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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16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29

박해하던 자가 박해 받는 전도자로

(사도행전 919~31)

 

[들어가는 말]

 

지난 2008년에 돌아가신 소설가 이청준 씨가 있습니다. 그분이 2006년부터 폐암으로 투병하다 2007년에 신문들에 보도된 내용이 있습니다. 폐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특별히 한 신문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자신이 사용해오던 애프터쉐이브 로션(aftershave lotion)이 다 떨어져 가는데, 하나 더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애프터쉐이브 로션은 남자가 면도한 뒤 바르는 로션인데, 사용하던 것이 다 떨어지면 새 것을 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이 살까 말까 주저하는 것은 그 로션이 다 떨어지기 전까지 살아 있을지 혹은 세상을 떠날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대부분 매일 아침 로션을 바릅니다.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아침을 먹습니다. 여자 분들은 대개 립스틱을 바릅니다. 그런데 내가 오늘 바른 이 로션이, 내가 칠한 이 립스틱이 내일도 계속 되리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내가 한 것이 마지막일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특히 여자 분들이 빨간색 계통의 립스틱을 칠할 때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생각하면서 거울을 보고 예수님의 피가 나를 살렸다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생각하시라고 일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일이 내일 또 계속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조금 전 찬송가를 부를 때 보시고 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 ‘아이고, 이건 왜 5절까지 있나? 지겹다.’라고 생각하셨습니까? 5절을 부를 수 없을 때가 올 수 있습니다. 그게 언제일지 모릅니다. 내가 예배를 나오고 싶어도 내 발이 움직이지 못해서 나오지 못하는 날이 올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싶은데 내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더 이상 할 수 없는 그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아침 로션을 바를 때마다, 립스틱을 칠할 때마다, 잠깐 멈추어서 이 병 속에 들어 있는 로션이 다 떨어지기까지 내가 살아 있을까?’ ‘이 립스틱이 다 할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하루의 삶이 보다 더 진지해질 것입니다. 다른 이상한 것, 쓸 데 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젊다고 늦게 가는 게 아닙니다. 언제 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남은 인생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매일 한 순간이라도 멈추어 서서 거울 앞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비록 오늘 하루를 살고 혹시 내일이 계속되지 못한다 해도 어제보다 오늘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이런 주일예배가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일주일 동안 우리가 바쁘게 살다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자리를 잊지 않고 나와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는 시간입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라면 주중에도 나오고, 또 매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개인예배(큐티, 묵상)의 시간이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마치 암으로 투병하는 환자가 자신의 생명을 되돌아보게 하는 애프터쉐이브 로션처럼, 립스틱처럼,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며 바른 길로 갈 것을 결단하며 나아가게 해주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시간이 바로 그런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시각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바로 그것을 함께 살펴보며 나가기 원합니다.

 

 

1.   사울에게 일어난 혁명적 변화

 

1)  사울의 다메섹 전도 (19b-22)

 

지난번까지 살펴본 것은, 사울이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다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만난 다음 그 환한 빛에 3일 동안 눈이 안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나니아라는 제자의 도움으로 눈을 떴고, 세례도 받았으며,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습니다. 이제 영적으로 육적으로 아주 좋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가 한 일은 먼저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몸도 회복되었으니까, 그 다음에 할 일은 이웃과의 관계 회복인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새” (19절하)

 

그런데 본문은 왜 사울이 복음을 증언하기 전에 이름도 나오지 않는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과 며칠 동안 함께 있었다는 것을 굳이 밝히고 있습니까? 하반절이 없고 그냥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지니라하고 나서 20절로 연결되면 되는데, 왜 굳이 이름도 안 나오는 제자들과 며칠을 함께 있었다고 굳이 넣었겠습니까?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만나고 세례를 받은 사울이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과 며칠 동안 함께 지낸 이 시간이 사울의 생애에 있어서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영향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 해답은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도행전 9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울은 본래 예수님을 부정하면서 교회를 잔멸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 넣던 아주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것도 그리로 피신한 그리스도인들을 다 잡아다가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서 종교 재판을 하여 죽여 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부정하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구원자)였다는 것, 그러하신 그분이 놀랍게도 자신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자기가 믿고 있던 것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졌으니 그 충격이 굉장했을 것입니다.

