일에 도착하게 되는 일정이었습니다.

 

마침 그 비행기는 250명 정도 타는 큰 비행기라 수많은 사람들이 일정을 바꾸려고 할 것이 분명해서 재빨리 고객센터로 가서 줄을 섰는데 제가 앞에 선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더 스마트한 것은 줄을 서는 게 아니라 전화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줄을 서는 동시에 항공사 메인 예약 센터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비행기보다 15분 늦게 휴스턴으로 가서 갈아타는 일정으로 바꾸었습니다. 좌석도 더 나은 좌석을 달라고 요청했더니 선심을 쓰는 듯 프리미엄 좌석으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벌금은 부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해서 저는 속으로 당연한 것을 뭘 그리 이야기하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짐을 부친 상태에서 안으로 들어와 비행기 딜레이를 알았기 때문에 짐은 원래대로 덴버로 갔다가 다음 날인 토요일에 왔습니다. 금요일 밤에 콜럼버스에 도착에 보니 역시 짐은 안 왔고 다음 날 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적어놓고 돌아왔는데, 또 항공사 화물센터로 전화했더니 미안하다고 하며 짐이 도착하면 다시 전화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뭔가를 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 날 짐을 받은 후에 전화를 했더니 다른 사람이 받았는데, 뭔가를 주겠다고 한 이야기를 하니까 $75짜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100짜리를 주었는데 왜 $75이냐고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조금 후에 다시 말하기를 $100로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순간 , 액수를 더 높여서 $200짜리를 달라고 할 걸이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습니다. ^^

 

목회자 컨퍼런스에 참석하면 관광 시간이 있습니다. 관광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목회님들, 사모님들, 선교사님들이 쉼을 가지면서 함께 이곳저곳 다니는 가운데 대화하며 더 깊은 교제를 나누라고 하는 휴식의 시간입니다. 그 동안 제가 우리 교회 컨퍼런스를 빼고 모두 19번을 갔는데, 그래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좋은 데를 많이 갔습니다.

 

이번에도 포틀랜드 근교로 가보니 아주 아름다운 곳들이 많았습니다. 연어 부화장(hatchery)도 있었고, 컬럼비아 강(Columbia River)을 끼고 산과 물이 아름다웠습니다. 만년설이 있는 산도 저 멀리 있고, 갔던 곳에는 폭포도 있었고 댐도 있었습니다. 연어와 철갑상어 같은 물고기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곳에 갔어도 혼자 갔기 때문에 그렇게 큰 감흥은 없었고 사진도 거의 안 찍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가족이 함께 있는 곳이 좋은 곳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곳이나 화려한 도시를 여행하더라도 그곳은 계속 살 곳이 아니고 여행을 온 곳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돌이가야 할 집이 따로 있습니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가 있고, 형제자매와 친척들이 있는 곳이 집입니다. 그곳이 진짜 좋은 곳입니다. 우리가 여행이 좋은 이유는 돌아올 집이 있어서입니다. 여러분, 돌아올 집이 없는데 여행을 가보십시오. 그렇게 처량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오래 전에 야외예배를 드렸는데, 스케줄에 따라 야외예배를 드렸을 때와 가스 폭발사고가 나는 바람에 예배드릴 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공원으로 가서 야외예배를 드릴 때가 마음이 달랐습니다. 돌아올 곳이 있으니까 마음이 좋은 것이지, 돌아올 곳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좋은 곳을 다니면서 너무 좋다고 거기에 빠져서 여기 있는 가족들은 안중에도 없이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여행자의 삶을 즐기려고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저의 인생은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혼자 마음대로 살 수는 있겠지만, 제 인생의 결국은 후회 속에서 끝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고 왜 이곳에서 이 시기에 사는지 그 목적과 사명이 있는데, 그런 사명을 망각하고 집을 등진 채 엉뚱한 곳에서 엉뚱하게 사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고, 우리 가정도 사명이 있으며, 우리 목장과 교회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열심히 하다 보면 그 다음 사명을 주시고, 또 그것을 열심히 하면 더 큰 사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엉뚱한 데서 엉뚱한 일을 하며 인생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깨닫고 받들어서 최선을 다해 이루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럴 때 삶이 행복하고 보람이 있습니다. 엉뚱한 일을 하면 순간적인 재미나 쾌락은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행복과 보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신 사명대로 살아갈 때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그것을 감당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한 사람을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1.   중풍병자 애니아의 치유 기적

 

교회를 잔멸하며 복음을 대적하던 사울이 주님의 은혜로 회심하고 복음의 일꾼이 되기 시작할 때쯤, 그래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수가 더 많아지는 부흥이 일어나던 그때(31), 다른 한편에서는 베드로의 사역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2)

 

베드로가 사방을 두루 다니는데, 그렇게 다니는 주요 목적이 성도들을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 한 곳이 룻다입니다. 썩 알려진 도시는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기에도 믿는 성도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룻다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에 위치한, 바다에서 내륙 쪽으로 조금 들어온 곳입니다. 그럼 언제 여기에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까?

 

8장을 보면, 일곱 명의 일꾼들 중 하나였던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광야로 나아가 남쪽으로 가서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즉시 성령께서 또 인도하셔서 그곳을 떠났는데 8:40을 보면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즉 가이사랴에서 정착한 것입니다


남쪽 광야 길로부터 해안을 따라 중부지역인 가이사랴까지 올라가면서 그 사이에 많은 성들이 있는데 빌립은 그곳들에 다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룻다도 있었고 조금 후에 나오는 욥바도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믿고 제자들도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그곳에서 8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 있는 애니아를 만납니다.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33)

 

애니아는 8년 동안 중풍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38년 된 중풍병자도 예루살렘에서 고치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도 고치셨습니다. 38년에 비하면 8년은 짧은 기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2018년으로부터 8년 전이면 2010년인데, 그때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때 저는 우즈베키스탄 단기선교를 갔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꼼짝 못하고 계속 누워 있었다면 그 8년은 정말 끔찍하고 긴 시간입니다. 그렇게 8년 동안 병으로 누워 있었다는 말은 나아질 가능성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애니아를 보며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34-35)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그냥 일어나라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라고 말하면서, 그러니까 네 자리를 정돈하라”라고 합니다. 그러자 8년 동안 누워 있던 애니아가 즉시 일어납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룻다 도시와 사론 평야 지역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됩니다그런데 이것은 마가복음 2장이나 누가복음 5장에서 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던 예수님의 모습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5:24)

 

무슨 말입니까? 이렇게 예수님이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말씀하신 것과 베드로가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한 것을 볼 때, 성경은 이 기적의 초점을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께 맞추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것과 비슷하게 행했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이 기적을 일으킨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명한다. 일어나라.’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 일어나라.” 하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낫게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베드로의 말의 표현입니다. ‘일어나 걸어라.’ 하면 되는데 네 자리를 정돈하라.”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이 말은 너 자신이 펼쳐라혹은 너 자신이 베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애니아는 중풍이 걸린 후에 스스로 자기 자리를 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거동할 수조차 없었던 그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지해서만 살 수 있었습니다. 그가 깔고 누운 이 자리도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펴준 자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이제부터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스스로 자리를 펴라하시며 그런 사람이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가 편안하게 스스로 자리를 깔고 편안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들이 펴준 자리에서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네 자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베풀라. 그들의 자리를 펴주는 사람이 되어 살라.’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던 삶에서 벗어나 남을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전에는 받기만 하고, 자기 유익만 구하고, 나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는 삶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을 모셔 들인 삶이 되었다면 오히려 남을 위해 자리를 펴주며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내 삶의 자리를 정돈한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섬기는 삶을 말합니다. 사실은 주님 안에서 자신의 삶이 정돈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네 자리를 정돈하라.” 그러니까 네 자리를 스스로 펴고, 또 다른 사람의 자리도 펴주며 베풀어라하는 것입니다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삶을 정돈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살 수 있겠습니까?

 

비행기를 타면 비행기가 떠나기 전에 항상 승무원들이 앞에 나와 안전교육을 합니다. 비상구가 어디에 있고, 물에 빠지면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산소마스크가 위에서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때 뭐라고 합니까? 비상시에 산소호흡기가 내려오면 자기가 먼저 착용한 다음에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합니다. 아무리 아이가 있고 병든 사람이 있어도 그들을 먼저 해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먼저 착용하고 그들을 도우라고 합니다. 자기에게 산소가 공급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은 진리 안에서 정돈된 베드로의 삶이지만, 이전에 형편없고 어지러운 삶이었는데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아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의 그러한 정돈된 삶이 이제는 애니아의 삶까지 정돈시켜 주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형편없이 주님을 대적하던 삶을 살던 사울도 주님 안에서 온 인류에게 주님의 생명을 베풀어주는 생명의 통로가 되었습니다이제 주님의 은총으로 삶의 정돈이 가능해진 애니아, 자기 자리를 스스로 펼 수 있게 된 이 애니아 역시 이제 자기만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룻다와 인근 지역의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복의 근원, 생명의 통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정돈은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도 정돈시켜주고 도와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처럼 주님 안에서 삶이 정돈될 때 다른 사람을 살리는, 진정으로 주님이 인정하시는 삶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삶인가를 돌아보아야겠습니다.