 

사흘 만에 아나니아의 안수로 다시 보게 된 사울은,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제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받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의 인생의 방향과 목적은 이제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자신이 이전에 믿고 있던 것이 헛된 것이었음을 알고 이제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동안 사울이 알게 된 것은, 단지 유대인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시며 그분이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복음의 전체적인 그림으로서 구약과 연결하여 예수님이 자기들이 기다리던 그 메시야라는 것이었지만, 복음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고 어떤 말씀을 가르쳐주셨는지 설명해주지 않으면 복음의 내용을 스스로 알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 사울에게 그 역할을 해준 사람들이 바로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울은 그들과 함께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잔인한 박해자였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만나고 세례를 받은 이 사울의 회심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아나니아가 눈을 안수해주고 세례를 줄 때 거기에 다른 성도들 몇 명도 같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 알려지면서 그들은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사울과 함께 며칠 동안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어떻게 오셨는지, 왜 오셨는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고, 무엇을 행하셨고, 언제 어디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고, 어떻게 하다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또 어떻게 승천하셨는지, 자기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일고 있는 모든 것을 사울에게 빠짐없이 가르쳐준 것입니다. 다메섹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배운 사울은 그 다음 어떻게 합니까?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0)

 

이제 사울은 집에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그 동안 몰라서 대적했던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자기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구원자, 그리스도)이시라는 진리를 자기만 알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내가 알고 있던 것이 엉터리였고 잘못된 것이었다. 이것이 진짜다.’ 하고 나가서 진리를 선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가 나가서 선포하니까 다들 깜짝 놀랍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1-22)

 

이것은 사람들로서는 너무 당연한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사울의 급격한 변화에 모두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에서 마구 멸하려던”(잡아 죽이려던) 자가 사울이고, 다마스쿠스에 온 것도 그들을 잡아서 대제사장들에게 끌고 가려는 것임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그 동안 자기가 박해하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니까,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안 놀라겠습니까?

 

요즘은 세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IS(Islamic State)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IS의 우두머리가 이슬람을 강력히 주장하며 크리스천들을 잡아다 죽이고 테러를 하고 처형하고 살해하다가, 며칠 만에 갑자기 돌변해서 아니다, 예수가 구주이시다. 예수를 믿어라.’ 하는 식으로 IS 대원들에게 선포한 것과도 같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일입니까?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당연히 제거하려 들 것입니다.


 

2)  사울의 피신 (23-25)

 

이제 유대인들은 배교자가 되어 예수를 전하는 사울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3)

 

사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자신의 다메섹 회심 이후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예루살렘을 떠난 지 3년 후의 일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1:17-19)

 

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로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9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22절과 23절 사이는 딱 한 절 차이이지만 3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은 바울의 편지들과 연결해서 볼 때 이해가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삶공부를 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다메섹의 유대인들이 배교자 사울을 죽여 버리기로 공모했다는 것입니다. 사울로 인해 유대교인들 중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막 전하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흔들렸겠습니까? 사울은 극심하게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인데 이제 오히려 거꾸로 되니까 저 사람이 저렇게 될 정도면 그게 진짜인가 보다.’ 하고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유대교를 뒤흔들고 있는 배신자 사울을 죽여 버리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다메섹의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를 했으면, 홀로 그것을 모른 채 복음을 전하던 사울로서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4)

 

누군가를 죽이려고 계획했다면 우리는 사울을 죽일 거다!’ 하고 떠들며 다닐 사람은 없습니다. 은밀하게 암살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언제 어디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갈 때 죽이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은밀하게 계획한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이 그들의 계교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언제 어디서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유대인들의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희미한 정보가 전달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빠짐없이 사울에게 알려졌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습니까?