 

 

2.   죽었던 다비다가 살아난 기적

 

1)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다비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6)

 

욥바는 룻다로부터 조금 올라가면 있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욥바가 지금 이스라엘의 텔아비브(Tel Aviv)입니다. 바다에 붙어 있습니다. 여기에 다비다라는 여자 제자가 있었습니다. 다비다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 즉 헬라식 이름이 도르가입니다. 히브리식 이름인 다비다와 함께 헬라식 이름인 도르가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녀가 헬라파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다비다는 구제 사업을 많이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비다와 도르가는 모두 영어로는 ‘gazelle’, 즉 한국어로는 영양이나 암사슴이라는 뜻인데, 유대인들이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말하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다비다라는 이름 자체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외모가 아름다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다비다는 이름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36절을 보면 다비다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비다는 자신의 아름다운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운 삶을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비다는 아름다운 믿음의 여인인 동시에 귀한 인격을 갖춘 여인이었다고 알 수 있습니다. 런데 여기서 약간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7-38)

 

보통 사람이 죽으면 금방 썩어서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이 얼마나 더운 지역입니까? 죽으면 썩어서 부패하기 때문에 집안에 둘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다락방에 두었습니까? 38절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룻다에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서 빨리 와 달라고 간청하는데, 그러니까 베드로가 오면 다비다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락방에 시신을 둔 것입니다.

 

사실 다락방이라는 곳은 그런 기적들이 많이 일어난 곳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다락방에서 그를 살린 기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도 열왕기하 4장을 보면 수넴 여인에게 자녀가 없는 것을 보고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해주었으며 그 아들이 죽었을 때 그를 살린 곳도 다락방이었습니다. 또한 오순절에 성도들이 모여 있을 때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 일어난 곳도 다락방입니다.

 

그러니까 다락방이라는 곳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임을 생각하며, 시신을 다락방에 놓고 기다리면서 베드로가 오도록 청했습니다. 베드로가 오면 뭔가를 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욥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믿음이 있었는지 놀라운 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욥바로 가는데, 그때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서서 웁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39)

 

도르가가 살아 있을 때 자기들을 위해 만들어준 속옷과 겉옷을 다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과부들이 너무 슬퍼하며 웁니다. 이렇게 귀한 일을 해주던 자매가 죽었다고 굉장히 슬퍼하며 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르가는 구제를 조금만 하던 사람이 아니라 엄청나게 했고 또 진실하게 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속옷뿐 아니라 겉옷을 다 지어서 주었습니다. 얼마나 사랑과 정성을 베풀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비다는 불쌍한 여인들에게 옷을 지어 나눠주었는데, 특히 그 여인들은 과부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명령한 것을 실천하던 여인이 다비다였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실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제자였습니다. 각 사람에게 재산 개념까지 있던 겉옷과 또 속옷까지 다 지어서 나누어주던 아름다운 마음과 신앙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입던 옷이 낡거나 작아지면 다른 사람에게 나눠줍니다. 아이가 커서 옷이 작아지면 형(언니) 옷을 동생에게 물려주기도 합니다. 또는 옷을 기부 받는 단체들이 많은데, 아이가 입던 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기부합니다. 물론 그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엄격히 말하면 사실 그것은 사랑을 베푼 것이라기보다는 안 쓰는 것을 처분한 것입니다. 쓰는 것을 주었습니까? 안 쓰는 것을 준 것입니다. 내가 가장 요긴하게 쓰고 있는 것을 기부한 적이 있으십니까? 부끄럽지만 저는 없습니다. 내가 지금 아주 잘 쓰고 있는 것을 어떻게 기부합니까? 그래서 안 쓰는 것 중에 깨끗한 것으로 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만 그렇게 하면 자기가 되게 착한 줄로 압니다. 특히 안 믿는 분들에게 오늘이라도 세상을 떠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제가 확실히 지옥이나 천국 가는 것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남을 해코지한 것도 없고 살인, 강도, 도둑질을 안 했으니까 괜찮은 데 가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그런 겁니다. ‘그래도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지 않았는가?’ 사실은 처분한 건데 베풀었다고 착각을 합니다. 이 정도로 정성을 다해 베푸는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고,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독재자나 살인자들과 비교해서 자기가 착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착각입니다.

 

다비다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자신이 못 입게 된 헌 옷을 나누어준 게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속옷과 겉옷, 즉 새 옷들을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인들이 베드로에게 직접 보여준 옷들, 생전의 다비다가 자신들을 위해 직접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은 다비다가 평소에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였습니다. 그렇기에 다비다의 가족도 아닌 많은 여인들이 다비다의 시신 앞에서 그렇게 슬퍼하며 운 것입니다. 그것은 다비다가 그들에게 베푼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마지막 날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있는 우리 모두의 사망률은 100%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호흡이 멈추는 순간, 내 직계가족 외에 주변 사람들 중 나의 존재를 진심으로 아쉬워하면서, 내가 세상을 떠난 것을 너무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며 울어줄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최악의 죽음은 그 사람 참 잘 죽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악한 독재자나 테러리스트들이 죽을 때 잘 죽었다고 하지 누가 슬퍼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변에서 이렇게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며 슬퍼해줄 사람이 있다면 참 아름다운 삶입니다. 내 몸이 시체가 되어 드러누울 때, 본문과 같은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장면이 나의 시신 앞에서도 벌어지기를, 바로 그런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다비다가 살아남

 

이제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혼자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0-41)

 

이 장면도 역시 예수님과 아주 비슷합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 가버나움의 회당장인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의 모습과 너무 비슷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8:54)

 

마가복음에서는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 역시 기적을 일으킨 능력의 중심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3장에서 요한과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가다가 거기에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40대 남성이 구걸하는 것을 보고 그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면서 그를 일으켰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막 몰려드니까 그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3:12, 16)

 

모든 영광을 항상 예수님께 돌렸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인데 왜 나를 주목하느냐?’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임한 것입니다.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2)

 

욥바는 꽤 큰 도시입니다. 그 도시 사람들이 듣고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룻다에서는 8년 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치고, 욥바에서는 죽은 다비다의 시체를 살려내는 등 베드로는 아주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한 결과도 같았습니다.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치니까 그 지역의 사람들이 주께로돌아왔고(35), 죽은 도르가를 살리니까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주를믿었습니다’(42). 그러니까 베드로를 따르고 베드로에게 온 게 아니라, 주님을 믿고 주님께 돌아왔고 주님께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한 결과가 무엇인가? 우리가 진짜로 주님의 사역을 했나 안 했나 어떻게 압니까? 그 뒤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해서 잘했는데, 그 다음에 모든 주목과 칭찬이 나에게 온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이 받으실 때 제대로 한 것입니다. 작은 일을 하고도 나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않거나, 내가 주목을 받지 않으면 혹시 서운해 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서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영광이 안 오고 주님께 영광이 간다는 것은 기뻐할 일입니다. 하늘에 상급을 쌓은 것입니다.

 

 

3.   가장 놀라운 기적

 

8년 된 중풍병자가 일어났다는 것은 엄청난 기적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기적입니다. 죽은 다비다가 살아났을 때 욥바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감격했겠습니까? 특히 그녀가 죽은 것을 보고 너무 슬퍼하며 아쉬워하던 과부들이 얼마나 기뻐하며 감격스러워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는 곧장 욥바를 떠나지 않고 여러 날 동안 욥바에서 체류합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43)

 