 

사울이 어떻게 이것을 알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 말은 어떻게 안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누군가가 알려주었겠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계교를 드러나게 하신 분은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알도록 주님께서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공격을 당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 주님은 그 모든 계교가 드러나고 사울에게 빠짐없이 알려지도록 해주셨습니다.

 

사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계교를 알게 되고 사울은 자신의 거처를 옮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킵니다. 밤낮으로 교대하며 지키고 있다가 발견하면 바로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울의 목숨은 정말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대인들의 음모는 또 다시 무산되고 맙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25)

 

이 사건에 대해 기억하며 바울이 나중에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고후 11:32-33)

 

제자들이 광주리에 달아 자기를 성벽에서 달아 내린 이 사건을 훨씬 후에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그때 다메섹을 통치하고 있던 나바테안 왕국의 아레다 왕의 병사들을 매수한 것입니다. 사울이 아라비아로 갔다고 할 때 그것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니라 나바테안 왕국입니다. 다메섹에서 약간 동쪽에 있고 멀지 않으며, 저 아래 요르단 지역까지 걸쳐 있었습니다.

 

그 나바테안 왕국의 아레다 왕(아레타스 4)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가 당시 다메섹까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의 군인들을 매수해서 성문을 불철주야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지켰지만안식일처럼 자기들이 지키지 못할 때는 나바테안 왕국 아레다 왕의 군사들, 특히 고관을 매수해서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아주 창의적인 방법으로 사울이 다시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방법은 사울을 죽이려던 사람들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성문을 지키고 있으니까 성벽을 타고 내려가게 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발한 생각입니까


그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사울을 탈출시킨 사람들이 그의 제자들입니다. 분명히 사울의 제자들이라는 말인데, 사울의 제자들로 보는 학자들도 있고, 그냥 일반적인 제자들인데 이렇게 표현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자들, 즉 예수님을 믿으며 사울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렇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사울과 동행하다 변화된 사람들이었는지, 혹은 다메섹에서 사울의 전도로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인지, 또는 그들이 몇 명인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성경이 굳이 알려주지 않는 것은, 이 사람들이 사울을 살려낸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사울을 구해내셨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또 누구를 통해서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생각지도 못한 방법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지켜주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다소로

 

1)  사울을 보증해준 바나바 (26-27)

 

사울은 그렇게 피신하여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원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 오겠다고 다마스쿠스로 간 지 3년 만에 돌아온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사울이 변화되어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려워합니다. 그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습니까? 8장에 보면 그는 교회를 잔멸하던 사람이고, 스데반이 죽는 일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변했다고 어떻게 그리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6)

 

사울이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은, 그곳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교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자에서 이제는 오히려 박해를 받는 전도자로 변화된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3년 만에 돌아오면서 얼마나 감회가 새로웠겠습니까? 자기가 떠날 때는 내가 예수 믿는 자들을 다 잡아 죽이겠다!’ 하면서 떠났는데, 돌아왔을 때는 그 반대가 되어 오히려 자기가 그렇게 고난과 핍박을 받는 사람이 되고 복음전도자가 되었으니까 감회가 새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기대와는 달리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사울을 두려워하며,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그의 말 자체를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그들에게 불신의 대상이었고 두려움의 존재였습니다. 이때 사울이 사실 얼마나 실망이 되고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홀연히 등장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7)

 

바나바가 어떻게 사울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지, 바나바와 사울이 언제부터 이토록 깊은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할 동역자를 예비해두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길을 예비해놓고 계십니다.

 

이제 바나바는 사울을 사도들에게 데려가는데, 갈라디아서 1장에 의하면 이때 사울이 게바, 즉 베드로에게 갔습니다.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베드로에게 갔는데, 베드로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했다고 썼습니다. 그와 함께 15일 동안 머물 때 다른 사도들은 못 보고 주의 형제 야고보, 즉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이자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나 마찬가지였던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바나바는 베드로와 야고보 앞에서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만난 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일 등을 말하며 보증을 서준 것입니다.

 

 

2)  사울의 예루살렘 사역 (28-30)

 

이제 바나바의 보증 덕분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거기서 지내며 교제를 합니다. 이때 사울이 얼마나 마음이 기뻤겠습니까? 이제 자기가 이들 중 하나가 된 것입니다. 3년 전에는 이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자기가 거기에 받아들여지고 형제가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겠습니까? 거기서 힘을 얻어 예루살렘을 출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담대히 선포하며 헬라파 유대인들과 대화하며 토론도 합니다.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29)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굉장히 힘을 씁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열심히 하는지를 잘 봐야 합니다. 사울을 죽이려고, 즉 살인하려고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왜 죽이려고 합니까? 당할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헬라파 유대인, 즉 유대인인데 헬라 지역에 나가서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인데, 헬라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울도 그리스 지역에 속한 다소 출신이니까 거기서 헬라어로 변론하며 토론합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 아닙니까? 불과 몇 장 앞으로 가보면(6:9) 바로 이런 일을 하던 사람이 스데반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길리기아 출신 사람들도 와서 같이 토론했습니다. 그러니까 길리기아 다소 출신인 사울도 스데반과 변론하는 그 자리에 몇 번이라도 갔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며 예수님을 증언하던 바로 그 자리, 그래서 핍박을 받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죽기까지 했는데, 스데반이 변론하던 바로 그 자리에 지금 사울이 나아간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나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예수님을 박해했는데, 내 목숨도 아깝지 않다. 나도 죽어도 상관없다.’라는 마음으로 가서 변론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이 그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0)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에 있는 항구도시이고, 로마 총독이 머물던 곳입니다. 그곳으로 가서 배를 태워 사울의 고향인 다소로 보내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형제들이라고 했는데, 형제들’(믿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울을 위해 또 다른 동역자들을 붙여주시고 가이사랴까지 같이 가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왜 같이 갔겠습니까? 보호해준 것입니다. 테러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게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본문을 보면 도대체 사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통해 도움을 받습니까? 19절에 보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해 듣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25절에 보면 그의 제자들”, 또 믿는 사람들이 그가 피신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27절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나바가 보증을 서주는 도움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28절에서는 이름도 안 나오는 제자들이 같이 교제하면서 그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도와주며 예수님을 더 잘 믿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30절의 형제들이 악한 계획을 알고 사울을 보호해주면서 가이사랴까지 동행하고, 거기서 배를 태워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그의 고향 다소로 보내줍니다.

 

사울에게 어떻게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났습니까? 그냥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내가 이제는 정말 주님을 위해 살겠다. 내 목숨도 아깝지 않다.’라고 마음을 탁 정하고 나아가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주변의 많은 도움의 손길들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똑같습니다. 막막하고, 답답하고, 길이 전혀 안 보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정해야 합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나' 고민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제가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겠습니다.’ 하며 헌신하고 마음을 정하여 나아가면,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들과 놀라운 방법들을 통해서 역사해주십니다.

 

그런데 사울 입장에서 보면 약간 침울해질 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예루살렘에서 자기가 이전에 부정하며 반대하던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고자 했는데, 복음을 전하고 불과 보름 만에 그 꿈을 접고 고향으로 낙향할 수밖에 없는 좌절의 순간인 셈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변론하며 복음도 전했는데, 주님의 계획은 그가 이때 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그는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신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때 죽으면 안 되고 앞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좌절되면서 마음이 답답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울은 나중에 바나바의 초청으로 안디옥 교회의 공동 목회자가 됩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를 한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사울이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갈라디아서 2:1을 보면, 이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대로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낙향한 지 그때가 14년 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14년 중에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한 1년을 빼면, 그가 고향인 다소로 가서 지낸 기간이 무려 13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앞길이 창창했던 청년 사울이 갑자기 고향으로 가서 무려 13년 동안 침묵하며 가만히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순간입니까그런데 고린도후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난을 많이 당했다고 하며 여러 가지를 죽 열거하는데, 그 중 40에서 한 대 감한 매를 여러 번 맞았다고 언급합니다. 바로 그런 일이 이 13년의 기간 동안 일어났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13년 동안 사울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울을 얼마나 싫어했겠습니까? 같은 고향 사람이니까 죽이지는 않더라도 굉장히 싫어하고 배척하며 왕따를 시켰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유능했던 사울은 13년 동안이나 마치 무능한 실패자처럼 살았습니다.