생각해보십시오. 이때 베드로가 이런 놀라운 일들을 일으켰으니까 그를 자기 집에 모시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렇게 죽은 다비다를 기도로 살릴 정도의 능력을 지닌 사도를 자기 집에 모신다면 자기 집안 문제도 해결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의 기도로 다시 살아난 다비다는 누구보다도 더욱 베드로를 자기 집에 모시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다비다는 평소에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던 성도였는데, 죽은 자신을 다시 살려준 주님의 도구인 베드로를 당연히 자기 집에 모시고 싶어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비다가 자기 집에서 모시겠다고 했으면 다른 성도들이 모두 양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놀랍게도 그 누구의 집도 아닌, 시몬이란 이름의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물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나 사마리아에 갔을 때나 또 룻다로 갔을 때, 그가 누구의 집에 있었는지 성경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베드로가 어디 머물렀는가가 아니라 그의 복음 전도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여기 욥바에서만은 그가 여러 날 동안이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머물렀다는 사실을 일부러 써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읽으면 당연히 그대로 넘어가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두장이는 가죽 제조 기술자를 말하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를 최하층 천민으로 취급했습니다. 인간으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구약 율법에 의해서 죽은 짐승을 부정하다고 했고, 만약 누군가가 죽은 짐승을 만지면 그 사람은 곧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부정한 사람이 만지는 모든 것이 다 부정해집니다. 먹는 음식과 만지는 사람과 물건까지도 부정해집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를 인간으로 취급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무두장이는 짐승의 가죽을 얻기 위해 짐승을 죽이거나 죽어서 온 짐승을 만지며 그 가죽을 벗겨야 합니다. 죽은 짐승을 만지니까 당연히 부정한 존재가 되고, 부정한 무두장이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이 다 부정해집니다. 그뿐 아니라 부정한 무두장이와 관계를 맺으며 살면 자기도 부정해지기 때문에 사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두장이와는 아예 상종도 않으려 했고, 세상으로부터 격리(왕따)당한 무두장이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곳에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그 옛날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결혼한 여자가 남편을 상대로 먼저 이혼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딱 한 경우가 있었는데, 여인이 모르고 결혼했다가 나중에 남편의 직업이 무두장이였다는 것을 알았을 경우 무조건 이혼이 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무두장이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사람이 무두장이의 집에 들어가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무두장이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는 순간 베드로는 부정해지는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을 모시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친절을 마다하고, 사람들이 그 근처에 가는 것조차 꺼리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그것도 하루이틀이 아니라 여러 날을 머물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시 무두장이를 부정하게 여기며 멀리하던 유대인들 가운데, 무두장이의 손으로 만들어진 가죽제품을 부정하다고 여기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참 아이러니 아닙니까? , 허리띠, 신발, 가방 등 가죽제품이 많았고, 당시 물 부대도 가죽으로서 무두장이가 만든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품들입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무두장이는 부정하고 그가 만지는 모든 것도 다 부정하기 때문에 그 근처에도 가지 않고 사귀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두장이의 손으로 만들어진 가죽제품도 당연히 부정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부정하다고 하며 안 써야 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반대로 일상생활 속에서 가죽제품을 귀하게 여기며 쓴다면 그 귀한 제품을 만드는 무두장이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면 안 되는 일이 아닙니까그러나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를 부정한 존재로 정죄하며 멀리하면서도, 무두장이에 의해 만들어진 가죽제품은 아주 소중하게 여기며 사용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이중성입니까? 이런 모순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여러 날을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를 모시려는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 무두장이가 있다는 사실을 듣자 베드로는 주저 없이 무두장이 시몬의 집을 찾아갔고 욥바에서는 그 집에만 머물렀습니다. 성경에는 거기서 뭐 했나 자세히 안 나오지만, 시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히브리파 유대인이자 정통 사도로서 베드로 안에 있던 이중성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8년 된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이중성과 자기모순을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극복해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처럼 자기를 부인하며 이런 이중성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모습이 사실 우리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세리와 이방인들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사귀고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그것이 무슨 사랑이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만 어울리고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가죽제품은 좋아하면서도 무두장이는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던 유대인들과 우리 사이에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이처럼 모든 인간 속에는 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이중성과 자기모순이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이중성은 더 큰 모순을 낳고, 수많은 문제들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중성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극복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의 더러움을 제거해가는 진정한 주님의 도구, 그리스도인,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고기 잡던 어부였을 뿐, 단 한 번도 체계적인 정규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이 세상에서 놀라운 일을 하고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으며, 심지어 로마 가톨릭에서는 초대교황이라고까지 하는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것은 그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이런 이중성을 극복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가죽제품은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것을 만드는 무두장이는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이중성과 자기모순과 이율배반적인 성향을 믿음으로 극복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욥바의 여러 제자들의 초청을 마다하고 천하게 여겨지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머물렀고, 그 결과 그 이중성을 깨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굳이 여기에 나오는 것은, 베드로가 이제는 종교적인 이중성을 벗어나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10장에 나오는 것처럼 인종적인 이방인의 장벽까지도 넘어서는 것을 여기서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지금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고 계십니다. 그분을 우리의 중심에 모셔 들이기 원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의 안에 있는 주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중심에 모셔 들이고 정말 내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나의 이중성과 모순이 제거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할 때부터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신앙과 인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부터 우리는 자신의 배우자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부터 우리는 자녀에게 본이 되는 믿음의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부터 우리는 이중성을 극복하고 사랑과 진리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할 때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늘 동행하시는 예수님은 갈릴리의 무식했던 어부 베드로를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되게 하신, 바로 그 동일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회적, 내적 이중성을 극복하는 그런 삶이야말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그 모든 것은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 주님만 높여드리며 그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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