 

사울이 대략 AD 5년 정도에 태어났다고 보는데, AD 32년경에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3년이 지나 30세의 나이에 고향으로 가서 13년 동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30대의 황금기를 그냥 고향에서 침묵하고 칩거하며 살았습니다. 실패자처럼 있었습니다. 사울처럼 유능하고 뛰어난 인재에게 13년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사울은 13년이라는 그 긴 세월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갔습니다


사실 고향을 찾아갔을지라도 고향에서 잠시 쉬거나 복음을 전한 뒤, 곧장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왜 사울은 무려 13년 동안이나 마치 실패자처럼 살면서도 고향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사도 바울이 자신의 회심 사건을 돌아보며 말하는 22장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할 때(바로 이 9장의 장면에서) 사울에게 즉각 예루살렘을 떠날 것을 직접 명령하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의 그 명령이 있은 직후 믿음의 형제들이 사울을 가이사랴끼지 보호하며 데리고 가서 그의 고향인 다소로 배를 태워 보냈던 것입니다따라서 사울에게는 주님이 가라고 하셨으니까 주님의 또 다른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다소에 머물고 있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주님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13년 동안 열심히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이 이전에 믿고 있던 유대교의 잘못된 사상들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구약에 다 예언된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연결하며 일치시키는 신학적 작업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이 13년 기간 동안 그런 연구와 노력이 있었고 주변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수많은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학적으로 놀라운 편지들인지 모릅니다.

 

13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그때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았지만, 자신의 신앙과 신학의 체계를 세우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30대와 40대 초반의 시기에 얼마나 머리가 잘 돌아갔겠습니까? 그때 성령께서 큰 영감을 주셔서 굉장한 작업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울이 무려 13년 동안이나 고향에 침묵하며 있었던 이유입니다.

 

 

3.   그리하여의 역사 (31)

 

30절 끝이 다소로 보내니라인데 사울이 무대에서 사라지는 느낌이 듭니다. 사울의 낙향은 객관적으로 볼 때 낙담할 만한 일이고 실패라고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남이 볼 때도 열심히 하려고 했으나 실패해서 고향으로 낙향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성경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31)

 

사실 여기서 맨 앞의 그리하여라는 접속사를 사용하는데, 이것이 여기에 맞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하여라고 했으면 앞과 뒤가 같아야 합니다. ‘이렇게 됐다. 그리하여 이렇게 됐다.’라고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됐다. 그러나 저렇게 됐다.’라고 해야 마땅한 내용을 이렇게 됐다. 그리하여 저렇게 됐다.’라고 하니까 말이 안 맞습니다. 앞에서는 뭔가 흐지부지될 것처럼, 사울이 고향으로 가고 이제 다 끝난 것처럼 이야기하고서는 그리하여 잘됐다고 이야기하는 이 접속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사실 더 깊은 성경적인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그 백성인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주신 단어들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그리하여입니다이것을 준비하며 책을 읽다가 아주 재미있는 내용을 보고 그 이야기를 나누기 원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으며, 국민성이 좋습니다. 선진국입니다. 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독특합니다. 어떻게 보면 융통성이 많습니다(사실은 변덕이 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하고 한국 사람이 사업을 같이 하게 되면 일본 사람들이 펄펄 뜁니다. 너무 답답하고, 서로 박자가 안 맞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공장이 일본 회사에서 미국에 납품하는 기계의 부속품을 생산하기로 하청 계약을 맺었습니다. 일본 회사에서는 자신들의 표준을 알려주고 3개월의 납품 기한을 주면서 꼭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국 공장 사장이 대답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일본 회사 사람이 약간 걱정스러운 투로 말합니다. “3개월이라는 기간이 촉박하지는 않겠습니까?” 한국 사장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3개월이 충분합니다.” 하며 잘 대접해서 보냈습니다.

 

  그 후 일본 회사 담당자가 중간에 수시로 확인을 합니다. “진행은 잘 되고 있습니까? 얼마나 진척이 되고 있습니까?” “다 됐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참 넉넉한 우리 민족입니다. 이제 기한이 임박하자 일본 담당자가 훨씬 더 다그칩니다. “, 이제 다 됐습니까?” “, 다 됐습니다.” “, 그래요? 그럼 물건들을 보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물건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일본 담당자가 연락을 합니다. “왜 안 옵니까?” “, , 보냈습니다. 출발했습니다.” 한국에서 짜장면을 시켜보신 분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짜장면을 시켰는데도 안 와서 전화를 합니다. “짜장면 시킨 지가 얼만데 왜 안 와요?” “, , 출발했습니다.” 그러고는 주방에 대고 고함을 지릅니다. “, 짜장면 열 그릇 어떻게 됐어? , 빨리 만들어!” 이런 겁니다. 실제로는 안 옵니다. 만들었어야 보내죠? 일본 사람이 그걸 몰랐습니다.

 

  몇 번 그러다가 급하니까 책임자가 일본에서 날아옵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거의 다 됐습니다. 일주일이면 됩니다.” 보냈다고 하고는 일주일이면 된다고 합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기한을 얘기했는데, 게다가 이미 보냈다고 말해놓고는 아직도 안 됐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하고는 이런저런 이유를 댑니다. 이때 그러니까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왜 약속을 안 지키십니까?” “그러니까 말이죠...” 일본 사람들은 이 그러니까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사실 그러니까라는 말은 책임져야 되는 사람이 아니고 다그치는 사람이 써야 되는 단어가 아닙니까? “아니, 지금 이렇게 하기로 해놓고 어떻게 그럽니까? 그러니까 이래야죠?”라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오히려 구박을 받는 사람이 그러니까...”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그러니까가 여기 31절에 나오는 그리하여입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앞에서는 전혀 기미가 안 보였습니다.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이게 뭔가?’ 어떤 때는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된 것이 잘한 것 같기도 하고 감동도 되는데, 또 어떤 때는 전혀 아니고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이 구별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닐은 차라리 이럴 바에는 안 믿는 게 낫지.’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이상한 생각도 하고 형편없는데도 그러니까입니다. “그리하여(그러니까)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결과를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을 하십니다. 자격도 없고 부족하기만 한 나는 고민하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로 도망갈까 궁리만 하고 있는데, 그렇게 연약하고 형편없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니까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지금 일이 잘 안 되고 답답한 상황에서 그러니까왜 걱정 하십니까? 우리 인생에 주님께서 이 그러니까’, 그리하여의 역사를 일으켜주시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또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들을 통해서 역사해주십니다.

 

바로 이러한 그러니까/그리하여의 주님의 역사를 잘 깨달은 바울이 나중에 로마서 8:28에서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8)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이 약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위한 약속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 31절에 나오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위로의 역사로 함께 해주셔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기 성령의 위로에 주가 달려 있는데, 그것을 보면 또는 후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후원'인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후원이 임합니다. ‘나를 후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라고 하지만 성령의 후원이 임합니다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리스펙(respect,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목회자 컨퍼런스에 갔을 때 다음 컨퍼런스를 주최하는 목사님이 저를 보시더니 목사님, 어떻게 지난번 그렇게 컨퍼런스를 잘하셨어요? 리스펙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존경하고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기 경외한다는 말입니다. 존경하고 존중하는 상대방이 있다면 어떻게 그 앞에서 행동하겠습니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굉장히 조심스러우면서도 최대한 친절하고 부드럽게 행동하며 존중을 표합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위로, 성령의 후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기에 나오는 것처럼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또 우리 교회에게도, 바로 그렇게 그리하여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며 수가 더 많아지는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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